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멀건 수제비 씹으며 빌딩 변기부터 닦았다… 밑바닥 人生이 움텄다

화이트보스 2015. 2. 27. 11:05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멀건 수제비 씹으며 빌딩 변기부터 닦았다… 밑바닥 人生이 움텄다

  • 박종인 여행문화전문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 박종인 여행문화전문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입력 : 2015.02.22 03:00 | 수정 : 2015.02.23 19:33

    [1]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上]

    봄이 되면 묵통 대신 구두통, 여름이 되면 아이스케키통
    학교는 언감생심…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다
    광화문~동대문 천변 개미마을, 삼팔따라지 6만명이 정착했다
    엉성한 골판지 벽 너머로 옆집 방귀소리까지 들리는…
    "엄마 학교 가고 싶어요" 걸레공장 다니며 강문高 진학
    "어쭈, 네까짓 게 공부?" 공장 주임은 따귀를 때렸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45년 광복부터 2015년 현재까지 우리들은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의 회오리 속을 헤쳐 나오기도 했습니다. 격동의 세월 70년을 지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유투브로 영상보기


    6·25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959년 2월이었다. 구자관은 청계천을 걷고 있다. 작년 이맘때 자관은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두세 달씩 차이 나는 외사촌 네 명도 같은 날 졸업했다. 졸업식엔 참석했지만 자관은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 힘든 살림 탓에 자관은 월사금을 밥 먹듯 빼먹고 결석도 밥 먹듯 했다. 며칠 뒤 외사촌들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촌들 입학식 날 자관은 꺼먼 군복을 입고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청계천으로 갔다.

    '밥 먹듯?' 자관은 어른들 표현이 불쾌했다. '밥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해가 바뀌었다. 아이스케키 통이 구두 통으로, 다시 메밀묵 통으로 바뀌었다. 군복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랬다.

    태어나고 일 년 하루 만에 맞은 해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어렴풋했다. 열다섯 살 소년의 뇌세포에 각인된 기억은 가난뿐이었다. 교복 입은 외사촌들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자관은 메밀묵 통을 윗도리 속으로 감췄다. 작년에도 그러했듯 봄이 오면 묵 통은 구두 통으로 바뀔 것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던 무허가 판자촌. 1962년 모습. /조선일보DB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던 무허가 판자촌. 1962년 모습. /조선일보DB
    해거름 속을 걷던 발걸음이 동대문 앞 오간수교에 닿았다. 다리 아래에는 기름 영롱한 잿빛 액체가 흘렀다. 판잣집에서 흘러나온 똥물과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 음식 찌꺼기, 기름 낀 염색 공장 검은 폐수가 뒤섞여 만든 광채였다. 고개를 들면 빨랫줄에 걸린 염색한 군복들이 하늘을 가렸다. 박제된 듯, 세상은 딱딱한 잿빛이었다.

    공장 앞에는 드럼통들이 놓여 있었다. 어떤 통에서는 시커먼 물이 끓고 있었고, 어떤 통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아이들은 천변(川邊) 좁은 공터에서 놀았다. 판잣집 사이 골목은 뛰어놀기에는 비좁았다. 장마철에 똥물이 넘친다고 물장구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60년 1월 동대문 주변 청계천 모습. 멀리 동신교회가 보이고 오간수교에는 전차가 다닌다. 다리 아래는 잿빛 물이 흘렀다. /조선일보DB
    1960년 1월 동대문 주변 청계천 모습. 멀리 동신교회가 보이고 오간수교에는 전차가 다닌다. 다리 아래는 잿빛 물이 흘렀다. /조선일보DB

    빡빡 민 머리에 털옷 입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옆구리 터진 글러브를 끼고 권투를 했다. 동무들이 에워싼 링, 도망갈 구석 없는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 두들겨댔다. 맨주먹일 때만큼 아팠지만 때리는 즐거움에 고통은 잊혔다. 주먹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잿빛 세상에는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와, 황홀하다!” 맞은 아이가 자존심을 누르며 던진 말에 동무들은 눈두덩을 주먹으로 눌러 어둠 속에 어룽거리는 황홀경을 즐겼다.

