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 1주기 맞아 고국 찾은 박유아 씨
기사입력 2012-12-17 03:00:00 기사수정 2012-12-17 1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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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태준… 그의 삶은 국가 그 자체였다”
“어제 1주기 추도식 분위기가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가족이 일제히 흐느끼는 순간 플래시가 팍 팍 터졌다. 갑자기 무대에 올려지는 기분이랄까….” 약간의 냉소와 관조가 담긴 ‘예술가’다운 답이라고 생각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 박유아 씨(51)를 만난 것은 1주기 다음 날인 14일 오후 서울에서였다.
“우리의 제사(祭祀)는 보통 사람들 것과는 달랐다. 아버지 산소는 이미 공적인 장소가 되어 버려 지난 추억과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다.”
박 씨와의 인연은 7,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 기자를 하던 시절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그와 인연이 되었다. 그는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한 중견 작가였지만 뭇사람들에게는 작품 이전에 ‘누구의 딸’로 알려져 있었던 터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굉장히 부드러운 분
그는 ‘유명인의 자녀’ 하면 떠오르는 ‘공주병’ ‘잘난 체’ 같은 것이 없었다. 소박하고 소탈했고 유쾌했다. 다만 간간이 “아버지 인생에 우리 가족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큰 바위 얼굴’을 지켜야 했던 가족의 마음고생이 있었음을 짐작하곤 했다. 지금은 좀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평소 인터뷰를 마다했던 그와 마주 앉았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는데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예술가 기질도 많아서 그림도 잘 그렸다.”
―화가 나면 구둣발로 직원들 조인트(정강이뼈의 속어)도 걷어찼다던데….
“그 사람이 미웠다기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을 거다. 아버지는 우리(포스코)가 하는 일이 대한민국 선조들의 피 값이라고 생각했다.…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기도 했다. 남 이야기를 경청하고 틀렸다고 생각되면 바로 인정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교류하나 할 정도로 인간관계도 넓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연합을 할 당시 일본에 머물던 아버지를 찾아왔다. 5·16세대에게 DJ는 빨갱이 소리 듣던 사람 아니었나. 그러나 아버지는 흔쾌히 만났고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해 대화가 잘됐다고 하셨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은 진정성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분이다. 완벽하면서도 매력 있는 남자였다.”
―(박 회장이) 어떻게 포스코를 맡게 됐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직후 아버지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했다. 아버지는 ‘정치인은 당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나는 내 의견과 당론이 다르면 움직일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박 전 대통령도 그 말을 수긍했고 포스코를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생전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눴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 씨는 “엄마로부터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괴로움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나.
“지나가는 말로 ‘힘들다’ ‘피곤하다’란 말을 툭툭 던지긴 했어도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하긴 싫다 해서 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버지의 삶은 국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나.
“살아계실 때도 굉장히 불쌍했다. 당신 삶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엔 나이 들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에 집중하는데 그럴수록 아버지만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없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인간의 몸은 쉬어야 충전이 된다. 아버지는 쉼이 없었다. 한계를 넘어 혹사했다. 하긴 그 세대는 정신력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했던 세대이니까. 그래서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 정말 싫다(웃음).”
―가족으로서 심정은 어땠나.
“집안 구성원 자체가 아버지의 일을 위해 있는 사조직이었다(웃음). 우리 가족의 모든 가치 판단은 ‘아버지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식당 가서 음식을 사먹는 일부터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모든 행동이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했다. 완전히 부속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공적인 일이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
“말(言)을 배우면서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서 아버지 일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할 사이도 없었다. 하신 일이 후대에 평가를 받아서 다행이라고 할까(웃음). 만약에 정당하지 못했다면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결속력이 더 강해졌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
―자기 절제나 관리가 정말 대단하셨던 분 같다.
“한마디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정말 눈곱만큼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편찮으실 때도 그랬다. 평생을 ‘내가 국가다’ 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니 몸이 아프다고 습관이나 생각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엄마도 그렇고. 부부가 똑같았다.”
―그렇게 완벽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행운인가.
“숨이 막히지.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자식 키우면서 생각하는 건데, 부모는 좀 망가져 줘야 한다(웃음). 자식이 좀 가까이 갈 여지가 있어야지.”
―인간이란 게 물욕의 동물인데 살던 집도 기부하고 마지막까지 전세 살다 돌아가셨다.
