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고구려의 숨결을 느끼다

고구려 건국, 알려진것 보다 200년 빠르다

화이트보스 2014. 1. 9. 21:12

고구려 건국, 알려진것 보다 200년 빠르다

학계에 알려진 것은 BC37년… 그보다 200년 앞선 BC232년에 건국

글 | 지배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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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셔 사신총 고분벽화

 
                                          고구려 건국기의 국가 시스템
                                                               
                                                                  지 배 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1.서론
2.천자의 나라 부여와 고구려
3천자의 나라 고구려
4.고구려 동명
 1)동명의 탄생
 2)天思想과 동명
5.고구려 건국시기론
 1)고구려 건국시기
 2)고구려 제구성
6.주몽의 건국시기
7.결론
                                     1.서론

 고구려 시작은 ‘天의 개념’으로 출발하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구려 동명성왕의 내력을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중국의 『후한서』,『삼국지』,『위서』등 살펴보겠다. 고구려 동명성왕의 관리의 칭호를 살펴봄으로써 고구려 건국기의 조직을 파악하려한다. 

 고구려 동명성왕을 계승한 그의 아들 유리명왕의 국가조직 연계성을 살피려한다. 동명성왕 때 만든 조직을 그대로 전승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고구려 초기의 국가 조직 실체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의 초기를 주목한 이유는 많은 중국 사서에 동명성왕의 탄생설화와 그의 행적 사료가 신라나 백제의 시조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시 말해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과 백제 온조왕과의 기록의 분량을 비교한다면, 동명성왕에 관한 기록의 양이 압도적이다. 한 가지 특기 할 사실은 중국 사서에서 주몽과 동명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동명이라는 글자 의미는 중국과 대적할 정도로 강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걸출한 지도자였다는 것과 연관되어서 필자가 주목하였다. 

 위와 같은 실체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고구려 동명성왕의 관련된 고구려 행적의 대한 기록을 규명하려 한다.

                         2. 천자의 나라 부여와 고구려
 
 북부여 시작에 대하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古記에 의하면, 『前漢書』에 宣帝 神爵 3년(B.C.59) 임술 4월 8일 天帝가 訖升骨城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탔다. 도읍을 세워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고 했으며, 스스로 解慕漱라고 이름했다. (『三國遺事』권1「紀異 北扶餘」32쪽(東國文化社,1965),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북부여가 해모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동명성왕 언급과 동시 부여에 대한 계보가 비교적 상세하다. 부여 왕 가계는 해모수→해부루→금와로 이어졌다. 그런데 해부루의 아들 금와의 출생설화가 한국고대사 규명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의 첫줄에 나온다.
 
 시조 東明聖王의 姓은 高氏요. 諱는 朱蒙이다. 앞서 부여 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구려 東明聖王조의 출생설화 관련된 부여 태자 금와의 행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부여 왕의 권력이 강력하였다는 뜻을 지닌 왕권신수설과 같다. 그 이유는 부여 왕 해부루가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산천에 제사 행위은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행하여진 일반적인 유형이다.  

 기원전 3세기 흉노에 대한 기록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간구하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드렸던 행위를 찾을 수 있다. 사마천의 『史記』의 「匈奴傳」에 의하면, 매년 정월, 모든 우두머리들은 선우의 뜰에서 小會를 하며 제사를 지냈으며, 5월에는 籠城에서 대회를 열어, 그들의 조상과, 천지, 귀신을 제사하였다. 가을에는 말이 살찔 때 蹛林에서 大會를 하면서, 사람과 가축의 수효를 계산해 궁리를 모색하였다.
 
 위의 내용은 흉노가 지닌 제사 행위자체가 바로 유목 공동체의식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흉노는 그 당시 중국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였을 뿐 아니라 북아시아를 최초로 통일한 유목제국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흉노 풍습과 동일한 의식을 행했다는 사실이 『後漢書』의 「高句驪傳」에 기록되어 있다. 즉, 10월에는 하늘을 제사하고, (나라 가운데 있는 사람은) 대회를 한다. 이를 동맹이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제천의식을 東盟이라 불렀다. 그런데 고구려가 고향을 떠나 비류수 가에 내려와 살던 부족들이 자신의 조상을 잊지 않기 위해 부여의 제천 행사인 迎鼓에서 제사지내던 하늘의 아들 동명에 대한 제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제천의식 東盟은 고구려를 결속하는 전투공동체 중심 의식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 이유는 북아시아 유목사회의 가을 제천의식을 통해 국부 조사를 실시하여 다음 해를 대비한 공동체적인 경제 의미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東盟’은 ‘東明’의 ‘東’처럼 동쪽에서 생활하며 공동체 결속을 의미하는 ‘盟’이 결합된 그런 제천의식이라 해석해야 맞다. 

 위의 사실은 흉노처럼 ‘祭天’을 하기 위해 고구려가 10월에 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이며. 흉노의 가을 제천의식이 다음해 경제문제를 가늠하기 위한 대회였다는 사실에서 고구려의 10월 제천 의식과 성격이 동일하다고 본다. 그런데 부여의 경우는 臘月(殷正月)에 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드렸으나 10월에 제천을 위한 대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臘月 즉 12월 부여에서 제천을 하여 「迎鼓」라 했다. 여기서 유추해석이 가능한 것은 부여도 고구려와 같은 제천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며 이는 공동체 결속 강화라는 유목공동체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부여는 법속과 兄死妻嫂 제도등 많은 것이 흉노의 법속과 동일하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유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하기가 쉬워 구성원 모두 회합할 수 있는 대회 개최가 가능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부여 벽화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고구려나 부여가 제천의식을 했던 유목집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흉노처럼 부여 왕 해부루도 산천에 제사한 것은 북아시아 유목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하여진 습속이다. 이런 사실을 중요 연결 고리로 생각하는 까닭은 전투 공동체였던 고구려 활동무대가 북아시아지역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부여 해부루를 이을 아들을 금색 개구리로 묘사했는데, 북아시아에서 최고의 장식품은 금이다. 이와 관련해서 금으로 된 수의는 오늘날 카자흐스탄지역에서 이미 4기가 발굴되었다. 또 동아시아에서 개구리가 달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은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 묘에 널방 천장고임 벽화에 하늘세계를 그리면서 달을 두꺼비로 형상화하였다. 이밖에 고구려의 쌍영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해(삼족오), 쌍영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달(두꺼비), 각저총 널방 왼벽 천장고임벽화:해(삼족오), 각저총 널방 오른벽 천장 고임벽화:달(두꺼비), 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 벽화:해(삼족오), 덕화리1호분 널방 왼벽 천장고임벽화:해(삼족오), 덕화리1호분 널방 오른벽 천장고임벽화:달(두꺼비)등이 있다. 고구려의 사신총에서도 해(삼족오)와 달(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처럼 중국도 해는 까마귀, 달은 두꺼비 또는 개구리로 형상화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처럼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天下觀’을 갖고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서왕모 벽화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고대 신화에 나오는 法術이 높은 미모의 선녀로 곤륜에 사는 서왕모는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구려의 출발이 강력한 국가였다는 방증자료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 서왕모 소동 사건은 前漢 哀帝 建坪 4년(B.C.4)의 해프닝이었다.

 아무튼 천하관의 의미를 갖는 서왕모 벽화가 고구려 고분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한 지역의 국가개념을 뛰어넘어 동아시아의 중심에 섰던 그런 국가였다는 사실을 형상화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구려 벽화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해석에서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몽의 탄생과 그의 행적에서 늘 ‘天’이 강조되었던 이유는 고구려 건국기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長沙 남쪽 馬王堆의 漢初 軑侯의 夫人 辛追 묘에서 비단그림 가운데 ‘해(日)’안에 까마귀, ‘달(月)’ 안에 두꺼비가 그려졌다. 그렇다면 금와를 두꺼비로 형상화했다면 그 이름에서 ‘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의미였다. 따라서 부여가 천자의 나라라는 의미를 반복적으로 금와의 출생설화를 통하여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 왕이 ‘天帝子’였다는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석된다. 이는 부여가 천자 국가였다는 사실을 금와 출생설화를 통해 다시 확인하였다.

 천자의 나라는 황제 또는 왕을 중심으로, 그 휘하에 제후를 거느린 국가형태를 말한다. 그런 나라에서는 왕의 형제나 아들에게는 공이라는 작위가 주어졌고, 異姓 제후들에게는 후라는 작위가 주어진 국가 시스템이다. 
 
