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9.29 14:15 | 수정 : 2013.09.29 14:21
문용선 부장판사

“회장이 담 넘어가서 물건을 훔쳐오라면 훔치겠느냐.”
“부동산도, 주식도 다 팔아 (김원홍에게) 보냈고 더 이상 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지자 펀드를 만들어 범행에 이르렀다.”
“최태원은 왕이고 최재원은 행동대장 같다.”
◇최태원 SK회장 형제를 ‘조직폭력배’와 ‘거지’로까지 비유
지난 27일 오후 최태원 SK그룹 회장 형제에게 실형(實刑)과 동반구속을 선고한 문용선(55)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 부장판사는 판결 선고 이전에 2시간 남짓 판결문을 읽었다.
그는 이날 “재계 서열 3위가, 아시아 변방 어디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회장이 아무 잘못 없다면 법무팀 조력 받아서 공식적으로 무죄라고 하면 되지, 무죄인 최재원이 무죄인 최태원을 보호하려고 허위자백을 했다니 웬말이냐”고 꼬집었다. 또 “검찰·법원이 어떤 곳인데, 한국 법원이 작년, 재작년 아주 권위 있는 기구에서 사법부 수준을 평가했는데 여러 지표로 1등을 했다. 국민들도 이걸 알아야 된다”고 해 방청객 한편에서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다.
문용선 판사의 이같은 돌직구성 ’직설 화법’을 놓고 법원 안팎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일각에서는 “재판 장악력이 뛰어나고 자신감이 넘친다” “국민들의 속마음을 대변해 속시원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판사는 말하기 보다 재판 당사자들의 입장을 듣는게 우선인데 배려가 부족하다. 판사는 판결을 하면 되지 장황하게 ‘훈계’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오만함이다” “원님 재판 같다”는 우려와 반대 지적도 만만찮게 나온다.
하지만 문용선 부장판사는 “재판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안된다. 재판에서 충분히 심문하고 의견이 오가야 당사자들이 판결을 예상하고 승복할 수 있다”며 자신의 돌직구성 ‘직설 화법’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문용선 판사는 이런 소신을 바탕으로 지난 7월 29일 열린 공판에서는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형제를 ‘조직폭력배’에까지 비유했다.
최재원 부회장이 검찰을 찾아가 ‘SK 계열사 펀드 출자금 중 450억원을 김원홍에게 불법송금하도록 지시한 게 자신’이라고 거짓 자백한 경위를 물으며 “조직폭력배 두목이 자기는 빠지려고 ‘네가 가서 나 대신했다고 해라’고 시킬 때도 두목이나 본인이 (실제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며 법정에 앉은 최태원 회장 형제에게 일침을 가했다.
올 6월 14일 8차 공판에서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최태원 회장은 펀드 조성 과정을 몰랐을 수 있다’고 말하자 “모르는 게 유죄다”며 “SK는 주주만의 회사가 아니라 좁게는 직원들, 크게는 국민경제를 책임지는 회사인데 회장이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동생 최재원 부회장/조선일보 DB

문용선 판사는 최 회장이 계열사에서 자금을 출자받은 사실은 알았지만 이를 김원홍에게 송금한 사실은 몰랐다는 최 회장의 주장에 대해 “이것은 어떤 사람을 만난 건 인정하는데 죽이지는 않았다는 얘기”라고 비유했다. 이어 “만나기만 했다는 점을 깔끔하게 증명해보라”며 “설득이 되는지 보겠다”고 말해 최 회장 변호인단을 긴장시켰다.
그의 재판 스타일은 올 4월 ‘낙지 살인사건’ 항소심 선고에서도 드러났다.
‘낙지 살인사건’은 김모(32)씨가 2010년 4월 중순 인천시 남구의 한 모텔에서 여자 친구 윤모씨를 살해한 뒤 낙지를 먹다 질식사한 것처럼 꾸며 사망보험금 2억원을 타낸 혐의(살인) 등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1심은 김씨의 유죄를 인정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으나 항소심을 맡은 문용선 부장판사는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그는 “김씨의 진술 외에는 사망 원인을 밝힐 증거가 없다”며 “김씨의 진술처럼 여자친구가 낙지로 인해 질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은 이달 12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사법시험(25회)에 합격한 문용선 부장판사는 1986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한 뒤 서울남부지법 판사와 사법연수원 기획교수,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 중앙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저축은행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상득(78) 전 새누리당 의원과 정두언(56)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재판을 맡아 일부 공소사실을 무죄로 인정하고 각각 징역 1년2월과 징역 10월로 감형하는 판결을 내렸다.
또 인혁당 재심 사건과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등의 굵직한 사안들이 문용선 부장판사의 손을 거쳤다.
30년 가까운 법관 생활을 한 문용선 부장판사의 재판진행은 거침없는 ‘돌직구’ 스타일로 유명하며, 자신이 질문한 취지와 달리 피고인들이 엉뚱한 답변을 내놓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는 등의 행동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문용선 판사는 지난 27일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이 법정에서 꼭 그런말을 해야 하느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한 뒤 법정에서 말할 수 있는 부분만 (발언)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항소심 재판을 하면서 무죄 판결할 때가 제일 즐겁고 기쁘고 보람된다”며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나도 피고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