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12 16:42 | 수정 : 2014.06.12 16:58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쉬친셴 장군은 “시민과 학생들을 유혈진압해서 역사의 죄인이 되느니보다는 내가 목이 잘리는 것이 낫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랬다가 직위해제 당하고 감옥에서 4년간 복역해야 했다.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어 명성을 날렸다는 제38집단군의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시민·학생들에 대한 유혈진압을 회피해 보려다가 불행한 군인이 된 쉬친셴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공산당 지휘부가 얼마나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뉴욕타임스는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쉬친셴 장군의 이야기만으로는 지금의 중국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천안문사태 이후 25년간 사업을 해서 성공한 샤오젠화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25년간 중국의 흐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샤오젠화는 베이징대 학생의 몸으로 컴퓨터 판매를 시작했다가, 막 자리 잡은 증권 시장 투자를 통해 재산을 불려가고, 고위 정치 실력자를 배경으로 이용해서 몸집을 불리고, 결국엔 캐나다와 미국에 대한 해외투자에서도 성공한다. 샤오젠화의 이야기를 통해 정치적인 면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성공한 중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문사태 당시 홍콩에 주재하는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4월 중순에 베이징으로 취재를 간 것은 당초 5월 16일로 예고된 덩샤오핑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이의 ‘30년 만의 중·소 화해 회담’ 때문이었다. 당시 베이징에는 전 세계에서 1000여명이 넘는 외국기자들이 몰려와 취재를 벌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부패했고 민주주의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있던 베이징대 학생들은 마침 외국기자들이 베이징에 와 있다는 점을 활용하기 위해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15일 개혁적 성향의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후 총서기의 죽음을 추도한다는 명목으로 천안문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천안문광장 시위는 4월 15일의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명목으로 광장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그런 시위가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 사이의 회담 취재를 위해 베이징에 모여든 외국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고 그 과정에서 시위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시위는 천안문광장에 한 달이 넘게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서 광장 중심부의 인민영웅기념비 주위에 자리를 잡은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開希), 차이링(蔡玲)을 비롯한 대학생 시위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농성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덩샤오핑의 이름인 샤오핑(小平)과 발음이 같은 ‘샤오핑(小甁·작은 병)’을 낚싯대에 매달아 광장 여기저기서 병소리를 내며 끌고 다님으로써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조롱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중·소 정상회담을 위해 5월 중순 베이징에 도착한 고르바초프가 시위대들 때문에 천안문 앞의 장안가(長安街)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인 베이징 서쪽의 조어대(釣魚臺)로 가는,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창피한 일도 벌어졌다.
마침내는 광장의 시위학생들이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한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바로 앞 광장에 세우자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인내는 한계를 넘고 말았다. 운명의 6월 3일 밤 10시 베이징 동서에서 진입한 인민해방군 제38집단군과 제17집단군은 시위대의 저항을 장갑차로 밀어붙이며 광장 한복판으로 진입해 다음 날 새벽까지 이른바 ‘광장 청소 작업’을 마무리했고 광장은 다시 평소의 빈 광장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사망자 숫자는 지금도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으나 중국 정부는 대체로 300~400명 정도, 외국 언론들은 1000여명의 사망자가 시위대와 진압군인들 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1989년 ‘춘하지교(春夏之交·봄과 여름이 교차하던 때)’에 벌어진 천안문광장 시위는 1978년 말에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10년째 되던 해에 빚어진 사태였다. 시위를 유혈진압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후 오로지 경제발전에 매달렸다. 마치 달려야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계속 경제발전을 위해 달려야 체제의 정당성이 겨우 유지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경제발전에 쏟아붓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경제발전을 추구한 당시 동아시아의 ‘사소룡(四小龍)’ 중의 하나인 한국과 같은 처지였다는 점에서 당시의 중국 정치·경제 체제를 ‘신(新)권위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25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천안문사태 유혈진압은 중국 대학생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취업과 창업 등 경제활동에 뛰어들게 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남긴 선례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비민주적 통치가 일부 운동권을 제외한 많은 대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축소시키고, 그러다 보니 ‘정치를 소홀히 하면, 정치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정치학의 격언이 들어맞아 현재도 한국 정치가 많은 문제점을 안게 된 상황이 형성됐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