 

                           3.천자의 나라 고구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계속된 부여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후에 (부여)국상 阿蘭弗이 말하되, 『日前에 天神이 나에게 강림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天神)의 자손으로 이곳에 건국케 하려 하니 너희(나라)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東海 가에서 迦葉原이란 곳이 있으니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阿蘭弗이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東扶餘라 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扶餘 國相 阿蘭弗이 말하길 東海 가에 토양에 오곡이 좋은 곳에 가서 하라고 하였다. 그곳을 迦葉原이라 했다. 그래서 왕을 권해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김부식은 고려시대 유․불․도의 3교를 아는 그런 불교학의 대가였다. 불교에서 阿蘭에서 阿蘭迦蘭과 阿蘭若을 의미하여 迦葉原은 迦葉을 뜻한다. 그렇다고 이때 부여에 불교가 들어 왔던 것은 아니다. 다만 김부식이 알고 있던 불교에 관한 지식이 가미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북부여에 대해 해모수 이후의 사실을 간단하게 언급하였으며 이는 부여와 고구려 연결을 알리는 단서이다.
 
 (해모수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扶婁라 하고 解를 氏로 삼았다. 왕이 뒤에 上帝의 명을 받들어 도읍을 東扶餘로 옮겼다. 東明帝가 扶餘의 계통을 이어 일어나 卒本州에 도읍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卒本扶餘고, 고구려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부여가 天帝(上帝) 나라라는 사실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고구려도 天帝子 해모수를 동명왕의 아버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고구려 동명성왕이 天帝子라는 표현이 맞다. 고구려 동명왕은 ‘天子’였다. ‘天帝之子’라는 假說이 부여 해모수와 고구려 동명왕의 출생설화에서 확인된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삼국사기』에서 보면.
 
 옛 도읍지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解夫婁가 죽자 金蛙가 그 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위의 사실은 天帝의 아들 해모수라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음을 말하는데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해모수가 ‘天帝子’라고 표현한 점이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천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시대까지는 왕을 천자라고 하였고 秦 제국부터 황제를 천자라고 했다. 따라서 해모수가 天子로서 도읍하였다는 이야기는 부여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가늠 할 수 있는 칭호였다. 간단히 말해 부여 최고 통치자가 ‘天帝子’였다는 사실은 천자의 나라였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천자라는 용어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해모수가 죽었을 때 ‘薨’이라는 표현 대신 ‘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은 철저한 유학자였기 때문에 12세기에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중국을 의식하여 ‘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한 예를 든다면『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 연개소문을 기록 하면서 중국을 너무나 의식한 나머지 당 황제 李淵의 이름과 같은 ‘淵’을 쓰지 않기 위해 姓氏마저 바꾸어 「淵蓋蘇文傳」이라 하지 않고 「泉蓋蘇文傳」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철저히 중국을 의식하였다. 蓋蘇文의 姓이 淵이었던 것은 아우 淵淨土가 『삼국사기』의 「문무왕본기」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성이 泉이 아니라 淵이라고 밝혀졌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신라본기」 淵淨土기록을 泉淨土로 바꾸지 못했다.  

 부여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즉위했다. 정확히 말하면 해부루의 적장자가 금와였다. 금와 출생 설화가 북아시아에서 유행한 탄생설화와 궤적을 같이 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이유는 왕권신수설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해모수의 또 다른 아들 동명성왕 출생을『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들어보면,
 
 “나는 하백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 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優渤水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명의 어머니가 하백의 딸 유화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에서 유화에게 동명을 임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화는 부모 허락 없이 해모수와 정을 통하였기 때문에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정황까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 『삼국사기』에서 금와가 이상하게 여겨서 유화를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쯤 되었다는 동명의 출생설화이다. 중국사에서도 하백의 딸에 대한 기록이 없는 마당에, 고구려사에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바꾸어 말하면 고구려에 의해서 하백 신화가 구체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그 부분에 대하여 적고 있다.
 
 金蛙는 이상히 여겨 그를 집 속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에게 日光이 비치었다. 몸을 피하자, 日光이 또 따라 비치었다.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金蛙)이 (상서롭지 못하게 여기어) 그 알을 버리어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다 먹지 아니하였고, 또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牛馬가 (밟지 않고) 피해 갔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안았다. 왕이 그 알을 쪼개보려 하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표히 凡兒와 달리 제 손으로 궁시를 만들어 쏘매, 百發百中이었다. 扶餘의 俗語에 善射者를「朱蒙」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금와에게는 七子가 있어 항상 朱蒙으로 더불어 遊戱하되 그 技能이 다 朱蒙을 따를 수 없었다. 그 長子인 帶素가 왕에게 말하되, 『朱蒙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또 용맹스러우니 만일 일찍이 그를 도모치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오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소서』하였다.
 
 주몽의 탄생은 『後漢書』의 「선비전」에 나타난 A.D.2세기의 檀石槐의 모습과 같다. 기원전 주몽의 활약상도 鮮卑 檀石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2세기에 작성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무려 7세기나 앞선『후한서』의 「부여국전」에도 고구려 동명에 대한 출생설화가 언급되었다. 이를 소개하면,
 
 처음에, 北夷의 索離國왕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그 시녀가 後(宮)으로 임신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 시녀가 말하기를,「이전에, 天上의 정기가 있어서, 크기가 계란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내게 내려와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임신했지만, 왕은 시녀를 가두었다. 그 후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게 명령하였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넣었으나 말도 똑 같이 행동하였다. 왕은 (그 아이가) 신이라고 생각하여, (시녀인 그)엄마에게, 거두어 기를 것을 허락하였다. 이름은 동명이라고 불렀다.  
 
 위의 내용은 『후한서』의「부여국전」에 언급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索離國은 부여국안의 또 다른 나라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여도 ‘天帝子’ 개념의 국가였기 때문에 부여국로부터 작위를 받은 그런 국가가 부여국 안에 散在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주몽의 출생이 別種이란 점이다.

 고구려 동명의 출생설화에서 주몽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신적 존재로 묘사하였던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조상을 신처럼 숭배하고 고구려를 가장 신성한 天帝 나라로 생각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그런데『삼국사기』보다는 『후한서』의 「부여국전」이 동명에 대한 언급을 더 신격화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김부식의 축소지향적인 고구려 역사서술로 말미암아서 동명 출생설화가 신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결과인 것 같다. 한 예는 『후한서』에서는 동명이라고 기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서는 동명보다는 주로 주몽이라고 했던 사실에서 비교된다. 물론 활 잘 쏘는 의미가 朱蒙이다.

 그밖에 주목되는 것은 『후한서』의 「부여국전」의 맨 앞에 동명왕의 출생설화가 언급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부여국전을 기록하면 당연히 부여국에 대한 이야기가 우선시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부여와 고구려의 출발이 거의 동시성을 갖는다는 의미라고 본다. 결국 이는 고구려가 출발부터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린 기록이라 생각된다.

 ‘天帝子’ 해모수의 아들 동명에 대한 설명에서 천제자의 개념이 빠질 수가 없다. 고구려 동명은 ‘天의 개념’에서 설명되어야할 인물이다. 天의 질서와 동명왕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필자가 ‘天의 질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 앞서 신라가 건국되었는데도 신라 시조 박혁거세에서 ‘天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백제 경우도 고구려 동명의 아들 온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天의 개념’이『삼국사기』의「백제본기」에 온조 왕 기록에 없다. 물론 신라 혁거세 居西干과 달리 백제 온조왕 경우는 주몽 아들로서 고구려의 계승으로 칭호를 왕이라고 했던 사실로 본다면 신라와 차이가 있다.    

 위의 추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후한서』의 「부여국전」에 동명 출생설화 유형과 거의 일치되는 鮮卑 檀石槐 출생 배경 기록이다. 정확히 말해 『후한서』의「부여국전」과 『삼국사기』의 동명 출생설화를 합친 것 같은 檀石槐 출생설화라 더욱 흥미를 끈다. 다시 말해 東明과 檀石槐 출생설화가 왕권신수설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물론 檀石槐 출생관련 내용이 동명 출생보다 2세기이상 뒤의 일이지만 북아시아 역사 해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후한서』의 「선비전」의 桓帝時 조에 의하면,
 
 桓帝(A.D. 146-167)때에, 선비 檀石槐라는 자가 있었다. 그 아버지 投鹿侯가, 처음 흉노군을 따라서 3년 동안 있을 때, 그 처는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投鹿侯가 집으로 돌아와서 괴이하게 여겨, 그 아들을 죽이려하였다. 처가 말하길「어느 날, 낮에 걷고 있는데, 우뢰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우러러 보자, 우박이 나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을 삼켰더니, 드디어 임신이 되어, 10개월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분명히 무언가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자라는 것을 지켜봅시다.」라고 하였다. 投鹿侯는 듣지 않고, 드디어 그 아이를 버렸다. 처는 몰래 家人에게 말해서,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도록 하였다. 그 아이를 檀石槐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이 14·5세가 되자, 용맹한데다가 지략마저 갖추었다.
 
