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연구소 소장
당대 중국 최고의 경제학자는 누굴까. 중국 시사지 ‘중국기업가’가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았던 2008년에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우징롄(吳敬璉) 연구원이 1위로 뽑혔다. 올해 82세인 그는 중국 경제의 오늘을 있게 한 주인공으로 꼽힌다. 사회주의 중국에 ‘시장(市場)’을 접목시켜 중국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바른말도 잘해 ‘중국 경제의 양심’으로도 불린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첫마디. “한국에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김만제 전 부총리의 이름을 거론하며 한국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고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초기에 한국의 발전 경험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양국이 미수교 상태라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꾀를 냈다. 국제기구에 부탁해 동남아에서 국제세미나를 개최케 하고 그 자리에 한국 경제계 인사를 대거 초청해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중국의 한국 배우기는 92년 수교 이후 급피치를 올린다. 94~95년의 1년 사이에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의 권력서열 1~3위가 모두 한국을 방문해 한국 배우기의 절정을 이뤘다. 2000년대 초엔 한국 금융을 배웠다. 당시 금융기관의 부실자산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다이샹룽(戴相龍) 중국인민은행장은 한국자산관리공사를 통해 해법을 찾았다.
2006년엔 새마을운동이 중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중국은 ‘잘살아 보세’란 ‘한국 농민의 정신’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덩치가 부쩍 커지면서 한국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그게 아닌가 보다. 한국이 또다시 중국의 참고서 역할을 할 전망이다. 지난달 하순 베이징에선 한국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과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소장 장위옌) 사이에 ‘한국의 전환기관리 강좌’ 조인식이 열렸다. 골자는 8월부터 연말까지의 특강을 통해 한국이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의 경제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전환기관리 경험을 중국에 전수한다는 것이다.
이를 양국의 민간 교류로 치부하기엔 의미하는 바가 사뭇 크다. 우선 중국 수강생 중 상당수가 공무원이다. 또 강사는 정책을 직접 입안했던 우리 전직 관리들이 주를 이룰 전망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위기관리 노하우가 통째로 중국에 전수될 예정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중국이 요청한 12가지 강의 주제다. 중국의 현재 고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1.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을 어떻게 피해야 하나, 2. 금융자유화를 어떤 순서로 해야 하나, 3. 금융자유화는 은행에 어떤 위험을 가져오는가, 4. 한국의 산업정책을 어떻게 봐야 하나, 5. 고령화 대처 방법은 무언가, 6. 중국이 국유기업 개혁을 하면서 한국 재벌로부터 배울 점은 무언가, 7. 왜 한국의 정책입안가와 학계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나, 8. 새마을운동에서 배울 점은 무언가, 9. K팝의 비약적 발전 원인은 무언가, 10. 종교는 한국의 현대화와 사회변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11. 한국 대선은 한국 외교, 특히 대중외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12.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에 대한 한국정부와 한국민의 생각은 무언가.
중국이 제시한 주제엔 경제와 사회는 물론 종교와 문화 분야까지 망라돼 있다. 특히 ‘중진국 함정’에 빠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서 장기간 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고속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빈부격차 등 각종 사회문제가 폭발한다. 한 해 18만 건 이상의 시위가 터지는 중국 상황이 현재 중국의 위기감을 방증한다.
중국이 한국으로부터 배우려는 이유는 자명하다.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며 선진국 문턱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번 고비를 넘기고 나면 어떻게 될까. 한국으로부터의 학습은 끝이 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한 가지 빠진 게 있는 것 같다. 그건 경제발전과 함께 어떻게 ‘민주화’를 이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도 한국은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성공적 경험을 갖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어서면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다고 한다. 한국도 1인당 소득이 약 3300달러를 기록한 87년에 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을 치른 2008년에 3000달러, 지난해에는 5000달러를 돌파했다. 그런 탓인지 최근 중국의 공권력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민초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이 앞으로 어떤 방식의 민주화를 선택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흐름만큼은 거역할 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