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
“임자, 어쩌면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일 듯싶네.” “무슨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시느냐”는 만류에 박 대통령은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아니야, 핵무기는 전혀 다른 차원일세.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겠지?”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셔온 이 인사는 그의 낯빛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어두웠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석 달 뒤 10·26사건이 일어났다. 핵무기와 이 비극의 인과관계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인사는 오랫동안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핵무기는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라 했다.
백선엽 장군은 3년 전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6·25 전쟁의 생생한 회고담이다. 그는 지면에 싣지 못한 이야기를 사석에서 중앙일보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백 장군은 50년 동안 왜 김일성이 남침을 했는지 혼자 곰곰 따져보았다고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딱 하나야. 그가 사단 병력만 지휘해 봤어도 결코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을 거야. 소대나 중대 단위의 게릴라 전투가 전부였으니…. 큰 전투를 경험했다면 모험주의에 빠져 무모한 전쟁을 일으킬 리 없지.”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경험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이 두 장면을 떠올린 것은 연일 도를 넘는 북한의 핵 위협 때문이다. 갓 핵실험을 한 나라가 “핵 선제타격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는 경우는 난생처음이다. “서울뿐 아니라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 저주를 퍼붓는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 공격은 가능할까? 이성적인 기준에선 불가능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은 핵 보유국이 비핵 국가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극적 안전보장을 의무화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255호는 비핵 국가가 핵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핵 보유국들이 즉각 개입해 보복하도록 못박고 있다. 핵우산을 의미하는 적극적 안전보장 조치다. 따라서 핵 단추를 누르는 순간 가장 많이 잃는 쪽은 지도상에서 가족정권이 사라질 북한일 것이다.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다. 우선, 스물아홉 살 김정은의 경험 미숙이 언제 합리적 판단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사납게 짖는 개는 물지 않지만, 미친 개는 막무가내로 덤비는 법이다. 국제사회 분위기도 예전과 판이하다. 세계 유력 언론들이 연일 북한 핵 기사를 다룰 만큼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어제 미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역시 북한 은행들의 불법 영업을 금지시키는 등 예전과 온도 차가 느껴진다. 북한의 의도대로 국제적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일한 근본적 해법은 ‘북한의 체제 전환’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 유동성도 커졌다.
우리로선 별수가 없다. 핵우산이 찢어지지 않도록 한·미 동맹을 다지고,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두텁게 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 북한이 ‘자산’인지, 아니면 ‘부담’인지 고민하게 해야 한다. 북한은 NPT체제가 발효된 1970년 이후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 공격을 위협하는 유일한 나라다. 마지막 핵 공갈이 통할지, 아니면 서서히 망해갈지 북한은 갈림길에 섰다. 핵무기는 파괴적 유혹을 부르는 양날의 칼이다. 지난 40여 년간 스스로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은 나라치고 개발 주역들이 테러나 암살의 비극적 운명을 맞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쩌면 북한도 핵무기를 끌어안고 파멸을 재촉하는지 모른다.
이 철 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