입력 : 2011.12.19 22:12
김낭기 논설위원

영국에 톰슨(E.P.Thompson)이라는 저명한 공산주의 역사학자가 있었다. 좌파 이론가들에겐 영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 학자가 1975년에 발간한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법치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 좋은 것인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했다. "그렇다." 좌파 이론가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법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공산주의 법 이론을 절대진리로 추종해 왔던 이들에게 톰슨의 말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톰슨이 우리를 배신했다"고 했다.
민주당·시민통합당·한국노총이 만든 민주통합당이 정강·정책에서 '법치(法治)'와 '시장경제'라는 말을 빼려다가 다시 넣기로 했다. 민주통합당을 구성하는 자칭 '중도 진보' 세력이 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주장해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이들이 시장경제뿐 아니라 법치주의에 대해서도 얼마나 큰 반감(反感)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민주통합당 참여 세력 중엔 독재정권과 싸웠던 민주화 운동가 출신들이 많다. 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유신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시절에 법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반대자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됐다. 민주통합당 사람들이 독재정권 시대의 법치를 거부하겠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진보·좌파들이 법치를 보는 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은 정의(正義)의 편에 서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선 실정법을 짓밟아도 좋다고 여긴다. 진보·좌파들은 철거민들이 서울 용산의 한 건물 옥상에서 행인과 차량이 다니는 도심대로로 화염병 200여개와 염산병 40여개를 집어던지며 농성을 벌이다 경찰 진압 과정에서 숨지자 과잉진압했다고 경찰만 비난했다. 대법원이 농성 주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을 때도 생존권을 위해 '정당한' 투쟁을 한 철거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FTA) 반대 시위대는 주말마다 서울 도심의 8차선 도로를 불법점거해 자동차를 탄 수많은 시민을 몇 시간씩 오도 가도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경찰이 물대포를 쏘자 인권침해라고 난리를 친다. 자기들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경제식민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정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데 법은 무슨 법이냐는 것이다. 부산 한진중공업에 수십 대의 버스를 타고 내려가 부산 시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시위대도 똑같다.
법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기들의 주장만이 정의라며 법을 짓밟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이 나라는 지금처럼 불법시위에 나설 수 있는 힘 있고 목소리 큰 집단이 쥐고 흔드는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떼쓸 줄도 모르고 떼쓸 힘도 없는 사람들만 앉아서 당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톰슨은 이렇게 말했다. "수백년 영국 역사에서 법은 중립성이라는 가면(假面) 아래 불공평을 숨기고, (가진 자의) 특권과 지배에 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치주의 아래서는 왕이든 부자든 빈말로라도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고, 이 약속이 족쇄가 돼 정말로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누구나 법의 구속을 받는다'는 이념이 널리 퍼지면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자기들 멋대로 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민주통합당은 법치에 대한 반감을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