 위의 내용은 鮮卑 檀石槐 출생설화이다. 달리 말하면 檀石槐가 후일 鮮卑 대통합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檀石槐의 출생설화가 『후한서』와 『삼국지』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북방민족에게 여인의 정절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사실과도 결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비 投鹿侯가 匈奴군을 따라 3년 동안 종군하였는데 그때 부인이 집에 있으면서 하늘에서 떨어진 우박을 삼켰더니 임신이 되어 아들 檀石槐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때 檀石槐 배경이 『후한서』「부여국전」에서 동명이 태어나게 된 경위와 너무 흡사하다.

  또한 나이14·5세 檀石槐가 용맹하고 지략을 갖추었다는 사실도 동명이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명이나 檀石槐 모두 북아시아에서 유목군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이는 고대 북아시아 유목사회 통솔자의 출생설화와 같은 궤적이다. 그렇다고 檀石槐에 의해서 鮮卑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선비가 檀石槐에 의해 대통합을 이루었을 뿐이다.

 鮮卑와 중국 관계는 “漢代 초, 역시 鮮卑도, 흉노 冒頓 單于에 패퇴당해, 멀리 遼東의 塞外로 도망했다. 그래서 烏桓과 相接하였다. 아직 중국과는 통교하지 못했다.”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匈奴 冒頓이 東胡를 격파할 때 東胡 일대가 烏桓山에 들어가서 烏桓이 되었고, 일대는 鮮卑山에 숨어들어 鮮卑가 대두되었다. 

 위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鮮卑 등장은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史記』의 「匈奴傳」에
 
 처음처럼 東胡는 흉노선우 冒頓을 가볍게 여겨,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冒頓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여서, 크게 동호 왕을 파멸하여, 그 백성과 가축을 약탈했다.
 
 이런 사실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檀石槐시대에 鮮卑가 북아시아에 등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檀石槐가 後漢 永壽 2년(A,D. 156) 가을 3·4 千 騎를 거느리고 雲中을 침공하면서부터 중국 사서에서 등장하였다. 鮮卑가 최초 모습을 드러낸 것은 後漢 建武 21년(A.D.45)이다. 이를 들어보면, “그 해 가을 선비가 요동을 공격하자, 요동태수 祭肜이 이를 대파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후한 초에 중국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鮮卑였는데, 후일 檀石槐가 중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永壽 2년(A,D.156)부터이다. 

 아무튼 鮮卑가 중국 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後漢 초보다 훨씬 앞선다. 『後漢書』의 「鮮卑傳」에 의하면,
 
 (後漢) 光武帝 초에, 흉노가 강성하게 되자, 鮮卑를 거느리고, 烏桓과 함께 漢의 북변을 노략해서, 한의 관리와 백성을 殺略했다. 北邊에 평온한 해가 없었다.
 
 위의 『사기』의 「흉노전」언급처럼  흉노선우 冒頓에 의해 東胡가 멸망된 후 一族이 鮮卑가 된 사실을 멀리 塞外로 도망하였다고 范曄은 『후한서』에서 기록하였다. 이런 사실에 대해 司馬光은 『資治通鑑』에서 흉노역사를 언급하면서 “드디어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애초에 冒頓을 가벼이 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冒頓이 드디어 동호를 멸망시켰다.”라고 정리하였다. 이때 동호 일부가 흩어져 鮮卑山에 保守한 것이 계기가 되어 鮮卑가 출현하였다. 

 鮮卑가 등장된 후 200여년이 지나서 檀石槐가 출현하였다. 필자가 檀石槐 등장 시기를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말해 탄생설화를 갖고 있는 檀石槐가 鮮卑 시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히 말해 선비는 檀石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鮮卑가 대통합을 이루어 북아시아를 석권하였다. 이는 주몽도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 고구려의 대통합을 이룬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암시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鮮卑 檀石槐의 출생사실이 주목받게 된 것처럼 鮮卑의 대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가 신격화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주몽도  탄생에서 고구려의 대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이 주목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앞서 언급된 鮮卑史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북아시아에서 대통합을 이룬 유목기마민족의 군장 출생 설화의 궤적과 거의 같다. 이는 주몽에 의한 고구려보다 앞서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방증자료가 될 수 있다.

 『후한서』의 「부여전」내용처럼 고구려 동명이 태어났던 것이 索離國 왕이 출타 중에서 태어난 것과 같이 선비 단석괴도 출생과 흡사하다. 그런데 선비 檀石槐가 흉노 이후 북아시아를 석권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동명도 북아시아를 석권한 강력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의 출생설화에 담긴 의미라고 해석하고 싶다. 

 위의 출생설화를 통해서 그 당시 유목사회 습속이 유추될 수 있는 것은 여인 정절이 문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해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남편 없는 사이에 부인이 임신하였어도 그 부인을 처벌할 수 없고 다만 아이를 버림으로 그 죄가 종결되었다. 고구려 동명의 어머니가 부여 왕 외의 아이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만 버렸던 것은 유목민족의 嫂婚制(Levirat) 풍습이 부여국(索離國)에 유행한 근거라고 유추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사회에서 부인의 권위가 대단하였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정사에서 북아시아에서 강력한 리더가 출현하였을 때는 신화 형식을 빌려 그 인물의 출생을 기록하는 것이 대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보다 앞서 前漢부터 역사 무대에 등장했던 烏桓에게 그런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오환 세력이 약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후한서』의 「오환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昭帝(B.C.86-74)때, 오환이 점차 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흉노 선우 무덤을 도굴해서, 冒頓으로부터 받은 원한을 갚았다.
 
 기원전 1세기 흉노 선우 冒頓에 대해서 복수할 정도로 선비보다 오환이 먼저 강성하였다. 그런 오환에게 선비 檀石槐나 고구려 東明과 같은 출생설화가 없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환은 북아시아에서 잠시 흉노와 대적하였으나 이내 중국화 되면서 북아시아를 제패한 사실이 없었다는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 檀石槐가 북아시아를 석권한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출생설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고구려 동명이 그의 생전에 북아시아를 제패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가 동명의 신격화된 출생설화와 ‘天帝子’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된다.        
 
 
                           4. 고구려 동명
 
                             1)동명의 탄생

 어린 동명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동명이 유목생활에 출중했기 때문에 맏아들 대소가 금와왕에게 동명을 죽여야한다고 간언하였다. 그 후 동명의 행적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부여)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위의 내용은 동명이 부여 금와왕 밑에 있을 때 유목의 CEO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사실과 관련된 대목이다. 그런데도 부여의 여러 왕자들과 신하들이 동명을 죽이려 하였으며 이런 사실을 동명의 어머니가 먼저 알려서 동명의 망명길이 시작되었다.  

 그 후 동명 행적에 대해『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그래서 주몽은 오이·마리 협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서 함께 갔다. 엄시수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 병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은 건널 수 없었다.
 
 부여 왕의 아들과 신하들이 동명을 죽이려 할 때, 동명의 부여 탈출과정에 나타났던 기적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후한서』의 「부여국전」에서는 동명이 물가에 도착해 활로 물을 쳤더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서 건넜다고 약간 다르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동명이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할 때 자신을 ‘天帝子’라고 말한 사실과 자신을 河伯의 외손이라고 천명한 사실이 특히 주목된다. 이는 ‘天의 개념’이 동명의 삶의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탄생설화는 후일 만들어진 것이나 동명이 자신을 ‘天帝子’라는 말한 것과 河伯의 외손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고구려가 강력한 天子之國이었다.

 동명은 자신을 河伯 외손이라는 표현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 정사에 유화의 아들이 동명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으나 河伯 외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魏書』권100 「高句麗傳」,『周書』권49「高麗傳」,『隋書』권81「高麗傳」,『通典』권186「高句麗傳」에 동명을 하백 외손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 정사에서 고구려·신라·백제 가운데 탄생설화에 관해서 실린 유일한 인물이 고구려 동명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명이 중국 역사에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아울러 동명을 하백 외손이라고 기록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중국사서에서 河伯을 水神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河伯 외손이 동명이라는 사실은 북아시아는 물론이고 바다와 黃河 외에 수많은 강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이런 黃河 水神 河伯에 대한 내용은, 앞서 언급한 『晏子春秋』외에, 『史記』권126「滑稽列傳」,『漢書』권76「王尊傳」,『北史』권31「高允傳」,『隋書』권23「五行志下」,『水經注疏』권10「濁漳水」외에도 많이 언급되었다.

 河伯은 중국 고대의 水神이다. 河伯 외손 동명이 자신을 ‘天帝子’라 언급한 것은 동명이 단순 권력자가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동명이 河伯 외손이라는 사실을 중국 정사에서 많이 언급한 의미는 동명이 바다나 강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중국 고대 사가들의 암묵적 시인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동명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 강성함을 그의 출생 설화를 통한 간접 설명이었다.   

