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21 03:03
포스텍 세계적 주목받는 이유… 플래카드 하나 없는 캠퍼스, 勉學 분위기의 간접적 징표
전국 방방곡곡 광고판 천지, 교회·사찰·국립공원도… 전시 과시 뒤의 僞善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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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전 세계 모든 대학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처럼 플래카드가 난무하는 곳은 없다. 학술 대회나 문화 공연, 체육 행사에서부터 각종 집회, 취업 설명회, 유학 박람회, 동아리 회원 모집, 배낭여행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홍보와 광고가 현수막을 통한다. 국가고시 합격자를 일일이 열거하는 학교 측의 플래카드도 있고, 친구의 합격을 축하하는 사적 현수막도 없지 않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무렵이면 학생회에서 시험 잘 보자는 플래카드까지 내걸 정도다.
오늘날 현수막은 대학가의 대표적 미디어가 되었다. 그 결과 학교마다 플래카드가 건물을 가리고 가로를 범하며 하늘을 찌른다. 이 중 많은 것은 비지정 장소에 걸려 있으며, 유효 기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철거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여기에 벽보나 포스터, 전단까지 가세하면 우리나라의 대학 경관은 학문의 전당이라는 미명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을 찾는 외국인 교수나 유학생들이 종종 문화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플래카드의 범람은 비단 대학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플래카드가 흐드러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개업, 세일, 분양, 모집 등을 알리는 내용이 가장 흔하긴 하지만 공공기관의 자화자찬이나 집단적 민원 제기를 담은 현수막도 결코 적지 않다. 똑같은 공공시설 유치를 놓고 찬성하는 것과 반대하는 것이 서로 대치하기도 하며, 교통질서를 준수하자는 것과 뺑소니 차량을 신고해 달라는 것이 나란히 걸려 있기도 하다.
떼인 빚을 찾아 준다거나 남녀 간의 비정상적 만남을 주선한다는 식의 무언가 불법적인 내용도 현수막은 사양하지 않는다. 교회나 사찰 또한 플래카드 무풍지대가 아니며, 국립공원 부근 역시 더 이상 현수막 안전지대로 보기 어렵다. 명절 때가 되면 귀향을 환송하는 플래카드와 고향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의 물결이 도시와 농촌에서 서로 대구(對句)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차량에 붙어 이동하는 플래카드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명문대학에서 그렇듯이 현수막은 애초에 명품 도시와 격이 맞지 않는다. 플래카드에 뒤덮인 우리나라 도시는 진(珍)풍경이라기보다 살(殺)풍경에 훨씬 가깝다. 어찌 보면 매일 잔칫날이고 운동회며 축제일 같지만, 달리 보면 매일 이삿날이고 공사판이고 피난길 같은 게 우리들의 현재 자화상이다. 걸핏하면 선진국 타령이지만 도시 일상과 도시 경관에 관한 한 우리는 여전히 구호의 나라이고 표어의 나라이며, 선전의 나라이고 계몽의 나라이며, 과시의 나라이고 절규의 나라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 지경일까. 우선 우리 사회에서 정보의 소통이 합리적으로 선진화되지 않은 탓이 크다. 동물의 왕국 같은 경쟁 사회에서 존재감과 발언권을 키우는 데는 공공장소에 플래카드를 크게, 튀게 거는 일이 가장 손쉬울 법하다. 현수막의 남용은 걸핏하면 시민을 가르치려 들던 관 주도 캠페인 전통의 지속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거리의 교사 혹은 잔소리꾼으로서의 용도다. 플래카드에 대한 유별난 집착은 또한 한국적 시위 문화의 연장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이를테면 비제도권 매체로서의 가치다. 덧붙여 현수막은 우리 사회의 위선적 행태를 감추는 데도 나름 적격이다. 플래카드가 표방하는 '바른 생활'과 '착한 시민' 그리고 '좋은 나라'는 사실상 대외용 전시 효과에 불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플래카드의 과잉은 명백한 후진국 징표다. 북한의 경우처럼 말이다. 디지털 정보화의 대세 속에서 그것은 시대 역행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무분별한 현수막은 도시 미관을 파괴하고 국토 경관을 훼손한다. 마침 얼마 전 안전행정부는 옥외광고물 관련 법을 전면 개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1962년에 광고물 단속법이 제정된 지 무려 반세기 만의 일인데, 차제에 플래카드의 시각적 공해도 진지하게 챙겨 보길 바란다. 현수막 정비만으로도 명품 도시의 첫 단추는 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경쟁력 강화에 부심하는 교육 당국 역시 이참에 플래카드 없는 포스텍에 한 번쯤 눈길을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