“도통해서가 아니라 가치가 좀 달랐던 것 같다. 돈은 내가 쓸 정도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기업을 일으켰지만 사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상주의자였다. 모스크바대 총장이 포스코를 돌아보고는 레닌 동지가 꿈꾸던 이상향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지막에 아들 집에 들어가 사시려고 했는데 이사를 3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원래 집 없이 사셨다. 5·16 직후에 내가 태어났는데 육영수 여사가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가 너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박 대령이 어떻게 집도 없이 사느냐’ 하셔서 박 전 대통령이 마련해준 게 북아현동 집이었다. 막내 남동생을 빼고 네 자매가 모두 결혼해 나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살림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계를 책임지던 엄마가 동대문시장에 손바닥만 한 가게를 사서 몇십만 원 월세 받아 생활에 보탰는데 그게 나중에 ‘동대문 상가 한 동 전체를 남의 명의로 갖고 있다’고 기사가 나오더라.(잠시 말이 끊겼다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극단적으로 몸조심하며 살았다. 친척들은 포항제철이 있던 포항 기차역에도 내리지 못했는데… 차라리 잘못한 일이면 괜찮았을 텐데. 억측과 모함이 너무 억울해서 자살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억울하다고 분개할 일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며 총리 직을 던지고 바로 집을 팔아 전세금만 빼고 나머지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왜 하필 아름다운재단이냐고 여쭸더니 ‘시민단체가 힘을 가져야 사회가 균형이 생긴다. 견제세력이 있어야 정치권이 마음대로 못한다’ 하셨다. 그러고는 평생 전세를 사셨다.”
러 대학총장 “포스코는 레닌이 꿈꾼 이상향”
―아버지의 임종을 못했다고 들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연말에 비행기표를 예매해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8시쯤 동생이 ‘조금 빨리 오는 게 좋겠다’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밤 비행기를 못 잡고 다음 날 낮 12시 비행기를 예약해놓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인공호흡기를 뺐는데 숨이 남아계신다는 말을 언니한테 전해 듣고 나를 기다리시는구나 생각했다. 뉴욕 집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속보를 보면서 ‘기다리지 말고 편안하게 가시라’고 나만의 임종을 치렀다.”
―‘아내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들었다.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박태준 한 사람을 위해 살았으니까. 또 당신의 부재가 엄마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너무 잘 아셨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일 현충원으로 출근하신다 해서 걱정했는데 그게 엄마 나름의 치유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말릴 수가 없었다.”
―80년 민주화 세대다. 아버지와 의견 차이는 없었나.
“내가 81학번인데 데모가 연일 이어져 1학년은 거의 다니지를 못했다. 나는 미술 전공(이화여대 동양화과)이어서 그냥 조용히 학교를 다닌 편이었다.”
―그래도 운동권 학생들이 겨냥하는 대상이 아버지 세대였다면 좀 혼란스럽지 않았나.
“당연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느끼셨을 테니. (내가) 나이 먹어 갈수록 아버지가 생전에 많이 외로웠을 것이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태준의 딸’이 아닌 ‘박유아의 삶’
―어렸을 적,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특권층이라기보다 남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가 베푸는 걸 좋아하는 성향을 물려받은 것도 같고. 겨울에 나는 두꺼운 새 스타킹 신고 등교하는데 친구들은 헌 스타킹 신고 오는 것을 보는 것도 미안했다. 중학교에서는 남들보다 반찬이 많은 도시락을 꺼내놓기가 민망해 스트레스가 심했다. 중학교가 판자촌 근처였는데 학비 못 내는 친구들 사정을 엄마한테 이야기해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이것을 애들 앞에서 말해 버리는 것 아닌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남 돕는 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은 재벌집 딸로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 가족은 재벌이 아니다. 아버지도 창업자라고는 하지만 월급 사장이었고. 포스코 주식을 국민주로 바꿀 때도 ‘나는 한 주도 안 갖는다’는 게 원칙이었다.”
박 씨는 올해 9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화랑(옵시스아트)에서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부모 형제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칼로 썰고 던지며 피를 묻히고 거울을 깨는 행위예술이었다. 박 씨는 퍼포먼스 제목을 ‘효(孝)’라고 했었다.
―당시 나도 지켜봤지만 좀 파격적이었다. 왜 그런 퍼포먼스를 했나.
“나를 발가벗기고 싶었다. 단단하게 두른 갑옷을 벗어던진 것 같아 시원했다.”