 그런데 춘추시대 말 제나라 말기 안영( -B.C.500)의 저서『晏子春秋』권1「內篇」에 하백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景)공이 말하였다.“그렇지 않다. 나는 河伯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니 옳은 것인가?” 晏子가 말하였다. “옳지 않습니다. 하백은 물을 나라로 삼고, 물고기를 백성으로 삼습니다. 하늘에서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는다면, 샘은 장차 말라 갈 것이고, 개천도 모두 마를 것이라, 나라마저 망할 것이라, 장차 백성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사료에서 춘추시대 晏子 주장은 河伯이 물을 관장하면서 물고기를 다스렸다는 내용이다. 하백은 水神으로 魚鼈을 관장하는 그런 상징적 존재였다. 그렇다면 주몽이 부여 추격 군이 달려 올 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을 알 수 있다. 주몽이 광활한 대륙만 다스린 것이 아니라 바다와 많은 강들까지 다스렸다는 의미였다. 이는 고구려 영역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몽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위의 사료에서 주몽이 부여 기마병을 따돌린 사실도 주목된다. 그 이유는 부여의 軍制가 유목의 騎馬制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군제도 騎馬制였다.   

 주몽이 자신을 설명할 때 ‘天의 개념’을 특별히 부각시킨 것은 고구려 강성함을 두루 선포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고구려 왕권이 ‘天’에서 주어졌음을 내외에 알림으로서 왕권신수설이 고구려에서 일반적 행위였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였다. 이런 유형의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구려와 인접한 북아시아 선비모용부의 조상탄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즉 『晉書』권108「慕容廆傳」補註(藝文館刊)와 『太平御覽』권 356「兵部」87?甲下?에 의하면,
 
 乾羅는 慕容廆의 十一世 조상이다. 그는 金銀으로 된 갑옷과 안장을 한 白馬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鮮卑의 神이 되었다. 그를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았다.
 
 이는 A.D. 2-4세기에 들어오면 북아시아에서 왕권신수설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주목하는 까닭은 국가 건설이 ‘天’에서 비롯되었을 때 강력한 국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 내용은 前燕 慕容廆(재위기간 285∼333)의 十一世 조상 乾羅에 대한 이야기로, 그 시기는 기원후 출생설화이다. 어쩌면 乾羅의 탄생설화시기보다 주몽의 그것이 한 세기 이상이나 빠르다. 慕容廆의 손자 慕容儁의 前燕은 4세기에 前秦과 북중국을 양분할 정도로 강력국가였다. 그렇다면 고구려 주몽의 탄생설화에서?天의 개념’ 의미로 설명된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주몽 이전부터 강력한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고구려도 강성한 국가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天思想과 동명
 
 주몽은 엄시수를 건넌 후 毛屯谷에서 麻衣를 입은 再思, 衲衣를 입은 武骨, 水藻衣를 입은 黙居를 만나면서 주몽 세력은 확대되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은 재사에게 克氏를, 무골에게 仲室氏를, 묵거에게 少室氏의 새로운 성을 주었다. 이런 성씨로 보아 주몽은 이때 새롭게 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세 부족을 추가로 거느렸다.   

 주몽은 부족장 세 사람에게 말하길,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三賢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주몽이 나라를 건국하려 할 때도 두 번씩이나 ‘天’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신라나 백제 건국에서 ‘天’에 대한 사실이 언급이 없었던 것과 큰 비교가 된다. 달리 말하면 부여에서는 일찍부터 天에 대한 개념이 익숙해 주몽도 이를 자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의 ‘賢’에 대한 개념을 『사기』의 「흉노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흉노전」에서 ‘賢’을 말하길 ‘屠耆’라고 한다. 이 때문에 태자를 항상 左屠耆王이라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 이유는 부족 지도자를 유목사회에서 ‘賢’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三賢’을 만난 사실은 세 부족을 얻었다는 의미와 같다.  

 주몽은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세 부족을 만나 함께 졸본에 이르러 졸본천(비류수)의 서쪽 언덕에 도읍하였다. 이때의 『삼국사기』는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肥美),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을 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으므로 다만 沸流水 가에 초막(廬)을 짓고 살았다.
 
 위의 기록은 유목생활과 관련해 주목할 사료이다. 우선은 주몽이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여 도읍하였다. 그러나 경황이 없어서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지었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본다. 이때 주몽은 유목의 이동 가옥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유교주의 국가형태인 농경국가만 생각하여 농경 관점에서 맞추어 위와 같이 썼다. 그러나 ‘肥美’나 ‘廬’라는 표현이 『사기』· 『한서』· 『후한서』의「흉노전」기록에서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김부식이 모를 리 없다. 이는 김부식이 주몽의 고구려를 어느 정도 유목으로 이해하였을 것이 분명하나 그가 유가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위와 같은 오류를 범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주몽이 왕이 된 경위에 대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주몽이 구려(졸본부여)왕의 사위로 있다가 왕이 급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또 다른데서는 주몽이 졸본에 와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며 우태의 처였던 과부 소서노와 결혼하여 그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손영종은『고구려사』에서 주몽이 군사력을 강화했다고 하면서, 이시기를 기원전 279-27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손영종은 『尙書要義』의 成王(B.C.1055〜1021)기사에 나타난 唐 孔穎達 註의 ‘구려’ 언급과 『逸周書』의 4세기 초 晉 孔晁 註에 나타난 고구려 인용하는 가운데서 그와 같이 주장했다. 손영종은 주몽의 비류수 정착을 기원전 279-278년으로 본 수치가 무엇을 근거했는지에 대한 제시가 없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필자가 자세히 언급하겠다. 
 ‘天’에 대한 언급 후에도 주몽은 비류국 왕 松讓을 만나서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을  ‘天帝子’라고 계속 칭하였다. 즉,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
 
 위의『삼국사기』기록대로라면 동명왕의 즉위년은 B.C.37년이다. 그리고 ‘모처에 와서 도읍’했다는 기록은 고주몽의 유목생활에 대한 설명이다. 아무튼 북한은 고구려 건국이 B.C.277년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그들이 주장은 당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당하기 전『삼국사기』 보장왕 27년 2월 기록에 “고구려가 漢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나 된다”는 『고구려비기』의 사실에 근거한다.
 
또『唐會要』권95「고구려」에 인용된 『고구려비기』에 “前漢시대에 고구려가 세워져 그 나라가 있은 이래 9백년이 되었다.” 는 내용을 근거가 작용하였다고 본다. 이는『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시기에 관한 기록보다 훨씬 앞선다. 그렇다면 김부식이『삼국사기』가운데「동명성왕본기」의 기록과 「보장왕본기」의 기록 중 고구려 건국연대가 분명 하나는 오류이다. 게다가 『고구려비기』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侍御史 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고구려비기』기록을 언급하면서 고구려가 건국 후 9백년 안에 멸망한다는 도참서를 인용해 당 고종에게 아뢰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고구려 건국이 B.C.277년이라는 주장보다는, 고구려 존속 기간 9백년에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을 역산하는 B.C.232년 전후가 맞다. 따라서 필자는 고구려 건국을 대략 B.C.232년경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5.고구려 건국시기론
                        
                         1)고구려 건국시기
 
 고구려 건국기가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은 당 고종의 侍御史 賈言忠이 황제에게 아뢴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高句麗秘記』를 근거로 하여서 고구려 9백 년 존속설을 아뢰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新唐書』권220「高麗傳」에서도 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고구려비기』기록을 예로 들면서 고구려 건국 9백 년 되는 올해 분명 멸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내용을『三國史記』와 『新唐書』들어보자. 고려 김부식(1075-1151)은 송 구양수(1007-1072)가 죽은 후 태어났다. 그런데 내용은 똑 같다.
 
 또『고구려비기』에서 말하길 ‘(고구려는) 9백 년 이상 존속할 수 없으며, 마땅히 80세의 대장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고구려는 漢나라 이래로부터 나라가 있은 후, 올해가 900년입니다. 게다가 李勣의 나이가 80세입니다.
 
 위의 사실은 당 侍御史 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아뢴 내용이다. 중요한 사실은 668년이 고구려 건국 900년이라는 대목이다. 고구려 시작이 漢이 건국 기원전 3세기와 같은 연대이었다. 이 내용은 앞서 지적한 대목『唐會要』권95 「高句麗傳」라서 기록이 같다.  또 元 馬端臨의『文獻通考』권325과 같다. 또 南宋 王應麟의『玉海』권16「異域圖書」의 「唐高麗封域圖」와 『玉海』권191 「兵捷」의 「檄高麗含元殿數俘」에서도 앞서 소개 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아뢴 도참서『고구려비기』와 같은 기록이다.

