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있습니다"
최근 광양제철고생 282명이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구국(救國)의 길’을 3박4일간 답사했다. 전남 광양항과 여수산단을 연결하는 ‘이순신 대교’를 출발, 구례~곡성~순천~보성~장흥~해남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전체 여정은 620㎞, 이중 37㎞는 두 발로 걸었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국토를 유린하던 상황에서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친 명량대첩의 역사적 현장으로 가는 길을 416년만에 고교생들이 답사에 나선 것. 이 ‘구국의 길’은 포스코가 의욕적으로 개발해 올해 첫선을 보인 것이다. 내년부터는 이 ‘구국의 길, 新난중캠프’를 확대한다고 한다.
- 이순신 구국의 길
요즘 ‘길’이 대유행이다. 자연을 벗삼아 걷는 ‘올레길’ ‘둘레길’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길’은 사뭇 다르다. 단순한 ‘자연의 길’이 아니라, ‘장소가 갖는 의미’를 더한다. ‘장소가 갖는 의미’란 ‘역사적 의미’일 것이다.
지난 여름 ‘난중일기(亂中日記)’를 펼쳐보았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끝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름을 받고, 전라도를 순행하는 부분이었다. 한 여름 그 길을 찾아 서너번 걸었다.
순행의 출발시점은 1597년 8월 3일(음력). 이순신이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장을 받은 날이다. 이 장군은 바로 이날 남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출발지는 선조의 명을 받은 경상도 진주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
- 섬진강 하류인 광양, 하동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반드시 거치는 곳이 구례 석주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 내륙으로 가는 관문이다. 이 장군은 이 섬진강을 오르내리며 전황과 민심을 살폈다.
그 당시 상황은 이랬다. 제2대 통제사 원균이 이끌던 조선해군은 칠천량(거제도)해전에서 궤멸당했다. 임란 이후 수년동안 다시 일으킨 해군이 몰살되었던 것. 그 해전은 무모했다. 조선 정부의 재촉에 의해 나섰다가 처참하게 당한 어이없는 패전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 해군을 간단하게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 간첩의 계략에 속고 있었다. 앞서 이순신은 이 명령을 거부해 투옥되었고, 원균 부대는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바다를 일본군에 다시 내주는 상황에 내몰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죽음만 면하게 해달라.”
신하들은 선조에게 간청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을 명했다. 이순신은 4월 1일 풀려났지만 곧 이어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장례도 그의 손으로 치르지 못했다. 발길을 서둘러 충청, 전라도를 거쳐간 다음 경상도(진주)에서 도원수 권율을 보좌해야 했기 때문. 그는 보좌 도중 통제사 재임명을 받았다.
궤멸당한 조선해군을 재건하여 일본 해군을 어떻게든 물리쳐야 하는 역사적 과업이 그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해군(수군) 재건의 임무’를 남도에서 완수하려고 했다. 그는 전라지역을 순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진주에서 출발한 이순신은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이 맞붙은 섬진강 하구에 도착, 쌍계동(하동 화개면 탑리)과 석주관(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을 거쳤다. 석주관은 섬진강 하류에서 중상류로 통하는 관문 같은 곳이다. 이 섬진강 코스는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 있다. 산은 높고, 강은 침식지형으로 강심이 파여 있는 형태여서 강폭이 좁다. 지금도 섬진강변에 난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좁다. 이 장군은 이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이 장군은 석주관을 거슬러 구례현(구례군)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북문밖’이라 나오는데 지금도 북문밖 거리가 지명과 함께 있다. 옛길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이 장군이 묵었을 만한 곳에 그를 맞이했던 손인필을 기리는 제각이 있었다. 손인필은 군수품조달과 모병을 맡아왔던 이여서 장군으로선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장군은 이어 압록(섬진강과 보성강의 합류지점)을 거쳐 곡성현(곡성군)에 이르렀다. 다음은 옥과와 석곡(모두 곡성), 순천, 보성. 섬진강 하구에서 거슬러 상류인 곡성까지 올랐다가 육로로 순천, 보성으로 향했다.