    ‘니네나 나나, 삼류(三流)다.’ 맞으며 웃어대는 아이들을 외면하고서 자관은 삐져나온 메밀묵 통을 소매 밑으로 밀어 넣으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쟁이 터졌다. 미아리고개로 인민군 탱크가 지나갔고 인민군보다 더 많은 피란민이 내려왔다. 천둥벌거숭이로 38선을 넘은 삼팔따라지들은 청계천과 중랑천, 정릉천변과 남산 기슭에 상자집을 지었다. 사는 꼬락서니가 개미집 같아서 사람들은 개미마을이라고 불렀다. 변소도 함께 썼고 판자와 골판지 벽 너머로 방귀 소리도 들렸다. 남산 기슭의 일본 육군 관사를 점령했다가 쫓겨난 사람들은 미군 사격장에 움막을 지었다. 목숨을 건 산기슭의 정착지는 해방촌이라고 했다.

    농부였던 자관의 아버지는 전쟁 와중에 양계장을 했다. 닭 전염병이 돈 지 사흘 만에 몽땅 죽었다. 1·4 후퇴 때 도망갔다가 와보니 남양주 금곡 집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다 팔아 고무 공장을 차렸다. 망했다. 선비 기질이 농후한지라 손대는 사업마다 신기할 정도로 망했다. 없는 살림을 더 쪼갤 수 없어 자관이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곱 남매는 외갓집, 고모 집으로 흩어져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자관네는 미아리에 집을 지었다. 산기슭에 기생하는 똑같은 상자집이었다.

    청계천변 개미마을은 생명체였다. 자고 일어나면 집이 지어져 있고, 해가 지기 전에 몇 채씩 철거되거나 불이 나서 사라졌다. 탈피와 변태를 반복하는 동물 같았다. 어느새 광화문 우체국에서 동대문 사이에 갈 곳 없는 사람이 6만 명이나 모여들었다. 국수 장수, 찐빵 장수, 뱀탕 장수에 넝마주이와 거지까지 함께 살았다.

    
	1973년 12월 6일 청계천변에 밀집되어 있던 판자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주변의 무허가 판자집들이 전소되었다. /조선일보DB
    1973년 12월 6일 청계천변에 밀집되어 있던 판자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주변의 무허가 판자집들이 전소되었다. /조선일보DB

    1958년 겨울 동대문 판자촌에 큰불이 났다. 집 2000채가 홀랑 타버렸다. 집터와 개천은 시멘트로 덮였다. 그 터에 삼팔따라지들은 신식 건물을 짓고 시장을 만들었다. 4년 뒤 완공된 시장 이름은 평화시장이다. 사람들은 재봉틀 하나로 옷 가게를 차리고 군복을 물들여 팔았다. 1층은 헌책방들이 들어왔다. 돈이 없어 입주할 수 없던 광장시장 서울 토박이들이 안 부러운 별천지였다.

    얼어붙은 건천(乾川) 주변은 나무로 얽은 2층, 3층집 숲이 장관을 이뤘다. 1층 지붕은 2층 마당이었고, 2층 지붕은 3층 마당이었다. 둑 윗집과 아랫집은 쓰레기 투기를 두고 걸핏하면 아귀다툼을 벌였다.

    자관은 그 숲 향기를 원 없이 맡았다. 홍수에 숲이 떠내려갔을 때 아이 얼굴에도 눈물 사태가 났다. 누가 이 난리에 내 아이스케키를 사 줄 것이며, 누가 구두를 닦겠다고 신발을 내밀 것인가. 바람이 앞섶을 파고들었다.

    겨울은 홍수보다 무서웠다. 신설동 이청교 아래 겨울 모래는 쇠보다 강했다. 나이 마흔에 여섯 식구를 거느린 고물 장수 김동철이 한탄했다. "식량도 없지, 땔감도 없지, 그런데 모래까지 얼어붙었으니 탄피며 쇠붙이랑 사금파리는 어떻게 파내서 돈으로 바꿀꼬!" 부부 고물 장수는 모래를 파헤치던 갈고리를 집어던졌다.