 北宋 樂史가 979년 편찬한『太平寰宇記』권173 「高句麗國」에서 고구려 주몽 후손이 계승하다가 元封 3년(B.C108) 여름 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곳에 樂浪․臨屯․玄菟․眞番郡을 설치하였다. 그 가운데 玄菟郡의 屬縣으로 高句麗縣을 두었다. 바꾸어 말하면 元封 3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때 고구려가 멸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주목되는 사실은 『太平寰宇記』에서 한 무제 이전 주몽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싶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고구려가 9백년간 존속했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자료이다.『太平寰宇記』의 且間高麗秘計云조에서 고구려가 9백년 존속했다고 언급하면서 고구려는 前漢 말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앞서 언급된 『冊府元龜』처럼 찬자의 오류이다.  

 그런데 北宋 王欽若의 『冊府元龜』권655「智識」의 기록에는,
 
 또 제(賈言忠)가 듣기로『고구려비기』에서 이르길 ‘(고구려는) 9백 년 이상 존속할 수 없고, 마땅히 나이 80 세 된 대장이 나 와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다.’ 라고 있으며, 고구려는 前漢말이래로 국가 제도를 갖춘 이후, 이제 900년이 됩니다. 게다가 (당의 장수) 李勣 나이가 80세에 이르니, 역시 그 도참서 기록과 같습니다.     
 
『冊府元龜』는 고구려 시작이 前漢 末이라고 중국의 다른 사료와 다르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는 北宋 王欽若이 잘못 쓴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다른 역사기록과 같게 『冊府元龜』에서도 고구려 존속기간을 9백년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는『冊府元龜』도 고구려 존속기간이 9백년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렇다면 『冊府元龜』에서 고구려 시작을 前漢 末이아니라 前漢 初였다고 기록한다면 고구려 존속기간 9 백년설이 맞다.        

 賈言忠이 어떤 인물인가를 살피는 것은 『고구려비기』를 그가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듯싶다. 『舊唐書』의「賈曾傳」에 賈言忠 행적이 있다. 즉,
 
 賈曾은 하남 낙양사람이다. 아버지 賈言忠은 乾封연간(666〜668)에 侍御史가 되었다. 이때 조정에는 遼東의 일이 있었는데, 賈言忠은 命을 받들어 出使하여 지원군과 군량미를 가지고 갔다가 돌아왔다. 고종이 軍事를 묻자, 賈言忠은 遼東의 산천과 지세를 그리면서, 요동을 가히 평정할 수 있는 상황을 진술하였다. 고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위의 사실에서 미루어 보면, 賈言忠이 侍御史로 遼東으로 가는 지원군과 군량에 대한 책임을 졌을 뿐만 아니라 요동의 모든 상황을 파악해 당 고종에게 고구려에 대한 상황 보고하는 임무를 가졌다. 그렇다면 賈言忠이 『고구려비기』를 직접 보고 이를 토대로 고종에게 아뢴 것이 틀림없다.  

 『舊唐書』의 「賈曾傳」에 기록된 賈言忠 내용이『太平御覽』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두 사료를 인용한 까닭은 賈言忠이 『고구려비기』의 실체를 과연 알고 있었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바꾸어 말하면 賈言忠이 고구려의 산천지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 당시 고구려의 전적들을 모두 참조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 존속기간이 9백년이라는 사실을  『續資治通鑑長編』』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를 들어보면,
 
 고구려는 주몽이 訖升骨城에 거주하였다. 부르기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高를 氏로 삼았으며, 漢나라를 지나서 당 고종 때에 그 보장왕이 나라를 잃었다.
 
 위의 사실에서 보면 고구려 건국이 한나라와 동시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前漢인지 後漢시대인지를 밝히고 않았다. 그런데 같은 책에서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 一姓으로 9백년을 전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續資治通鑑長編』도 중국의 많은 사료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가 건국 후 9백 년에 멸망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주몽에서 보장왕까지 900년이었다는 사실을 北宋 曾鞏이 편찬한『元豊類藁』도 같은 내용이 있다.

 『通典』에서는 고구려 존속기간을 구체적으로 9백년이었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續資治通鑑長編』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한 기록이 있다. 즉『通典』 의「高句麗」기록에 의하면,
 
 (주몽을) 나라사람이 죽이려 하였음으로,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普述水를 건너, 訖升骨城에 도착하여 그곳에 거주하였다. 부르기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高를 氏로 삼았으며, 漢 무제가 고조선을 멸하자, 고구려가 縣이 되어, 현토군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通典』도 고구려가 한 무제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續資治通鑑長編』에 의하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시기를 한 무제(B.C.141ㅡ87) 이전으로 본 사실이 주목된다. 『續資治通鑑長編』의 유형의 기록으로는『通典』의 「高句麗」에서는 고구려가 한 무제 때 현토군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다만 『通典』의 「邊防一」의 「序略」에서 한 무제 때 고구려 현이 현토군 屬縣이 아니고 낙랑군에 속하였다고 다르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한무제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하였다면 한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 무제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면 낙랑군 속현으로 설치하였을 것이 아니라 독립된 군으로 설치되어야 마땅하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면,『新唐書』,『唐會要』,『文獻通考』,『玉海』,『元豊類藁』,『續資治通鑑長編』,『冊府元龜』,『太平寰宇記』에서 고구려 존속기간을 모두 9백년이라고 명시하였다. 그 중『冊府元龜』,『太平寰宇記』는 고구려의 시작을 전한 말이라 달리 기록하였던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冊府元龜』,『太平寰宇記』도 고구려가 존속 기간이 9백년이라고 기록한 사실에서 미루어보면 ?漢初?를 ?漢末?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한 무제 시대에 현토군 등장 이유는 한 문제의 중앙집권화 시작과 그의 아들 경제 때 완성되었던 사실과 맞물린다. 다시 말해 경제의 아들 무제 때 한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서 동서남북 침략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현토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한 무제이전부터 강력한 국가였다. 이에『後漢書』의 「高句驪傳」에서 고구려 관직에 대한 언급 후,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자고, 고구려를 縣으로 삼았고, 현토군에 소속시켰다. 또(한은 고구려에) 鼓․ 笛․ 伎人을 주었다.
 
 고구려는 한 무제 이전부터 존재한 강력한 국가였다. 그런데『後漢書』의 「高句驪傳」외에 『通典』권185「邊防一」의 「序略」과『文獻通考』의 「四裔」의 「東夷總序」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똑같게 언급하였다. 즉,
 
 그 고조선은 千 餘 年이 지나서, 전한 고조(유방)때 멸망하였다. (중략) 고구려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 한 무제가 (고구려를) 縣으로 삼아, 낙랑군의 속현이 되었다. 그 때 (고구려는) 매우 약하였다. 後漢이후 여러 대에 걸쳐 모두 중국으로부터 봉작을 받았으며, 도읍지는 평양성이었는데, 바로 옛날 고조선 국가의 왕검성이다.
 
 고구려는 한 무제(B,C.141ㅡ87) 이전까지 강력한 국가였다. 그런데 위에서 고구려를 낙랑의 속현으로 삼았을 때 고구려가 매우 약하였다고 기록한 사실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후한서』를 편찬한 5세기 초의 범엽(398〜445)의 『후한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위의 8세기 말에 편찬된 『通典』에서 杜佑(735〜812)는 그때 고구려가 매우 약하였다는 서술은 어떤 근거도 없는 기록에 불과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杜佑(735〜812)의 활동 시기가 당과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와 대립한 시기(758〜819)와 중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杜佑 자신이 당의 재상으로 淮南절도사․同平章事․諸道鹽鐵運轉使관직을 거치면서 平盧淄靑節度使 이정기 4대(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와 대결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通典』을 서술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을 폄하하였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렇다면 杜佑가 『通典』을 서술하면서 한 무제 때 고구려현이 현토군의 속현이 아니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기록한 사실은 杜佑가 당시 익히 알려진 낙랑군의 속현으로 서술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後漢시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봉작을 받은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의 한 패턴이라서 중국과 예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를 한이 현토군의 속현으로 삼은 것은 한 무제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였다는 증거이다. 달리 말해 한 무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염원을 가졌기 때문에 고구려를 한의 속현의 명칭으로 등장시켰다고 해석하여야 옳다. 그 이유는 한 개의 군에 여러 현이 있는 가운데 하나로 고구려를 현으로 삼았던 사실 때문이다. 만약 한 무제가 고구려 정벌에 성공했다면 고구려를 속현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한의 郡 이상의 편제로 만들었을 것이다. 