―하필 제목이 왜 ‘효’였나.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나’를 던져버리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기자에겐 이 말이 ‘박태준의 딸’로서가 아닌 이제 ‘나, 박유아의 인생’을 살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버지 박 명예회장도 무덤 속에서 그걸 가장 원하고 있지 않을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의 둘째 딸이자 미술가인 박유아 씨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현재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그는 13일 박 명예회장 타계 1주기를 맞아 한국을 찾았다. 올해 9월엔 한국 화랑에서 생고기를 자르고 던지는 다소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던 그는 “내 안에 있는 갑옷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시원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우리의 제사(祭祀)는 보통 사람들 것과는 달랐다. 아버지 산소는 이미 공적인 장소가 되어 버려 지난 추억과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다.”
박 씨와의 인연은 7,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 기자를 하던 시절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그와 인연이 되었다. 그는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한 중견 작가였지만 뭇사람들에게는 작품 이전에 ‘누구의 딸’로 알려져 있었던 터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굉장히 부드러운 분
그는 ‘유명인의 자녀’ 하면 떠오르는 ‘공주병’ ‘잘난 체’ 같은 것이 없었다. 소박하고 소탈했고 유쾌했다. 다만 간간이 “아버지 인생에 우리 가족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큰 바위 얼굴’을 지켜야 했던 가족의 마음고생이 있었음을 짐작하곤 했다. 지금은 좀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평소 인터뷰를 마다했던 그와 마주 앉았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는데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예술가 기질도 많아서 그림도 잘 그렸다.”
―화가 나면 구둣발로 직원들 조인트(정강이뼈의 속어)도 걷어찼다던데….
“그 사람이 미웠다기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을 거다. 아버지는 우리(포스코)가 하는 일이 대한민국 선조들의 피 값이라고 생각했다.…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기도 했다. 남 이야기를 경청하고 틀렸다고 생각되면 바로 인정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교류하나 할 정도로 인간관계도 넓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연합을 할 당시 일본에 머물던 아버지를 찾아왔다. 5·16세대에게 DJ는 빨갱이 소리 듣던 사람 아니었나. 그러나 아버지는 흔쾌히 만났고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해 대화가 잘됐다고 하셨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은 진정성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분이다. 완벽하면서도 매력 있는 남자였다.”
―(박 회장이) 어떻게 포스코를 맡게 됐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직후 아버지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했다. 아버지는 ‘정치인은 당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나는 내 의견과 당론이 다르면 움직일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박 전 대통령도 그 말을 수긍했고 포스코를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생전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눴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 씨는 “엄마로부터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괴로움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나.
“지나가는 말로 ‘힘들다’ ‘피곤하다’란 말을 툭툭 던지긴 했어도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하긴 싫다 해서 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버지의 삶은 국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나.
“살아계실 때도 굉장히 불쌍했다. 당신 삶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엔 나이 들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에 집중하는데 그럴수록 아버지만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없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인간의 몸은 쉬어야 충전이 된다. 아버지는 쉼이 없었다. 한계를 넘어 혹사했다. 하긴 그 세대는 정신력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했던 세대이니까. 그래서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 정말 싫다(웃음).”
―가족으로서 심정은 어땠나.
“집안 구성원 자체가 아버지의 일을 위해 있는 사조직이었다(웃음). 우리 가족의 모든 가치 판단은 ‘아버지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식당 가서 음식을 사먹는 일부터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모든 행동이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했다. 완전히 부속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공적인 일이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
“말(言)을 배우면서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서 아버지 일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할 사이도 없었다. 하신 일이 후대에 평가를 받아서 다행이라고 할까(웃음). 만약에 정당하지 못했다면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결속력이 더 강해졌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
―자기 절제나 관리가 정말 대단하셨던 분 같다.
“한마디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정말 눈곱만큼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편찮으실 때도 그랬다. 평생을 ‘내가 국가다’ 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니 몸이 아프다고 습관이나 생각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엄마도 그렇고. 부부가 똑같았다.”
―그렇게 완벽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행운인가.
“숨이 막히지.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자식 키우면서 생각하는 건데, 부모는 좀 망가져 줘야 한다(웃음). 자식이 좀 가까이 갈 여지가 있어야지.”
―인간이란 게 물욕의 동물인데 살던 집도 기부하고 마지막까지 전세 살다 돌아가셨다.