- 곡성현청이 있었던 현재의 곡성군청.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로 재임명돼 섬진강을 타고 올라와 이곳 곡성에 이르면서 전황과 민심을 살폈다. 왼쪽 산 너머가 옥과현이 있던 곳이다. 이 장군은 옥과에도 갔다.
이 장군이 배를 탔다는 군영구미 앞마을 해변은 한적했다. 416년전 이 해변에선 아래와 같은 대화를 했다고 ‘난중일기’는 전한다.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고을 동지들의 배가 얼마나 되오?”(이순신)
“열 몇척은 됩니다.”(마하수)
“내가 나라가 혼란하고 흔들리는 때에 임무를 맡아 세력이 궁하고 힘이 부족하니 자네가 시골배를 모으고 나의 후원이 되어 군의 위용을 갖추도록 해달라.”(이)
“제가 비록 늙고 쇠약하오나 가슴 속에 오직 ‘의(義)’라는 글자 하나를 가졌습니다. 마땅히 공과 함께 죽고 살 것입니다.”(마)
마하수 등은 ‘해상의병’들이었다. 임란 이후 육전과는 달리 오직 해전에서만 연전연승을 했던 조선해군의 주력은 전라좌·우수군들이었다. 이 장군은 임란이 발발하던 때 전라좌수사(여수)로서 전라 해군을 이끌고, 경상해역으로 나아가 일본해군을 연이어 격파했었다. 전라도민과 전라지역 해군들은 이 장군과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수군 재건’에 나선 이 장군 아래로 과거의 수군지휘자들이 모여들었다. 배흥립, 송희립, 송대성, 정사준, 김붕만, 이기남 등 지휘부들이 합세했다. 무기제조자들뿐 아니라 연해민들도 나섰다. 무기제조와 해전을 펼칠 수 있는 사람들이 기꺼이 나섰다. 조양창(보성군 조성면 고내리)에서는 군량을 확보했다. 그 조양창은 이젠 수풀이 우거진 한적한 마을이었다.
- 보성초등학교 교정에 1976년 세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교사 뒷편 뾰족하게 솟은 교회건물이 있는 곳에 열선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 열선루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역 사림들과 만났다.
전투선 12척을 가졌을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보고했다. ‘전선(戰船)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는 이상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신에게는 아직 12척이 있습니다.…’ 그 ‘상유십이(尙有十二)’ 정신으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처를 향해 움직여 나갔다.
-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 앞 해변.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로 재임명된 뒤 군수와 군사 등을 모아 여기서 전남 서남해쪽으로 향했다. 일본군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기약하고 있었다.
승부처는 물살이 매우 빠르고 목이 좁은 서남해의 길목(울돌목, 진도와 해남 사이 명량해협). 칠천량 해전에서 대승하고 난 뒤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 해군은 조선 수군의 전멸을 기도했고, 이순신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싸움에 나섰다. 결국 만날 수 밖에 없는 형국.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가 운명을 좌우할 것이었다.
그런 독법(讀法)으로 보면, ‘난중일기’속 ‘구국의 길’은 승부처로의 이동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길을 걸으며,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사람을 모으고 뜻을 모았다. 군수와 군사를 집결하게 했다. 전장의 상황을 꿰뚫어보는 이 장군의 통찰력과 지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순신의 ‘구국의 길’ 여정은 통제사 재임명장을 받은 1597년 8월 3일(음)에서 시작, 일본 해군을 울돌목으로 유인해 격퇴한 9월16일(음, 난중일기)까지 이어졌다.
조선을 재침한 일본 해군의 기세를 결정적으로 꺾어 전세를 일거에 뒤집은 명량해전장(海戰場)은 오늘도 여전히 물살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 ‘구국의 길’ 끝자락 울돌목에서 보듯 요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빠르고 가파르다. 자연과 삶, 역사의 의미까지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구국의 길’이다. 한 손에 ‘난중일기’를 들고서 ‘길’을 배우러 힘차게 두 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의 물결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