 杜佑의 『通典』과 馬端臨의 『文獻通考』에서 주목할 만 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니라 고구려 관계기사 분량이 신라나 백제보다 무려 5배 이상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가 9 백 년 동안 장구하게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이런 사실마저 杜佑는 감출 수 없던 모양이다. 
    
 앞서 周 成王(B.C.1055〜1021)과 고구려에 관한 손영종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자.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唐 孔穎達(574〜648)이 疏한 『尙書注疏』권17「周書」에,
 『序』에 성왕이 이미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하였고, 해동 여러 오랑캐인, 고구려, 부여, 馯貊의 속이 귀부하였고, 무왕이 商을 이기자 길이 모두 통하였다고 하였다.
 라는 기록은 周初에 周와 고구려의 교류 사실을 알리는 사료이다.

 또 4세기 초 晉의 孔晁가 注한 『逸周書』권7「官人解第58」에
 북방대의 정 동쪽 高夷에는 嗛羊이 있다. 嗛羊이라는 것은 羊인데, 4개의 뿔이 있다.
 라는 사료에서 周 成王(B.C.1055〜1021) 때 고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런데 고이에 대해 공영달은 “高夷는 東北夷이고, 고구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위의 두 사료에서 周初의 고구려 존재를 알리는 사료이다. 그러나 모두가 경전본문 내용이 아니라 전자『尙書注疏』는 당의 孔穎達의 注疏이고, 후자 『逸周書』는 晉의 孔晁의 注疏에서 孔穎達이 다시 언급하였다. 다시 말해 周初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 모두가 당의 공영달의 주장이라는 사실에 주목된다. 이는 당 태종 때 활약한 공영달이 위의 두 책의 주를 달면서 周初와 고구려 관계를 언급했다는 것은 같은 당대의 30년 후에 당 侍御史 賈言忠이 본 『고구려비기』와 관련성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고구려가 周初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중요 자료임은 분명하다.

 고구려가 중국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는 것은 『魏書』에 「고구려전」기록의 분량은「백제전」기록보다 배나 될 정도로 많다. 어쩐 이유인지 『魏書』에는 「신라전」이 없다. 『宋書』경우도 「고구려전」과 「백제전」은 있다. 『晉書』는 「고구려전」,「백제전」,「신라전」항목이 없고, 「부여전」, 「마한전」, 「진한전」,「숙신전」등만이 있는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그렇다고 고구려․신라․백제 관련기사가 『晉書』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튼 이는 그 시대가 중국의 남북조라는 대결구도였던 시대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주몽이전에 고구려가 실재했다는 사실은 『隋書』의 「백제전」에서 동명성왕의 출생을 알리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옮기어 보면,
 백제왕의 선조는, 고구려국의 출신이다. 국왕에는, 시녀가 1인이 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별안간 임신하였다. 왕은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시녀는, “계란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와서 나에게 감응해서, 그 때문에 (나는)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그 하녀를 용서했다. 그 후, (여자는) 드디어 한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은) 그 아이를 측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를) 신이라고 생각하여, 기르도록 명령하니, 그 이름을 동명이라고 붙였다. (동명이) 성장하자, 고구려왕은, (동명을) 싫어하였다. 동명은 (살해될 것을) 두려워, (그 땅을) 도망하여,  淹水로 갔다. 夫餘人들은, 모두 (그 동명을) 섬기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후한서』의 「부여국전」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동명이 태어나자 北夷 索離國왕이 아니라 고구려왕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게 차이점이다. 아무튼 고구려 국왕이 임신사실을 꺼려했다는 대목이 주목된다.『隋書』의 찬자가 주몽이 태어난 곳이 고구려였다고 서술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고구려가 주몽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몽 출생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방증하는 자료는 위에서 淹水로 도망간 동명을 부여 인들이 받들어 모셨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도 확인되는 바는 고구려이다. 이는 고구려 실체에 대한 다양함이다.

 사족을 붙인다면 10여 년 전 고려대 학술발표장에서 북경대 교수는 『新·舊唐書』가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정사는 정확하다는 이야기이다.

 고구려 존속기간이 9백년이 되었다는 것은 주몽부터 起算한 것 같지 않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 권1 「紀異 北扶餘」에 나타난 내용이다.
 
 古記에 이르기를 『前漢書』宣帝 神爵 3년 壬戌 4월 8일에 天帝가 訖升骨城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탔다. 도읍을 세워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했으며, 스스로 해모수라 이름 하였다. 아들을 낳아 扶婁라 하고, 解를 氏로 삼았다. 왕이 뒤에 上帝의 명을 받들어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東明帝가 북부여의 계통을 이어 卒本州에 도읍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졸본부여고, 고구려의 시조였다.
 
 위의 사실에서 보면 해모수가 전한 宣帝 神爵 3년에 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였다는 말은 이미 訖升骨城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그뿐만 아니다. 해모수가 부여가 아닌 북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 앞에 위치를 나타내는 접두어를 붙였다.

 그런데 『後漢書』의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방위와 습속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방천리의 되는데 있고,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은 옥저가 있고, 북은 부여가 접하고 있다. 그 땅의 넓이가 사방 2천 여 리 고, 대산이나 심곡이 많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산다. 경작지는 많지 않고, 열심히 경작을 해도 자기 생활 충분히 할 수 없다. 그래서 고구려 음식은 절식하며 (그래서)궁실의 정비는 잘 정돈되었다.
 
 고구려는 경지가 적어 절식을 하고 생활을 하며 궁궐을 잘 보수한다는 구체적인 고구려 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계속된 고구려 습속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東夷전에 의하면 즉, (고구려은) 부여의 별종이다. 예를 들면 言語·法則에는 같은 것이 많다. 궤작의 예에는 편족을 (위로 하고) 끌고, 행보(의 예)에는 모든 小足이다. (고구려에는) 5족이 있고,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각각 있다. 원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지만, 점차 쇠퇴하여져서, 후에 계루부에서 대신해서 낳았다. 그 官에는, 상가·대노·패자·고추대가·주부·우대·사자·조의·선인이 있다. (한의) 무제가 조선을 멸망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또 (한은 고구려에) 고·죽·예인을 주었다.
  
 동이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言語․法則등이 많이 같으며 궤배의 일각을 들고, 행보는 모든 小足이다. 고구려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 5족이다. 본시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왔다. 그 관직에 있어서 相加와 마지막으로 백의선인까지 열거되었다. 한 무제가 고구려를 현에 두어 玄菟에 두었다. 이때 한이 고․죽․예인을 두었다는 것은 중국이 고구려를 예우하였다. 이때 한 무제 시대에 고구려는 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부여와 같다고 말했다. 고구려의 습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고구려의) 습속은 (중국인이 보기에는) 음욕이 있어, 모두가 아름답다. 저녁이 되면 남녀는 모여서 창락을 한다. 모여서 귀신·사직·영성을 제사한다. 10월에는 하늘에다가 (나라가운데에) 대집회를 한다. 이를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그 신을 제사할 때) 禭神라고 한다. 또 시월에 이것을 맞이하여 제사를 드렸다.
 
 고구려의 풍속은 남녀의 정절이 아름다웠다. 모두가 모여서 제사는 들였다. 이중에 매년 10월에 고구려인들이 모여서 동맹을 드렸다. 고구려의 동쪽의 큰 굴에서 수신이라 같은 10월에 제사를 드렸다. 후일 큰 굴에서 제사하였던 것은 北魏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가 제사를 행한 유목의 제사행위였다.

 고구려의 복장이나  나라의 관습과 백성들의 성품과 장례식을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그 공회에서의 의복은 모두 錦織의 繡가 있는 견직물이며 금은 귀걸이를 했다. 大加·主簿는 모두 幘을 썼다. 그것은 冠幘과 같은 것이 있으며, (冠幘이 다른 것은)뒤가 아니다. 小加는 折風을 쓴다. 그 形은 弁과 같은 것이다. 牢獄은 없지만, 죄가 생기면, 諸加가 (모여서) 評議로서 死刑에 처한다. 그 妻子는 몰수해서 노비로 한다. 결혼에는 모든 신부의 집이 (신랑과 함께) 생활하고, 자란 아들이 성장한 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긴다. 그래서 얼마 지난 후 장송용 도구를 만든다. 금은의 재보는 후하게 주어서 사용한다. 돌을 쌓아서 무덤을 만든다. 松·柏을 심는다. (고구려) 인의 性格은, 악하게 생각하며, (그 위에) 氣力가 있다. 전투에 習熟이 있고, 좋은 (隣國을) 攻奪한다. 옥저·동예는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다.
 
 위의 고구려의 초기의 생활상을 보여준 것은 이는 흉노의 생활상과 거의 같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대가·주부가 다르다. 그 밖에 돌을 쌓아서 돌무덤을 만들었다.

