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모임서 “노래해봐”… 주저하자 “논문 떨어지고 싶나”
기사입력 2014-07-11 03:00:00 기사수정 2014-07-11 08:21:42
일부 교수 ‘甲질’에 우는 대학원생
“○○야. 노래 한 곡 불러봐라.”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식당. 석사과정 대학원생 박모 씨(26·여)는 지도교수로부터 이런 주문이 떨어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교수가 소속된 학회의 세미나가 열린 날이었다. 박 씨는 참석자들에게 책자를 나눠주는 일을 했고, 이후 저녁식사에 동석해 삽겹살을 굽고 있었다.
이날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박 씨의 차례가 다가오자 교수는 노래를 부를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머뭇거리자 교수가 말했다.
“너 논문 통과 안 되고 싶냐?”
○ 사적인 일에 동원, 성희롱까지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일부 지도교수가 ‘슈퍼 갑’으로 군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울의 사회계열 대학원에 다니는 이모 씨(29)는 “입학한 뒤로 교수의 말을 거부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교수의 주문에 따라 매일 커피와 음식을 사오는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 교수는 책조차 직접 구매하지 않고 일일이 이 씨의 손을 빌린다.
이 씨의 친구는 지난해 여름에 교수의 비행기표를 대신 예매한 적도 있다. 교수가 동남아로 여행을 떠난다며 표를 끊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지방의 한 공과대 대학원에 다니는 최모 씨(26)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그는 “특히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은 교수의 개인비서처럼 일을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차를 사더라도 조용히 해야 한다. 꼼짝없이 교수의 운전기사 노릇을 할까 봐 두려워서다. 최 씨는 “매일 도서관에 와서 대기하다 교수가 부르면 달려가서 일하는 학생도 있다”고 말했다.
지도교수 앞에서 꼼짝 못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대학원생들은 설령 성희롱을 당하거나 폭언을 듣더라도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 석사과정에 다니던 박은정(가명·34) 씨도 그랬다. 그는 지난해 저녁식사 자리에서 술에 취한 교수로부터 “자고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거세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주변의 대학원 친구들은 박 씨의 하소연을 듣고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괜히 나섰다가 보복을 당할까 무서워서다.
○ 대학원생 인권보호 어떻게?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에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이유는 장학금이나 연구비뿐 아니라 논문 심사에 대한 권한이 전적으로 지도교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사립대 인문계열 석사과정 대학원생 김모 씨(25·여)는 “논문심사를 받을 때 외부 교수들이 학생의 논문을 비판하면 지도교수는 해당 논문을 설명하며 방어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 때문에 지도교수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문 통과에는 지도교수의 도움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문이 통과되면 갑을관계가 사라질까. 그렇지도 않다. 이평화 고려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장(30·여)은 “한국의 학문사회는 좁기 때문에, 졸업을 하더라도 자신이 전공한 학계에 남아 있는 이상 지도교수를 계속 마주쳐야 하고, 잘 보여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립대 석사과정 대학원생 김모 씨(29)는 “학계에서는 지도교수가 당사자에게 내린 평가가 평생 가고, 결국 대학원생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진석 서강대 대학원 총학생회장(28)은 “부당한 관행은 제도를 통해 바꿔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대학별로 인권문제를 다루는 인권센터 설립을 의무화하고 대학원생의 권리와 관련된 회칙을 마련하도록 하는 한편 이를 대학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논문이나 연구성과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인권과 관련된 회칙이나 센터를 마련해도 선언적인 대책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논문심사와 연구비 사용, 프로젝트 추진 과정을 부정이 개입되기 어려운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모든 대학원생과 지도교수 간에 갑을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스승과 제자로 남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번 장관 후보자들의 논문 파동을 계기로 대학가의 관행으로 남아 있는 폐해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갑을관계를 이용해 횡포를 부리거나 부정을 저지른 교수는 퇴출시키는 등 제재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손호영 인턴기자 이화여대 작곡과 4학년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식당. 석사과정 대학원생 박모 씨(26·여)는 지도교수로부터 이런 주문이 떨어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교수가 소속된 학회의 세미나가 열린 날이었다. 박 씨는 참석자들에게 책자를 나눠주는 일을 했고, 이후 저녁식사에 동석해 삽겹살을 굽고 있었다.
이날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박 씨의 차례가 다가오자 교수는 노래를 부를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머뭇거리자 교수가 말했다.
“너 논문 통과 안 되고 싶냐?”
○ 사적인 일에 동원, 성희롱까지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일부 지도교수가 ‘슈퍼 갑’으로 군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울의 사회계열 대학원에 다니는 이모 씨(29)는 “입학한 뒤로 교수의 말을 거부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교수의 주문에 따라 매일 커피와 음식을 사오는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 교수는 책조차 직접 구매하지 않고 일일이 이 씨의 손을 빌린다.
이 씨의 친구는 지난해 여름에 교수의 비행기표를 대신 예매한 적도 있다. 교수가 동남아로 여행을 떠난다며 표를 끊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지방의 한 공과대 대학원에 다니는 최모 씨(26)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그는 “특히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은 교수의 개인비서처럼 일을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차를 사더라도 조용히 해야 한다. 꼼짝없이 교수의 운전기사 노릇을 할까 봐 두려워서다. 최 씨는 “매일 도서관에 와서 대기하다 교수가 부르면 달려가서 일하는 학생도 있다”고 말했다.
지도교수 앞에서 꼼짝 못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대학원생들은 설령 성희롱을 당하거나 폭언을 듣더라도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 석사과정에 다니던 박은정(가명·34) 씨도 그랬다. 그는 지난해 저녁식사 자리에서 술에 취한 교수로부터 “자고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거세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주변의 대학원 친구들은 박 씨의 하소연을 듣고서도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괜히 나섰다가 보복을 당할까 무서워서다.
○ 대학원생 인권보호 어떻게?
지도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에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이유는 장학금이나 연구비뿐 아니라 논문 심사에 대한 권한이 전적으로 지도교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사립대 인문계열 석사과정 대학원생 김모 씨(25·여)는 “논문심사를 받을 때 외부 교수들이 학생의 논문을 비판하면 지도교수는 해당 논문을 설명하며 방어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 때문에 지도교수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문 통과에는 지도교수의 도움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문이 통과되면 갑을관계가 사라질까. 그렇지도 않다. 이평화 고려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장(30·여)은 “한국의 학문사회는 좁기 때문에, 졸업을 하더라도 자신이 전공한 학계에 남아 있는 이상 지도교수를 계속 마주쳐야 하고, 잘 보여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립대 석사과정 대학원생 김모 씨(29)는 “학계에서는 지도교수가 당사자에게 내린 평가가 평생 가고, 결국 대학원생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진석 서강대 대학원 총학생회장(28)은 “부당한 관행은 제도를 통해 바꿔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대학별로 인권문제를 다루는 인권센터 설립을 의무화하고 대학원생의 권리와 관련된 회칙을 마련하도록 하는 한편 이를 대학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대학원생과 지도교수 간에 갑을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스승과 제자로 남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번 장관 후보자들의 논문 파동을 계기로 대학가의 관행으로 남아 있는 폐해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갑을관계를 이용해 횡포를 부리거나 부정을 저지른 교수는 퇴출시키는 등 제재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손호영 인턴기자 이화여대 작곡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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