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너무 배가 고팠다
1965년 9월, 당시 국내에 주둔하였던 미 7사단의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한 존슨(Chester L. Johnson) 소장은 대강의 인수인계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인천으로 향하였다. 인천항(현재 1부두) 맞은편에 도착한 그는 부근을 샅샅이 뒤진 후에 화선장(花仙莊)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건물을 바라본 그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찾았다.
오래전의 일이라 과연 그곳에 그가 만나려는 인물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사실 이름도 몰랐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식당 주인인 김진원(金鎭元) 씨를 보는 순간 자신이 오매불망 찾던 인물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확인 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그는 갑자기 몸을 들썩일 정도로 오열하였다. 현역 미군 사단장이 식당 주인의 손을 놓지 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데는 나름대로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1965년 9월, 당시 국내에 주둔하였던 미 7사단의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한 존슨(Chester L. Johnson) 소장은 대강의 인수인계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인천으로 향하였다. 인천항(현재 1부두) 맞은편에 도착한 그는 부근을 샅샅이 뒤진 후에 화선장(花仙莊)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건물을 바라본 그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찾았다.
오래전의 일이라 과연 그곳에 그가 만나려는 인물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사실 이름도 몰랐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식당 주인인 김진원(金鎭元) 씨를 보는 순간 자신이 오매불망 찾던 인물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확인 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그는 갑자기 몸을 들썩일 정도로 오열하였다. 현역 미군 사단장이 식당 주인의 손을 놓지 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데는 나름대로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 제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잡혀 인천수용소에서 고단한 포로 생활을 하다 탈출까지 감행하였던 미국 군인 존슨. 이후 미 7사단장이 되어 한국에 부임한 뒤 은인과 만났다./1966년 7월 19일 경향신문
낯선 인천까지 끌려 온 그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었는데, 중노동이나 간수들의 학대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회고에 따르면 된장에 무말랭이를 넣고 끓인 멀건 죽만 먹어서 영양실조로 죽은 포로들이 상당수였다. 이런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는 7월 경 노역을 나간 도중 동료 3명과 탈출을 감행하였다. 탈출하다 체포된 포로들은 즉결 처형도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갈 곳도 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도망쳐 향한 곳은 시내 방향인 신포동이었는데,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1990년대 초까지 인천의 번화가였던 지역이다. 그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다짜고짜 가장 가까이 있던 나리낑(成金)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초췌한 몰골의 서양 포로들과 처음 마주한 사람이 당시 한국인 종업원이었던 김진원 씨였다.
- 요코하마 인근 아오모리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된 연합군 포로들. 피골이 상접한 모습만 봐도 그동안 겪었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인천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미 해군
순간적으로 너무 놀랐지만 김진원 씨는 포로들이 먹을 것을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고 부엌에 몸을 숨기도록 한 후 따듯한 음식을 내주었다. 이는 도주한 포로를 발견할 시에 돕지 말고 즉시 신고하라는 총독부의 포고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너무 배가 고파 탈출한 존슨 일행은 물론, 이들이 불쌍해서 도운 김진원씨 모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였던 것이었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은 포로들은 시간이 지나자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감사의 인사를 표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유도 잠시였고 곧바로 추격한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다시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김진원씨 또한 봉변을 당하였다. 지옥 같은 포로 생활 동안 겪었던 유일한 환대를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존슨은 20년 만에 한국에 부임하게 되자 곧바로 은인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종업원이던 김진원씨가 해방 후에 식당을 인계 받아 계속 운영 중이어서 이들의 극적인 재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젊은 존슨에게 인천은 악몽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장군이 된 후에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인연도 일본군에 생포된 포로들을 수감한 수용소가 인천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협소한 가건물에 많은 포로들을 수용하여 상당히 열악한 인천수용소 내부의 모습./LIFE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와 가까웠고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후방 지역이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강압 통치로 말미암아 일제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상당히 적대적인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한반도에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우리는 제2차 대전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만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계속)
- 인천에 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모습. 해방 직후 촬영했는데, 일장기 대신 게양된 성조기만으로도 해방된 포로들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