 흉노의 습속의 죄를 다스리는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고구려의 주변민족을 통제하는 것도 흉노와 동일하다.

 『후한서』의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습속에 대한 언급하고 있다.
 
 구려는 一名을 貊耳라고 한다. 別種이 있고, 소수의 의지해 살고 있다. 그래서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을 만들어, 소위 맥궁이라 한다.
 
 후한시대에 고구려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지칭이다. 이런 고구려에 사항으로 흉노를 중국에 두어 가지 밝힌 것이 있다. 이는 흉노를 산융, 험윤, 훈육과 같이 언급하며 고구려에서도 맥이, 소수맥이라 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유목사회에서 정주형태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이다.

 『삼국지』의 『고구려전』에서 주몽이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할 때의 고구려의 생활습속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어서, 이를 주목하고 싶다. 즉,
 
 (고구려의) 사람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게 짓기를 좋아해 살고 있는 집의 왼쪽과 오른쪽에 큰 집을 지어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제사지내고, 또 靈星과 사직을 제사지낸다. 그 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급하여,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고구려에는 왕이 있고, 그 관원에는 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早衣先人등이 있으며, 존귀함과 비천함에 각각 등급이 있다. 東夷들의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 別種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와 풍물은 대부분 부여와 같지만, 그들의 성정, 기질, 의복은 다르다.
 
 위의 『삼국지』의 「고구려전」은 고구려의 생활이 유목과 정주생활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고구려는 유목생활을 하면서 일부지역에서 제한적으로 농경생활이 병행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위의 사료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우선 고구려가 절식을 하면서 궁궐을 짓고 생활했다는 사실은 유목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귀신에게 제사지냈다는 사실은 흉노의 그것과 같으나 사직에 대한 제사 기록은 흉노에 없다. 달리 말해 사직에 대한 제사는 사회적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이 성정이 사납고 급하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흉노와 같다. 이는 고구려가 오랜 세월 유목생활을 하였기에 이와 같이 고구려에 정주 요소가 있으면서도 유목요소가 강하였다는 사실에 고구려 주몽 이전의 역사를 필자가 규명하지 못한 연결고리가 있다.

 유목기마민족 흉노가 북아시아에서 중국과 교류가 없이 유목생활을 하였을 때의 역사에 대하여 남아있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흉노가 중국의 사가들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할 때부터 흉노 역사가 전하게 되었다. 이를 『사기』의 「흉노전」에서 보면,
 
 (흉노는 그의 조상) 淳維에서 頭曼까지는 천 여 년인데, (그 사이) 때에 크기도 하였고, 때에 작기도 하였다. 오래세월 동안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 세대의 계승의 일이 기술된 것을 얻을 수가 없어 말 할 수 없으나, 冒頓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대하게 되어, 모든 북쪽 유목기마민족을 복종시켜,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이후부터는) 그 세대의 계승이나 그 나라의 관호도 기재하는 것을 얻었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이는 흉노의 世系가 중국 기록에 남게 된 것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가 된 후부터였다. 바꾸어 말하면 흉노가 중국과 교류가 없는 상황에서 북아시아 역사에 대하여는 중국은 몰랐다. 그렇다면 고구려 주몽이전의 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구려가 대륙에서 독자적으로 유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 世系를 알지 못한 것은 흉노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반대로 중국에서 주몽에 대한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중국에 강력한 적대국이라는 사실을 유추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몽의 탄생설화 관한 사실이 『삼국사기』보다 중국 정사가 왜 자세하게 기록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저절로 밝혀진 셈이다.

 위의 사실에서 고구려의 『고구려비기』에서 고구려가 9 백 년인 서기 668년에 멸망하리라는 예언은 고구려 역사 이해에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그 이유는 흉노의 경우는 자체기록이 없이 중국기록에 의해서 천 여 년 동안의 흉노의 世系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는 고구려인에 의해 작성된『고구려비기』에서 고구려가 9백 년 만에 멸망한다는 도참 기록이 있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주몽 이전 고구려역사가 무려 2백 년 동안 존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알 수 없었던 것은, 마치 흉노 冒頓의 아버지 頭曼이전의 그 世系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고구려 주몽이전 世系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여 자체 기록을 갖게 되면서 주몽이후의 기록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고구려비기』가 현존하지 않는 사실과 고구려를 정탐하기 위해 遼東에 갔다 왔던 당의 侍御史 賈言忠에 의해 그 책이 당 고종에게 보고됐다는 사실만 확인이 가능하다.       
 
 
                                2)고구려 제구성
    
 
  졸본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연나부왕실의 국가였다. 이에 대하여서는『後漢書』의 「高句驪傳」에,
 
 (고구려에는) 무릇 5족 있고, 消奴部, 絶奴部, 順奴部,灌奴部, 桂婁部가 그것이다. 본시는 消奴部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쇠약하게 되었기 때문에, 후에 桂婁部가 이것을 대신했다.
 위와 같이 고구려는 5개 부족의 연합체였다. 이런 사실을『三國志』의 「魏志」의 「高句麗傳」에도 같게 기록되었다. 다만 『後漢書』에서는 ‘消’奴部라고 했는데 『三國志』에서는 ‘涓’奴部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後漢書』나 『三國志』 둘 다 중국 정사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발음이 유사한대로 옮겨 썼기 때문에 『後漢書』에서는 消奴部라고 했고 『三國志』에서는 涓奴部라고 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연나부왕실 국가였다는 사실은 소노부와 연노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사실은 주몽이 계루부 출신이었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부여를 위시한 북부여, 동부여 등이 위의 5부 의해 장악된 증거이다. 이는 句麗든 부여든 모두 고구려발달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고구려의 국가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後漢書』의 「高句驪傳」에 기재된 당의 李賢 注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唐初의 고구려 5부를 살펴보면, 하나는 內部로, 다른 이름은 黃部인데, 즉 桂婁部이다. 둘은 北部로, 다른 이름으로 後部인데, 즉 絶奴部이다. 셋은 東部로, 다른 이름으로 左部인데, 즉 順奴部이다. 넷은 南部로, 다른 이름으로 前部인데, 즉 灌奴部이다. 다섯은 西部로, 다른 이름으로 右部인데, 즉 消奴部이다.

 唐의 초기에 고구려 5부의 구조는 유목의 통치와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 유전체 지도에서 밝혀진 것처럼 북아시아와 한반도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뒷받침 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광활한 지역을 조직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역을 分治한 그런 시스템을 활용하였다. 흉노의 경우 單于庭이 중앙에 위치하고, 그 좌측에 左部가 있어 左賢王이 다스렸고, 또 右部를 두어 右賢王이 통치하는 그런 식으로 分治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런 匈奴라는 표기는 중국이 Hsiung-nu와 유사한 음을 가진 문자 중 모욕적인 문자로 바뀌어 기록된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5부 가운데 중앙의 桂婁部를 제외한 4부 모두 ‘奴’를 갖고 있었던 것이 흉노 표기처럼 멸시 뜻으로 붙인 중국식 표기방법임이 분명하다.

 한편 주몽이 桂婁部출신 왕실이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해서 계루부에는 ‘奴’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桂婁部가 너무 강성해 중국에서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계루부가 군사·문화·경제적으로 출중하였기 때문에 ‘奴’와 같은 식으로 비하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경우야 어떻든 중국이 고구려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주몽에 대한 구체적인 출생 설화를 언급한 사실에서 짐작 된다. 필자 생각으로 桂婁部 경우가 主牧副農 시스템이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계루부가 王號 사용과 아울러 성곽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구려 초기에 5부가 모두 主牧副農制였던것 같지는 않다. 다만 계루부와 순노부(연노부)가 그런 경우였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은 벽화에서도 증명된다. 즉 주방에 고기가 걸려있는 그림은 유목이거나 主牧副農 모습을 나타내는 생활상이다.    
 
 
                           6. 주몽의 건국시기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때를,  이때 주몽의 나이는 22세로, 전한 孝元帝 建昭 2년이며,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인 甲申년이었다.
 