    멀리 평양 출신 젊은 장로 이봉수가 만든 동신교회가 보였다. 다리 위는 만물상이었다. 미군 부대 깡통도 팔았고 구호품도 팔았다. 책 좌판도 보였다. 자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책을 읽고 있었다. 자관은 아이를 외면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린 메밀묵 장수는 오간수교를 건너 다시 천변 둑을 걸었다. 자관은 메밀묵 통을 메고 학당으로 갔다. 천변에는 한 교통경찰관이 세운 천막 학교가 있었다. 자관은 서울대생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산수를 배웠다. 자관은 중학교 과정을 천막에서 끝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기사 관련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세상은 장남을 위해 존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형을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대학까지 보냈다. 길거리에서 대학생 형을 만나 인사하면 형은 못 본 척했다. 가끔 술에 취해 귀가한 형은 "네가 창피하고 불쌍해서 못 본 척했다"고 울먹이며 동생을 때렸다. 잿빛 겨울이 또 한 번 세상을 할퀴고 갔다.

    1960년 어느 날 밤 행상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자관이 말했다. "어머니, 나 학교 가고 싶어요." 어머니가 한탄했다. "… 외갓집 동갑내기들은 다 고등학생인데 내 아들은 구두 통을 메고 있구나."

    자관은 창신동에 있는 강문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야간반은 졸업장이 없어도 월사금만 있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강문고는 훗날 용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자관은 낮에는 돈암동에 있는 걸레 공장에 다녔다. 출근 시각은 아침 여섯 시였다. 미아리에서 걸어서 출근하려면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어머니, 나 쪼금만 더…." "일어나라. 공장 가야지."

    
	가난한 판자촌 가족의 단칸방에서의 생활과 식사장면. /조선일보DB
    가난한 판자촌 가족의 단칸방에서의 생활과 식사장면. /조선일보DB
    승강이 끝에 일어나면 눈가를 훔치는 어머니의 환상이 보이곤 했다. 훗날 성장한 아들이 물었다.

    "어머니, 그때 우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 내가,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그 새벽에 너를 깨우는 게 힘이 들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굉장히 아팠다. 그런데 공장 안 가면 네가 학교를 못 가니까…."

    "니미, 네까짓 게 공부?" 출근 첫날 공장 주임은 교복 입은 자관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열 사람 가운데 여덟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으로 바뀐 게 1985년이다. 사장과 주임은 매일 아침 그 한(恨)을 자관의 뺨에 풀어댔다. 뺨에 남은 출근 도장 자국을 문지르며 먼지 내뿜는 야자수 섬유를 집어 들면 옆 작업대에서 걸레 자루를 만들던 두세 살 위 예쁜 누나들이 아이를 달래주곤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저게 커서 뭐가 되려고." 오후 네 시, 퇴근하는 자관의 뒤통수에 주임은 조소와 질투를 던져댔다.

    공장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탔다. 돈이 아까웠지만 버스를 타면 정확하게 다섯 시 10분 전에 닿았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었다. 집에서 공장,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한 달에 500원을 모았다. 책 한 권 값이었다. 그 돈으로 자관은 단테의 신곡(神曲)을 읽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다. 3년 동안 매일 새벽 한 시에 집에 돌아와서 밥 먹고 토끼잠 자고 세 시간 반 뒤 출근하고 나니 자관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1963년 자관은 생애 첫 졸업장을 받았다.

    그해 여름, 어김없이 공군기 한 대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 DDT 연막 소독을 대신하는 말라티온 살포기였다. 맹독성인 말라티온은 DDT보다 지독하고 광범위하게 모기와 파리를 죽였다. 귀청을 찢는 굉음에 귀를 막고서 개미마을 사람들은 천변 탈출을 꿈꾸며 서둘러 장독 뚜껑을 덮었다. 8월, 9월 두 달 동안 사람들은 스물네 번이나 용이 되어 승천(昇天)하는 꿈을 꿨다. 한 달 뒤 박정희 후보가 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는 있어도 모두가 용이 되지는 못한다. 탈출은 쉽지 않았다. 졸업장을 받으면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자관에게 세상은 무서웠다. 3년 전에는 4·19 혁명이, 2년 전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청계천 곳곳에 공구리(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천(川)이 사라지고 있었다. 격변이었다.

