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이 대안이다/자주 국방

청와대가 지급보증을 해주십시오.석해균 선장이 죽어갑니다."

화이트보스 2014. 2. 7. 16:22

청와대가 지급보증을 해주십시오.석해균 선장이 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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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02.0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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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만의 여명 작전

    2011년 벽두에 우리 화물선 삼호주얼리호가 인도양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납됐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해적에 의한 피납 사건이 잇달았지만 몸값 지불로 문제를 해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던 상황. 청와대는 더 이상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군사작전을 통해 인질을 구출하기로 결정한다. ‘아덴만의 여명’이라 명명된 군사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5시간 만에 작전은 성공했지만 우리 선장이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정진석 전 정무수석의 <사다리 정치>에서 발췌했다.

    2011년 1월 28일 오전, 대통령을 뵈러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원희목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현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장)이었다. 약사 출신의 원희목 의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용건을 말했다.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러 간 아주대 이국종 교수가 청와대 최고위층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교수는 석 선장이 다발성 총상과 패혈증으로 위독한 상태이며 하루 빨리 중환자 이송 비행기인 에어 앰뷸런스를 빌려 귀국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 빌리는데 필요한 지급보증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가 지급보증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놔두면 석 선장은 죽습니다.”

    이 교수와 대통령을 잇는 사다리가 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그 길로 대통령에게 가서 이 교수와의 통화내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즉시, 주치의인 최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를 불러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통화를 마친 최 교수도 ‘긴급 이송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통령은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라고 지시했다.
    2013년 1월 '아덴만 여명작전 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석해균(오른쪽) 선장, 이국종 교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13년 1월 '아덴만 여명작전 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석해균(오른쪽) 선장, 이국종 교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지급보증은 외교부에서 하기로 하고 에어 앰뷸런스는 이 교수 명의로 빌렸다. 신속한 절차처리를 위해 오만 정부의 협조도 구했다. 최종 도착지가 수원의 아주대병원인 것을 감안해 가장 가까운 성남의 서울공항을 이용하도록 했고 도착 즉시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경찰에 에스코트도 요청했다. 석 선장의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 지체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인 1월 29일 밤 10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에 석 선장은 서울공항을 거쳐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됐다. 대기 중이던 의료진은 석 선장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자랑스러운 우리 청해부대

    화물 운송 중이던 삼호주얼리호는 2011년 1월 15일 낮 12시경, 인도양 북부 해안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됐다. 우리나라 청해부대의 작전구역인 아덴만에서 2,000km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승선 인원은 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등 총 21명이었다. 13명의 소말리아 해적은 AK 소총과 휴대용 로켓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같은 회사의 삼호드림호 선원들이 7개월간 억류되었다가 950만 달러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지 불과 두 달만에 또 다시 피랍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청와대에서는 즉시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주재로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군사작전을 통해 인질을 구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해상 수송로를 보호하지 못하면 국가경제에 지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나아가 피랍이 발생할 때마다 돈으로 해결하면 해적들에게 한국선박은 항상 표적이 될 것이 뻔했다. 특히 소말리아 인근의 해적들이 활동반경을 넓혀가며 ‘해적 산업화’되는 상황에서 무력 진압은 피랍 재발을 막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일이었다. 인질과 해적이 섞여 있으므로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외교안보 라인에서 대통령에게 진압 작전을 건의했다.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의 작전 수행이 최선인지를 고심했다. 향후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무력진압에 공감했지만 인질의 안전을 우려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우리 군을 믿고 맡기기로 했다. 대통령의 승인이 나자 삼호해운에 동의를 구했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우방들의 도움을 받아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대통령은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삼호주얼리호 인질을 구출하라는 최종 명령을 내렸다.
    아덴만의 여명 작전 당시 UDT 작전팀을 태운 우리 고속단정이 삼호주얼리호 선미에 접근하고 있다. /해군제공
    아덴만의 여명 작전 당시 UDT 작전팀을 태운 우리 고속단정이 삼호주얼리호 선미에 접근하고 있다. /해군제공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개시됐다. 현지 시각 새벽 4시 58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여명을 틈탔다. 피랍 7일째인 21일, 우리 시각으로는 오전 9시 58분이었다. 나는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대통령과 함께 진압과정을 지켜봤다. 작전에 투입된 청해부대 UDT 대원들의 헬멧에 소형 카메라가 장착돼 있어 현장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우리 대원들은 작전 개시 5시간 만에 해적을 완전히 제압했다.