 위의 사실은 전한 효원제 建昭 2년(B.C. 37년)에 주몽에 의해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보다 건국 연대가 20년 앞섰다고 하나, 시조 혁거세를 居西干이라고 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신라의 위상이 확연히 달랐음을 뜻한다. 거서간을 辰韓에서 왕을 말한다고 하였으나 이 역시 진한에서 최고 권력자를 居西干이라고 칭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칭호는 유목으로 해석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신라에서 閼英을 맞아들여 妃로 맞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흉노 單于의 妃를 閼氏라고 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라 박혁거세시대에 왕호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보기 또한 어렵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은 『삼국사기』는,
(고주몽의 소식을)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는 주몽이 강력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세력을 통합했던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유목사회에서 강력한 리더가 등장하면 주변부족이 와서 연합한 것은 당연하다. 이때부터 말갈이 와서 굴복함으로 고구려 백성이 되었다. 말갈과 발음이 유사한 勿吉도 같은 부족이다. 그 후 고구려 장수왕 15년(427)이 남쪽 경영에 치중하면서 평양천도로 말미암아 연결고리가 느슨하여지자 말갈의 일부가 북위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대외관계에서 어느 정도 독자행보를 취하였다. 말갈이 중국사서에 처음으로 延興연간(471〜476)에 북위와 교류를 가졌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말갈이 장수왕의 천도이후에 돌궐과 인접하면서 전통적 유목 생활을 유지하였던 사실과 연관이 깊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은 『魏書』, 『隋書』,『北史』에서 말길을 설명하면서 東夷 중 가장 강력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경우야 어찌하였든 延興연간 이전까지 말갈 일부는 독자세력이었다. 그렇다고 延興연간 이후 말갈이 독자적인 대외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보장왕 4년(645) 고구려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 15 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였다는 사실은 7세기 중반까지도 대다수 말갈인은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는 오늘 날 만주 전 지역이 고구려영토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실은 고구려 역사 연구에 중요하게 연구되어야할 사항이다. 그 이유는 『舊唐書』의 「渤海靺鞨傳」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구려 별종이란 말은 고구려인으로 습속에 약간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발해말갈인은 고구려인이라는 이야기이다.

 또『삼국유사』의 「발해전」에서는,
『通典』에 의하면,“발해는 본래 粟末靺鞨이다. 그 추장 祚榮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震旦’이라 했다. 선천 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일컬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이며, 그는 말갈발해추장으로 발해 건국자이다. 그렇다면 이는 말갈은 고구려인이다. 그런 입장에서 말갈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한국 고대사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말갈 명칭의 변천사는 春秋戰國시대는 肅愼, 漢代이후는 挹婁, 南北朝시대와 隋唐시대는 勿吉과 靺鞨, 遼․宋․元․明代는 女眞, 明末이후 부터는 滿洲족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삼국사기』의 주몽과 관련된 사실은, 후일 북아시아의 선비 檀石槐가 부락 牛羊이 약탈되자, 이를 되찾게 됨으로 鮮卑군장의 자질을 보여 주었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바꾸어 말하면 주몽에 의해 북아시아에서 패자로 군림하는 과정을 부족 통합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본다. 그런데 김부식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주몽)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김부식은 고구려를 통치한 그때부터 주몽왕이라 시작하였다. 또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 주위에 비류국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주몽이 기마민족으로서 사냥하며 떠도는 생활을 계속하며 비류국에 도착하였다. 舞踊塚 벽화에서 고구려의 사냥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때 고주몽은 비류국 왕 松讓을 만났다. 그렇다면 동시대에 신라에서는 거서간이 있었으나, 고주몽은 비류국의 松讓이 왕이라고 칭하였다. 김부식도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 할 수 없었는지 『삼국사기』에 기록하였다. 아무튼 비류국은 기원전에 만주지역에 主牧副農형태 왕국이 존재하였던 기록을 예시하고 있다.

 이때 비류국 왕 松讓이 고주몽에게 한 대화를 언급하고 있다. 이를 들어보면,
 
 “과인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위의 사실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이 없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松讓이 자신을 과인이라 칭하였다. 이는 비류국이 왕국으로 존재한지 오래되었다는 암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松讓이 비류국의 위치가 바다의 구석에 치우쳤다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비류국 위치가 동해 쪽이라는 이야기로 들리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고주몽이 만주 전 지역을 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松讓은 자신을 소개할 때  고주몽처럼 '天'과 결부시키지는 않고 자신을 寡人이라는 표현하였으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특기할만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主牧副農 형태의 강력한 유목국가가 비류국이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주몽의 모처에 도읍하였다는 말을 들은 비류왕 松讓이 말하길,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다. 땅이 좁아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松讓 제안에 주몽이 화가 나서 더불어 다투었다. 결국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으나, 松讓이 주몽을 당할 수 없었다. 이는 주몽이 활쏘기를 잘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송양과 활쏘기를 겨룬다는 것은 주목 할 만 한 일이 못 되었다. 유목에서 名弓이어야 군장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松讓이 주몽과 활쏘기를 겨루어서 진 것 때문인지 송양은 유목 방법대로 주몽에게 투항하였다. 그때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이 즉위한 그 이듬해였다. 이에 대한 기록을 옮겨보면,
 
 2년(B.C.36) 여름 6월 松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옴으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松讓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한 것이다. 
 
 위의 사실은 고구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듬해 비류국왕 松讓 항복으로 지명을  다물도로 바꾸고 그 지역 통치자로?封?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 주몽이 휘하에 비류국왕 松讓을 거느렸다는 의미이다. 즉 고주몽의 국가 형태가 일반 왕국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고주몽이 언급한 ‘天’의 개념은 왕국 범주를 넘어서 휘하의 왕국을 거느린 제국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 주몽이 건국 초부터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分封制를 실시하였다. 위의 사료는 주몽에 의해 고구려의 광대한 영역을 나누어 분봉정책을 실시하여 강력한 고구려 국가를 세웠다는 입증이다.

      
                                       7. 결론
 
 중국(1982년)에서 戰國 燕의 동방의 국경의 高夷, 秦 동쪽의 고구려, 西漢의 동쪽의 고구려의 위치를 밝혔다.
 
북한은 1)唐 孔穎達이 注疏한『尙書要義』의 成王(B.C.1055-1021)때의 (고)구려의 나타남과 4세기 초 晉 孔晁의 註『逸周書』의 ?高夷’는 東北夷이며, 고구려이다. 이런 사실은 戰國시대 燕나라의 동쪽 ‘高夷?는 고구려라고 기록하였다. 2)秦이 천하를 통일하여 東方의 변경지역으로 朝鮮이었다. 朝鮮의 위치의 북쪽에 고구려가 있었다. 3)前漢(西漢)의 遼東郡의 동방에 고구려가 있다. 한 무제가 고구려를 아우르면서 玄菟에 예속시켰던 때이다.

 4)북한 손영종(1990년)은『고구려사』에서 주몽이 군사력 강화했던 B.C. 279-278이라고 주장하였다. B.C.277에 고구려 건국을 주장하였다. 5)필자의 주장으로『고구려비기』에 고구려 존속기간을 900년에서 기원전 232년이 맞다. 그이전 세계는 고구려 유목기로서 그 시대가 존재 했던 것이 틀림없는 기록이다.

 고구려 동명성왕이 즉위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인용한 때를 보자. 김부식의 학설을 따른다면 고구려 동명성왕이 죽은(B.C.19)해의 다음 해(B.C.18) 5월에 주몽사당을 세운 백제를 생각하자. 이는 고구려가‘天’의 개념에서 출발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에 백제 시조 온조왕이 단순히 부자 관계에서 사당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고구려의 힘에 의지하고 싶은 염원이다.  

 다른 설은 동명성왕이 한 무제 이전의 설을 따를 수 있다. 앞서 이야기 되었던 것이 분명히 풀린 것이다. 北宋 樂史가 979년에 『太平寰宇記』에 실린 주몽에 실린 이해가 분명하다. 같은 시대 曾鞏의 『元豊類藁』의 이야기도 같다.

 고구려의 국가 시스템이 강력한 천자개념의 국가였다. 흉노정벌을 위해 新 王莽의 요청으로 고구려의 강성함을 엿 볼 수 있다. 이때 흉노에 의한 침략으로 新의 변경은 해골뿐이었다는 사실이『漢書』권94하「匈奴傳」건국3년(11)조에,
 
 이후, 선우는 좌우양부의 도위나 변경지대의 諸王들에게 두루 통보하여, 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침입해 약탈하게 하였다. 대집단은 1만 여 인, 중간 집단은 수천 인, 소집단은 수백 인으로, 雁門 ․ 朔方 2郡 太守와 都尉를 죽이고, 관리․백성들과 가축 등을 약탈한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新의) 변경지대는 파괴되어 텅 비었다. 
 
  新은 흉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북쪽 변경 상태는 처참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王莽은 고구려가 북아시아의 흉노를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아 청병하였다. 고구려 천자는 侯爵 騶(延丕)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 북쪽 변경으로 출병케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는 흉노를 정벌하지 않고 도리어 新을 침입하였다. 왕망이 嚴尤에게 명하여 간계를 써서 句驪侯騶를 잡아 죽여 장안으로 보냈다. 고구려의 국가 시스템이 강력한 천자 국가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무튼 고구려는 흉노와 대적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흉노 공격으로부터 新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王莽이 판단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