    "졸업장도 소용없네요. 군대나 가렵니다." 졸업장을 처박아두고 여전히 공장에 다니던 자관은 졸업한 지 2년 만에 군대를 택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그 강원도 원통 11사단에서 죽지 않을 만큼 고생하는 동안 부산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입경(入京)했다. 김현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개미마을에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下〉로 계속


    
	구자관 대표 사진

    [2015년의 구자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떡하다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는 다 마찬가지였겠지요? 사람들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겠다'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악몽이었으니까요. 늘 한탄만 하던 저에게 초창기 우리 회사 직원 한 분이 가르침을 줬습니다. '뜨는 해는 잡을 수 있어도 지는 해는 잡지 못한다'고요. 그게 오늘 이 나라를 만든 힘이라고 생각해요. 해가 지기 전에 성실하게,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기에 우리 모두가 악몽에서 깨어나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걸레 공장 주임한테 욕먹기 싫어서 학교를 그만뒀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고요. 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변변한 사진도 없습니다. 그 힘든 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합니다. 세상 뜨신 아버지와 돌아간 큰형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존경합니다."

    스스로 '삼류'라 자학하며 청계천변을 하릴없이 맴돌던 소년은 지금 연 매출 5000억원이 넘는 청소 용역 회사 삼구아이앤씨의 대표 구자관(71)이다. 두 번 자살 미수를 겪고 악몽의 터널을 살아낸 끝에 이룬 꿈이다. 구자관은 2004년 용인대 경찰행정학과 04학번으로 입학해 학점 3.56으로 졸업했다. 예순네 살이었다. 2011년에는 서강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학위를 땄다. 예순일곱이었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인기 동영상
    -->
    X

    입력 : 2015.02.27 07:20 | 수정 : 2015.02.27 08:06

    [2]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下]

    발버둥친 청춘의 나날들
    美軍왁스 쓰다 세관 끌려가고
    직접 왁스 만들다 폭발 火傷
    유서쓰고 잠수교 돌진도 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통밀가루 수제비 건더기
    모두 주고 소금국물만 드셔…
    그러니 혈압 오죽하셨을까
    일흔한 살 지금 눈물이 난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멀건 수제비 씹으며 빌딩 변기부터 닦았다… 밑바닥 人生이 움텄다

    지난 줄거리: 서울 청계천변 개미마을은 피란민이 주를 이루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살아가고 있다. 가난한 소년 구자관은 주경야독하지만 돈을 벌어도 간 곳이 없다. 자관은 군에 입대하고, 부산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다. 별명은 '불도저'다.

    계집아이 하나가 토굴에 앉아 사진기자를 바라보았다. 첫눈 내린 다음날인 1963년 11월 11일, 다른 곳도 아닌 대한민국 수도 서울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날 조선일보는 “남대문에서 남산공원으로 오르다 보면 토관이 즐비하게 누워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DB

    고화질로 영상보기

     1963년 11월 30일 구파발에서 온 남자가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피부가 하얀 이 스물여덟 먹은 사내는 "스포티한 디자인보다는 ‘에레간트’한 선을 더 아낀다"고 했다. '웨스터나이즈 되어 있어 귀에 거슬리는' 말씨와 억양을 가진 사내 이름은 앙드레김이라고 했다. 본명은 김성진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스타가 되고 싶다"는 염원이 담긴 청일점(靑一點) 디자이너 김봉남의 예명(藝名)임이 밝혀졌다.

    
	1963년 11월에 열린 앙드레김의 세 번째 패션쇼
    1963년 11월에 열린 앙드레김의 세 번째 패션쇼
    패션쇼가 열리던 날은 무척 추웠다. 벌써 20일 전 오후 3시 10분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예년보다 열하루가 빠른 첫눈에다 기온도 8.3도나 낮은 영상 2.8도였다. 12분 동안 떨어진 눈에 아이들은 즐거워했지만 어른들에겐 불길한 강설(降雪)이었다. '철갑을 두른 듯한 낙락장송'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남산의 버려진 하수도관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그랬다.

    "머라꼬, 이것들이!"

    1962년 11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부산직할시 승격안이 부결됐다. 12대 시장 김현옥은 야간열차로 서울로 달려왔다. 5·16에 참가한 육군 제3항만사령관이요, 서른여섯 살 된 패기만만한 장군 앞에서 최고회의는 쩔쩔맸다. 이듬해 부산은 직할시로 승격됐다. 앙드레김이 화려하게 각광받던 그해, 김현옥은 예편과 함께 13대 시장에 취임했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 소설가 박경리와 이야기 중이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 소설가 박경리와 이야기 중이다.

