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다시보는 6.25

전쟁을 알았던 펑더화이와 전쟁을 몰랐던 김일성…둘의 충돌

화이트보스 2014. 5. 8. 14:07

전쟁을 알았던 펑더화이와 전쟁을 몰랐던 김일성…둘의 충돌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E-mail : q5423q@hanmail.net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
    더보기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미투데이

    입력 : 2014.05.08 10:51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적을 많이 죽여야 한다" vs. "땅부터 많이 빼앗자"

    (7) 김일성에 대하여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김일성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 신분이었고, 김일성이 벌였으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전쟁을 돕기 위해 한반도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의 최고 책임자였다. 따라서 그가 김일성의 여러 가지 면모를 다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보았다 하더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영역에서는 그가 김일성을 평할 수 있다. 대단히 많은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한반도에 들어와 북한군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입장이었으니 그렇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벌이는 게 전쟁이다. 병사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박한 전시에는 서로 간에 양보라는 것을 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펑더화이는 김일성의 여러 면모를 파악해가면서 때로 불만을 표출하거나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두 사람의 알력과 갈등이 크게 두드러졌던 경우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였다. 서울을 뺏은 중공군의 공세는 제3차 공세였다. 앞 회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당시의 중공군은 겉으로 서울을 점령하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골병을 앓고 있었다.
    6·25 전쟁 중의 펑더화이와 김일성(오른쪽).
    6·25 전쟁 중의 펑더화이와 김일성(오른쪽).
    병력 손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보급력이 떨어져 전선의 장병들은 기진맥진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자신의 상관이자 막후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급히 보고한 뒤 전 부대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펑더화이 본인은 중공군이 3차 공세에 나서는 것에도 상당한 불만을 지녔다. 그는 2차 공세 뒤 마오쩌둥에게 병력 운용상의 여러 문제점을 들어 3차 공세를 늦추자고 건의했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건의가 현장의 문제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3차 공세에 나서도록 지시했다. 자국 군대가 38선을 넘는 일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 드러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당시 펑더화이의 판단이 옳았다. 현장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으로 그는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섰다. 마오는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중시한 반면 펑더화이는 실제 전황에 대처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1.4후퇴 때 중공군의 서울 점령을 피해 화차에 오른 피란민들 모습.
    1.4후퇴 때 중공군의 서울 점령을 피해 화차에 오른 피란민들 모습.
    상징성만 앞섰던 중공군 서울 점령

    당시 중공군의 서울 점령, 우리 입장에서의 ‘1.4 후퇴’는 사실 상징성이 돋보였다. 우리에겐 수도를 다시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이어 수많은 사람들의 피란 파동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중공군은 승리 분위기를 만끽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국군과 유엔군의 신속한 후퇴 때문이었다. 펑더화이는 상대의 병력을 충분히 없애야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리지웨이 신임 미8군 사령관이 부임한 뒤 전쟁의 양상은 중공군 1~2차 공세와 달라졌다. 리지웨이는 신속한 판단력으로 후퇴 후 강력한 반격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3차 공세를 벌이자 신속하게 남쪽으로 물러나면서 병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펑더화이는 그 점이 못내 불안했을 것이다. 등을 떼밀려 3차 공세에 나서기는 했으나 실익이 별로 없는 공격이었다. 그는 결국 전군에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필수 병력 외에는 모두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는 약 3개월 정도를 쉬면서 병력과 화력을 보충해야 한다고 봤다.
    중공군은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은 중공군 위문공연단의 공연 모습.
    중공군은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은 중공군 위문공연단의 공연 모습.
    마오쩌둥 또한 그런 펑더화이의 고충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서울 점령 뒤 전군에 내려진 휴식 명령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강력한 불만을 품은 사람은 오히려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그에 앞서 1월3일 펑더화이로부터 “공세로 얻은 게 별로 없다. 적이 신속하게 후퇴했기 때문이다. 포로 3000여 명이 전부다. 서울과 인천, 수원, 이천을 잇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이제 휴식과 보충이 정말 필요하다”는 내용의 전황보고를 받았다.

