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하지만 이순신은 한산해전과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대다수 해전에서는 우세한 상황에서 전투를 했다.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임진년(1592년)에 4차례 출동해 크고 작은 16회의 해전에서 전승을 거뒀다. 제1차 출동에서는 세 차례 해전이 있었는데 그때 동원된 조선 수군의 함선은 지원선을 포함해 총 91척이었다. 일본 수군 함선 수는 30척(옥포해전), 5척(율포해전),13척(적진포해전)이었다. 91:30, 91:5, 91:13 구도에서 싸워 모두 이긴 것이다.
다른 해전에서도 상황은 거의 같았다. 비결은 '전투력의 집중'과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이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은 다음 싸우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이었다.
당시 일본 수군은 부산포부터 거제도 동북면에 걸쳐 700~1000척의 함선을 갖고 있었다. 넓은 바다로 나가 결전(決戰)을 벌인다면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 해전이 벌어지는 국면에서는 언제나 조선 수군이 수적 우위를 점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항상 전라좌·우수군, 경상우수군 등이 통합된 상태에서 움직인 반면, 조선의 지리에 어두운 일본 수군은 설상가상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해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장·단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뒤 대책도 냈다. 판옥선이 주력 함선이었던 조선 수군은 첨단 해전전술인 함포 포격 전술로 승부를 걸었는데, 이 전술에도 취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원거리 명중률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명중률을 높이려면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이 경우 칼싸움에 능한 일본 수군의 등선(登船) 백병전에 당할 위험이 컸다.
그렇다면 근접해서 총통을 쏴 명중률을 높이면서 일본 수군의 등선 백병전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창제된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해전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적 지휘선을 향해 돌격해 최근접거리에서 천자·지자·현자총통을 쏜다. 거북선이 거북 등 모양의 덮개를 가지고 그 위에 칼이나 송곳을 꼽아놓은 것은 일본 수군의 장기인 등선 백병전으로부터 조선 수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은 견내량의 좁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한산도 근처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학 날개 모양으로 일본 함선을 에워싸면서 총통으로 선봉의 2~3척에 집중 포격을 가해 순식간에 격파했다. 널리 알려진 학익진(鶴翼陣)은 현측에 있는 다수의 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진형이며 근대 함포 포격전술의 전범(典範)으로 평가된다.
이런 성과는 실력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이순신이 무기체계나 해전전술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주도적으로 대처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혁신 제품인 거북선 창제나 학익진은 이순신의 변화혁신형 리더십의 상징이다. 혁신의 성과물인 거북선에 돛을 달고 나가 사격훈련을 마친 날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임진년(1592년) 4월 12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또 준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외 경영·사회 환경이 극도로 어려운 요즘 우리 리더들은 어떤 경쟁력으로 어떻게 변화를 감지하고 준비하고 있는가. 420년 전 벼랑 끝에 서서 대역전극을 만든 위대한 리더 이순신이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