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 교수·정치학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군의 현실은 어떠한가. 북한에 비해 적게는 수 배, 많게는 수십 배의 국방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한·미동맹과 미군의 지원 없이는 전쟁 승리는 고사하고 대북 군사억지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오늘날 한국군의 모습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일 것이다.
2015년으로 예정된 전작권 환수를 2020년으로 늦춘다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환수 시기를 못 박지 않는 방향으로 협의를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북한 체제의 안정성과 정책 결정 예측성,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전력에 대한 우리 측 대응능력 구축 현황, 전작권 환수 이후 한국군의 한반도 전구(戰區)에서의 연합작전 능력 등을 보아가며 환수 시기를 최종 결정하자는 게 우리 군 당국의 입장인 듯하다.

그뿐이 아니다. 북한의 군사도발이 잦아지자 1992년 해체된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를 22년 만에 다시 한미연합사단 형태로 창설하고, 주한미군 병력 일부를 한수 이북에 계속 잔류시킨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에 더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의 한국 배치도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특히 우리 군 주도로 전쟁을 억제하고 북한의 전면전에 대비한다는 것이 주요 목표였던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서도 미군에 대한 과도한 의존 경향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전작권 환수 일정이 가까워 오면서 줄어들어야 할 한국군의 대미 의존이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는 역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우리의 소중한 전략적 자산임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과도한 대미 의존이 여러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북한의 고압적인 태도만 해도 그렇다. 북측이 우리 군을 ‘괴뢰군’이라 매도하고, 우리를 배제한 채 미국과의 양자 평화협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전작권에 있다. 북한이 군사도발을 감행해도 즉각적인 보복 타격을 가할 수 없고, 대규모 전쟁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도 없는 우리 군을 북측 정책결정자들이 우습게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요컨대 과도한 대미 군사 의존이 평양의 군사 모험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 군의 대미 의존 집착이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8월 11일 정부는 북한에 2차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다. 그러나 군은 한미연합사단 구성, 주한미군 한수 이북 잔류, 평택 기지의 THAAD 배치 타당성 조사 완료 등을 연이어 언론에 흘렸다. 게다가 국방부는 9월 1일자 국방일보를 통해 북한의 응원단 파견이 “남북 화해협력의 사절이 아닌 미인계를 앞세운 대남 선전의 선봉대에 불과하다”는 입장까지 게재했다. 군의 대북 경계심이 느슨해져서는 안 되지만, 정부의 대북 정책기조와 어긋나는 행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줄줄이 터져나오는 한국군의 위태로운 모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GOP 총기 난사, 윤 일병 폭행사망 사건, 야전군사령관의 임지 이탈과 음주추태, 갖가지 성추행·성폭행 사건 등 군별에 관계없이 말단 병사부터 대장에 이르기까지 수십 건의 사건사고로 군은 비아냥과 비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강해이가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와 과연 무관할까. 그동안 구조화돼 온 대미 의존의 집단심리가 군기 문란 일상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다시 ‘명량’으로 돌아가 보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충무공의 결연한 의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자 한다면 미국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변수일 수는 없다. 오히려 외부의 도움에만 기대다 나라의 안위를 망칠 수 있다는 뼈아픈 자기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건군 66주년에 부치는 필자의 소망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