    “아덴만 여명 작전을 완료했습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청해부대장 조영주 대령으로부터 승전 보고가 들어왔다. 13명의 해적 중 8명을 사살하고 5명은 생포했다. 우리 군의 큰 피해는 없었다. 승선인원 전부를 구출했으나 조타실에 있던 석해균 선장이 해적의 총탄에 맞아 배에 관통상을 입었다. 석 선장은 즉시 헬기로 오만의 한 병원으로 후송됐다.

    대통령은 조영주 대령에게 ‘내 격려를 전 부대원에게 전해 달라’며 치하했다. 또한 특별담화를 통해 ‘우리 자랑스러운 청해부대가 드디어 해냈다. 삼호주얼리 선원 21명을 모두 무사히 구출해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로써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으로 실추된 군의 위상도 회복할 수 있었다. 북한에게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가 됐고, 국제사회에는 한국이 테러와 타협 않는 나라임을 확인시켰다.

    석해균 선장의 생환

    이국종 교수는 오만에 도착해서부터 석해균 선장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자 그는 국가 최고책임자와 담판을 작정했다. 생명에 대해서는 절대 포기를 모르는 그로서는 ‘내 책임을 다 할 테니 나를 파견한 정부도 책임을 다 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석 선장을 무사히 데리고 온 이 교수는 자신이 소속된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에 석 선장을 입원시켰다. 그리고 석 선장이 걸어서 퇴원할 때까지 9개월이 넘도록 그의 곁을 지키며 치료했다. 그간에 국민들은 헌혈을 하고 성금을 모아 석선장의 쾌유를 기원했다. 대통령도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 치료에 힘을 보탰다.

    석 선장은 인질로 있으면서 해적들에게 수도 없는 폭행과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나 청해부대의 구출작전이 시작되자 석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공해상에 더 머물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다. 구출이 끝날 때까지 소말리아 해역으로 가까이 가지 않도록 고의로 항로를 벗어나거나 배를 지그재그로 몰기도 하고, 엔진오일에 물을 부어 배의 기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국제상선 공용통신망을 통해 해적들의 동태를 비롯한 배 안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해적들은 석 선장에게 구타와 총격을 가했다.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면서까지 책임을 다했던 석 선장의 생환스토리는 국민에게 큰 감동이었다.

    “오랜만에 남산 숯불갈비나 가지”

    이 못지않게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석 선장을 살려낸 이국종 교수이다. 14가지의 진단명이 석 선장의 온몸을 동여매며 생명을 앗아가려 했으나 이 교수는 이를 하나하나 제거해감으로써 석 선장의 생명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책임을 다했고, 한 사람은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냈다.

    석 선장의 치료과정이 알려지면서 중증 외상 치료체계에 있어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공론화된 것도 결실이었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외상치료 전문병원과 의료진이 태부족인 현실을 돌아보게 했다. 이를 계기로 응급의료법 개정안인 이른바 ‘이국종법’이 2012년 5월에 국회를 통과했다. 핵심내용은 전국 5곳에 외상센터를 짓는 것이었다. 이 교수로 인해 응급치료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된 까닭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3월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석해균 선장을 방문, 격려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3월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석해균 선장을 방문, 격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작전을 지시한 당사자로서 석 선장의 부상이 항상 자기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석 선장이 호전돼 가고 있던 어느 봄날, 대통령이 석 선장을 문병하자고 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대통령은 석 선장의 손을 덥석 잡으며 ‘살아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러자 석 선장은 ‘대통령님께서 저를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대통령은 석 선장에게 ‘퇴원해 걸어 나와야 이번 작전이 끝나는 것’이라며 진심으로 쾌유를 빌었다.

    그간 수차례 통화는 나눴으나 나는 그 자리에서 이국종 교수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에 한 언론에 소개된 이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왜 오만행을 결심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나랑 같은 해군 출신이라서요’라며 환자를 치료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냐고 했다. 책임은 이유가 없다는 그가 곁에 있는 한 나는 석 선장은 반드시 걸어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통령은 석 선장이 다친 것이 자기 책임이었고, 석 선장은 선원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자기 책임이었으며, 이 교수는 다친 석 선장을 살려내는 것이 자기 책임이었다. 그 자리에는 자기 책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아덴만의 구출작전이 성공한 것은 군은 군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석 선장과 이 교수를 비롯해 관련됐던 모두가 이유 불문하고 자기 책임을 다한 결과였다.

    “오랜만에 남산 숯불갈비나 가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대통령의 밝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