    이런 내용은 중국 자료에 제법 상세하게 나온다. 중국 정부가 펴낸 것은 아니지만, 선즈화(沈志華)라는 중국학자가 오랜 기간 공을 들여 발굴한 자료에는 이런 곡절들이 구체적으로 들어있다. 그는 정부의 공식 문건, 보고자료, 개인 회고록을 모두 수집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연구 결과는 매우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은 ‘노동신문’ 등을 통해 중공군을 압박하는 조치를 취한다. 당시 외무상을 맡고 있던 박헌영과 평양 주재 소련 대사의 명의로 “적극적인 추격전이 필요”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야 한다” 등의 내용을 발표토록 한다. 펑더화이가 주장하고 있는 ‘몇 개월간의 휴식과 보충’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의도였다.
    병력은 많았으나 화력과 장비, 보급의 열세를 극복치 못한 중공군은 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미군이 중공군 시신 매장 현장을 바라보는 모습.
    병력은 많았으나 화력과 장비, 보급의 열세를 극복치 못한 중공군은 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미군이 중공군 시신 매장 현장을 바라보는 모습.
    그러나 펑더화이는 그런 김일성의 의도는 무시한다. 그리고 1월8일에는 전군에 휴식과 보충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펑더화이가 머물고 있던 평안남도 성천군 군자리의 연합사령부로 급히 찾아간 것이다.

    이 군자리라는 곳은 중공군 참전 병사의 기록으로 보면 조그만 광산이 있는 곳이었다. 미군의 가공할 공습(空襲)을 피하기 위해 중공군은 참전 초기부터 광산이 있는 곳에 사령부 자리를 만들었다. 군자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미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산속에 들어있는 곳이다.

    땅에만 관심 쏟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의 차이청원(柴成文) 참찬을 대동하고 왔다. 1월 10일 밤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처음엔 점잖게 펼쳐졌다. 펑더화이는 중공군이 맞닥뜨린 상황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전군에 휴식과 보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토를 달기 시작했다. “우선은 휴식과 보충에 동의한다”면서 말을 꺼낸 김일성은 “그러나 일부 병력만 후방에 남겨두고 1개월 정도 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즈화 교수의 자료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자세히 나온다. 그 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구체적인 표현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논지다.

    펑더화이(이하 펑):“지금 출동해봐야 적군에게 지역 일부를 포기하게 하는 정도의 효과만 거둘 수 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적군을 부산 등으로 몰아가면 분할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펼칠 수 없다.”
    김일성(이하 김):“적을 섬멸할 수 없다면 땅이라도 늘려야 하지 않나?”
    펑:“땅 늘리기보다는 적군을 없애는 게 먼저다. 적군을 없애야 땅을 얻는 것 아니냐?”
    김:“당장은 땅을 더 점령하고 인구도 늘려야 한다. 정전 뒤의 선거에도 유리하다.”
    펑:“그런 걸 지금 따질 때가 아니다. 당장의 핵심 목표는 승리를 많이 거두면서 적군을 없애는 일이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시각에 많은 차이가 있다. 김일성이 언급한 ‘정전 뒤의 선거’는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점령지 확대와 인구 확보에 혈안이었다. 전쟁의 성격을 잘 모른다는 방증이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으나 정작 뭍에 올라온 미군의 성격을 전혀 헤아릴 만한 안목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중의 백선엽 장군(왼쪽)과 신성모 국방장관.
    6·25 전쟁 중의 백선엽 장군(왼쪽)과 신성모 국방장관.
    그에 비해 펑더화이는 미군의 의도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쟁이 주는 참혹함을 잘 이해해 늘 위기에 대비하려는 신중함도 보인다. 나중에 드러난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신임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37도 선으로 신속하게 물러나 강력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은 타협할 수 없었다. 땅과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 신속하게 공격을 펼치자며 계속 우기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보내온 전문을 꺼내 보였다고 한다. 휴식과 보충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내가 말한 내용도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다. 노동당 정치국의 전체 의견이다”라고 반박하고는 박헌영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오라”고 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