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5.02 03:21 | 수정 : 2013.05.02 09:06
지난해 對EU 무역에서 15년 만에 적자 난 진짜 이유는?
이성훈 파리특파원


저는 같은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대여섯가지 언어로 얘기를 나누는 경우를 목도한 적도 있습니다. 어지간한 종업원은 영어와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 3개 언어로 가볍게 주문을 받습니다. 뉴욕이나 런던, 파리에서도 이런 경험은 하기 어렵죠. 이런 장면을 보면 브뤼셀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글로벌 도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U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27개국이 모인 정치·경제 연합체입니다. 이 EU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EU집행위원회와 입법부인 EU의회, 국방 연합조직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유럽 핵심 기관들이 브뤼셀에 있습니다. 브뤼셀이 유럽합중국의 수도(首都)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외교관·로비스트 등만 7만명 몰려있어
브뤼셀은 EU의 모든 정책 결정 총본산
우리는 흔히 유럽 도시라고 하면 파리·런던·베를린 같은 곳을 떠올리지만, 유럽대륙의 핵심 중의 핵심 노른자위는 브뤼셀입니다. 유럽의 주요 정치·경제·산업·군사 정책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단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부와 기업, 언론이 이곳에 많은 엘리트 인력을 파견합니다.
현재 브뤼셀에는 약 160개 대사관에 소속된 외교관만 2500명쯤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EU집행위와 EU의회, NATO 등에 소속된 직원 수를 합치면 외교관·준외교관 수가 5만명이나 됩니다. 2009년 당시 3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4년 여만에 70% 가까이 급증한 것입니다. 브뤼셀의 총인구는 고작 110만명인데 말이지요.
이 뿐이 아닙니다. EU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기업이 고용한 로비스트가 약 2만명에 이릅니다. EU집행위원회에 공식 등록된 로비 관련 단체만 2500여개입니다. 그래서 브뤼셀은 미국 워싱턴 DC와 맞먹는 ‘로비 신천국(新天國)’으로 첫손 꼽히고 있습니다. 브뤼셀 상주 특파원 숫자도 1000여명으로 워싱턴DC보다 많다고 합니다. 200석에 달하는 EU 본부 기자실에 들어가면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기자실에는 전문지 취재 기자를 가장한 로비스트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EU의 고위 관리를 상대로 자신이 대변하는 기업이나 정부에 유리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집니다. 하지만 이런 국제도시 ‘브뤼셀 속에서 한국’은 작기만 합니다.
EU 한국대표부 인력은 약 25명인데, 이들은 주(駐)벨기에 한국대사관 업무를 함께 처리합니다. 2011년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후 업무는 훨씬 늘었지만, 인원은 거의 제자리걸음입니다. 반면 중국의 EU대표부에는 기업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무원 상무부에서만 12명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민간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 2000여개 기업이 유럽 본부 또는 본사를 브뤼셀에 두고 있습니다. 일본 도요타가 브뤼셀에 유럽 본부를 둔 것은 벨기에 자동차 수요가 많아서가 결코 아닙니다. 환경규제, 기술표준, 담합 등과 관련한 EU 집행위와 의회의 결정에 따라 유럽 자동차 시장이 요동치는 만큼, EU의 정책 방향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입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EU와 경제동반자협정(EPA)을 추진 중인 일본의 자동차 업계는 최근 유럽의 안전·환경 기준을 따르는 대신, EU에 자동차 관세(10%)를 철폐하자는 협상 카드를 준비 중입니다. EU가 종종 비관세 무역장벽으로 활용하는 환경규제의 예봉(銳鋒)을 미리 피하면서 동시에 역내에 판매되는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지요.
반면 우리나라는 브뤼셀에 드리는 공(功)이 이들과의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부족합니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 등을 통해 파악해 보니, 브뤼셀에 유럽 본부를 둔 우리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대부분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파리에 있지요. 수요가 많은 이들 도시에 본부를 두는 것까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직접 고객과 부딪히며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브뤼셀의 모습/ 출처=벨기에 관광청 유튜브 캡처

브뤼셀에 유럽본부 둔 한국 기업 전무(全無), 고용 로비스트는 3명
일본·중국의 대공세와 큰 격차
하지만 어떤 물건에 얼마의 관세를 붙여 수입하고, 각 제품에 어떤 규격과 사양을 적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EU입니다. EU를 모르고선 물건을 제대로 팔 수 없고, 설사 잘 팔리더라도 언제 어떻게 세금과 규제 폭탄을 받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 기업들의 사정을 보면, 브뤼셀을 무시(無視)하거나 푸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유럽 본부는 고사하고 브뤼셀에 사무소나 연구소를 운영하는 곳도 삼성, 현대차, 두산, 아시아나 등 다섯 손가락 안팎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이들도 대부분 현지 영업이나 연구개발(R&D) 등의 업무를 할 뿐, EU를 상대로 정보 수집·분석이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이끌어 내기 위해 로비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삼성과 현대차가 로비스트를 활용하는데, 그 숫자도 3명 내외라고 합니다.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가 2만명이나 되는데, 수출액 기준 세계 7위인 한국이 고용한 로비스트가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지요.
EU를 제대로 공략하려면 로비스트가 필수적입니다. 이들은 EU집행위와 의회 등을 상대로 정보수집·분석 외에 법안설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정된 법안을 뒤집거나 연기하는 ‘숨은 실력자’들입니다. 27개 회원국 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EU 내 정보를 파악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이끌어 내려면 이들을 잘 활용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EU집행위도 기업의 입장을 반영한다는 취지로 로비스트와 공개적으로 협조하기도 합니다.
일본은 정확한 현황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각 기업들이 고용한 로비스트만 수 십명이라고 합니다. 이와 별도로 약 70개 기업이 돈을 내서 유럽일본비즈니스협의회(JBCE)란 단체를 1999년 세웠습니다. 이 단체는 EU가 일본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시행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게 주 목적으로 상근 직원만 10명입니다. 우리나라도 유럽한국경제인협회(KECEU)라는 단체를 1991년 만들었지만, 친목 모임에 가깝고, 직원이 3명 뿐인 무역협회 브뤼셀 지부가 사무국 역할을 겸할 정도입니다.
EU는 중국·미국과 함께 한국과 무역 거래가 가장 많은 경제 권역입니다. 그런데 2011년 EU와 FTA를 체결한 후 우리나라는 지난해 EU와의 무역에서 15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赤字)를 냈다고 합니다. 물론 EU 경제위기로 우리의 수출환경이 나빠진 게 큰 원인이지만, 비단 그것 뿐일까요? 외부 환경이나 비용 지출 탓만 하고 지금처럼 EU를 무시하다가는 일본·중국 등 경쟁국에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대(對)EU 경제·비즈니스 관계에서도 ‘백전백패(百戰百敗)’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말 유럽연합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EU 전체 국내총생산(GDP)은 12조2600억유로로 전세계 GDP의 25.8%를 차지해 미국(10조8980억유로·22.9%)과 중국(4조3290억유로·9.1%), 일본(4조1180억유로·8.7%)을 이미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EU를 앞으로도 계속 무관심의 대상으로 방치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