“도통해서가 아니라 가치가 좀 달랐던 것 같다. 돈은 내가 쓸 정도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기업을 일으켰지만 사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상주의자였다. 모스크바대 총장이 포스코를 돌아보고는 레닌 동지가 꿈꾸던 이상향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지막에 아들 집에 들어가 사시려고 했는데 이사를 3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원래 집 없이 사셨다. 5·16 직후에 내가 태어났는데 육영수 여사가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가 너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박 대령이 어떻게 집도 없이 사느냐’ 하셔서 박 전 대통령이 마련해준 게 북아현동 집이었다. 막내 남동생을 빼고 네 자매가 모두 결혼해 나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살림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계를 책임지던 엄마가 동대문시장에 손바닥만 한 가게를 사서 몇십만 원 월세 받아 생활에 보탰는데 그게 나중에 ‘동대문 상가 한 동 전체를 남의 명의로 갖고 있다’고 기사가 나오더라.(잠시 말이 끊겼다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극단적으로 몸조심하며 살았다. 친척들은 포항제철이 있던 포항 기차역에도 내리지 못했는데… 차라리 잘못한 일이면 괜찮았을 텐데. 억측과 모함이 너무 억울해서 자살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억울하다고 분개할 일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며 총리 직을 던지고 바로 집을 팔아 전세금만 빼고 나머지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왜 하필 아름다운재단이냐고 여쭸더니 ‘시민단체가 힘을 가져야 사회가 균형이 생긴다. 견제세력이 있어야 정치권이 마음대로 못한다’ 하셨다. 그러고는 평생 전세를 사셨다.”
러 대학총장 “포스코는 레닌이 꿈꾼 이상향”
―아버지의 임종을 못했다고 들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연말에 비행기표를 예매해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8시쯤 동생이 ‘조금 빨리 오는 게 좋겠다’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밤 비행기를 못 잡고 다음 날 낮 12시 비행기를 예약해놓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인공호흡기를 뺐는데 숨이 남아계신다는 말을 언니한테 전해 듣고 나를 기다리시는구나 생각했다. 뉴욕 집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속보를 보면서 ‘기다리지 말고 편안하게 가시라’고 나만의 임종을 치렀다.”
―‘아내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들었다.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박태준 한 사람을 위해 살았으니까. 또 당신의 부재가 엄마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너무 잘 아셨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일 현충원으로 출근하신다 해서 걱정했는데 그게 엄마 나름의 치유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말릴 수가 없었다.”
―80년 민주화 세대다. 아버지와 의견 차이는 없었나.
“내가 81학번인데 데모가 연일 이어져 1학년은 거의 다니지를 못했다. 나는 미술 전공(이화여대 동양화과)이어서 그냥 조용히 학교를 다닌 편이었다.”
―그래도 운동권 학생들이 겨냥하는 대상이 아버지 세대였다면 좀 혼란스럽지 않았나.
“당연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느끼셨을 테니. (내가) 나이 먹어 갈수록 아버지가 생전에 많이 외로웠을 것이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태준의 딸’이 아닌 ‘박유아의 삶’
―어렸을 적,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특권층이라기보다 남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가 베푸는 걸 좋아하는 성향을 물려받은 것도 같고. 겨울에 나는 두꺼운 새 스타킹 신고 등교하는데 친구들은 헌 스타킹 신고 오는 것을 보는 것도 미안했다. 중학교에서는 남들보다 반찬이 많은 도시락을 꺼내놓기가 민망해 스트레스가 심했다. 중학교가 판자촌 근처였는데 학비 못 내는 친구들 사정을 엄마한테 이야기해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이것을 애들 앞에서 말해 버리는 것 아닌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남 돕는 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은 재벌집 딸로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 가족은 재벌이 아니다. 아버지도 창업자라고는 하지만 월급 사장이었고. 포스코 주식을 국민주로 바꿀 때도 ‘나는 한 주도 안 갖는다’는 게 원칙이었다.”
박 씨는 올해 9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화랑(옵시스아트)에서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부모 형제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칼로 썰고 던지며 피를 묻히고 거울을 깨는 행위예술이었다. 박 씨는 퍼포먼스 제목을 ‘효(孝)’라고 했었다.
―당시 나도 지켜봤지만 좀 파격적이었다. 왜 그런 퍼포먼스를 했나.
“나를 발가벗기고 싶었다. 단단하게 두른 갑옷을 벗어던진 것 같아 시원했다.”
―하필 제목이 왜 ‘효’였나.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나’를 던져버리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기자에겐 이 말이 ‘박태준의 딸’로서가 아닌 이제 ‘나, 박유아의 인생’을 살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버지 박 명예회장도 무덤 속에서 그걸 가장 원하고 있지 않을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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