    부산은 이면 도로 하나 없고 항구는 큰 배는 붙일 수 없이 들쑥날쑥했다. 김현옥 시장은 이 전시(戰時) 수도를 개조했다. 팔도 피란민이 뒤엉켜 살던 판자촌을 갈아엎고 서민 주택 구역을 만들었다. 부두는 직선화하고 도로도 확장했다. 군인답고 수송 병과 출신다웠다.

    구자관이 강원도 원통에서 빡빡 기고 있던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났다. 보릿고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3월 초 대통령 박정희가 확 바뀐 부산을 찾았다. 한 달 만에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불도저가 입경(入京)했다. 불도저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울이 온통 판잣집이다. 14만5000채다. 교통도 문제다. 교통난을 광복절까지 31% 완화하도록 하겠다."

    서울공화국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독립문과 마포, 동쪽으로는 돈암동과 청량리와 왕십리까지였다. 도로는 거기에서 끝났다. 광화문에서 국경을 넘어 갈현동까지 지프차로 반나절이 걸렸다. 전차(電車)는 시속 20㎞로 기어다녔다. 그 좁은 영토에 자동차가 2만대를 넘었고 버스만 3000대에 육박했다. 농촌 사람들이 몰려든 서울에는 350만명이 살았다. 6·25전쟁 때의 두 배가 넘었다. 청계천변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판잣집은 헐어도 헐어도 도깨비처럼 또 생겨났다. 많은 여자가 무작정 상경해 종묘 앞 공터 사창굴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종삼(鐘三)'이라 불렀다. 소설가 이호철이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다. 제목은 '서울은 만원이다'였다. 김현옥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아들 자관이 군대 간 사이 아버지는 미아리에 청소 솔 공장을 차렸다. 군에서 제대한 자관은 여전히 청소 도구를 만들며 생계를 꾸렸다. 청계천 복개 구간은 광교에서 오간수교를 건너 동쪽으로 급속하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개천이 사라진 곳에는 도로와 점포가 생겨났다. 자관에게는 청소할 곳이 많아졌다는 뜻이었고, 불도저에게는 도로를 놓을 공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자관은 아예 청소 회사를 차리고 식당과 빌딩 청소에 뛰어들었다. 1968년이었다.

    
	1969년 삼일고가도로가 개통됐다. 개미마을은 사라졌다.
    1969년 삼일고가도로가 개통됐다. 개미마을은 사라졌다.

    불도저는 아현동에 고가도로를 만든 뒤 관철동에 31층짜리 빌딩을 짓고 광교에서 마장동까지 고가도로를 세웠다. 3·1빌딩과 3·1고가도로였다. 3·1은 일제 청산과 근대화를 상징했다. 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개통됐다. 17개월 만에 완공된 이 도로를 불신한 미군이 이용 금지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미마을의 잿빛 영토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철거된 개미마을 사람들은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남대문시장 육교, 홍제동 도로 확장 공사는 4월 19일 착공해 10월 3일 개천절에 끝냈다. 육교는 짓기 쉽다고 광복절에 끝냈다. 지하도 6개, 육교 16개와 도로 5개의 건설 공사가 한날한시에 시작됐고 거의 동시에 끝났다. 공사판이 돼버린 서울을 두고 불만이 쏟아졌다. 김현옥이 말했다. "나는 모른다. 대통령한테 물어봐라." 아무도 묻지 않았다.

    164일 만에 길이 154m, 높이 2.66m짜리 세종로 지하도가 완공됐다. 공약보다 사흘 이른 9월 30일이었다. 배우 김희갑과 최은희가 상량(上樑)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었다. 이튿날 국군의날 퍼레이드가 그 위를 지나갔다. 물론 이후 수없이 땜질을 해대야 했지만.

    종묘에서 필동까지 개미마을이 사라진 공터에는 세운상가가 올라갔다. 공사가 한창이던 1968년 9월 26일 오후였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골목에서 걸어오더니 현장 점검을 나온 김현옥을 붙들었다. "아저씨, 놀다 가요."
    다음 날 공무원과 사복 경찰들이 남자란 남자는 죄다 불러 세우고 검문을 해댔다. 직업이 뭐고 주소는 어디며 왜 왔고 몇 번째냐고. 명단 발표가 열흘을 가자 종삼은 사라졌다. 창녀 853명과 포주 111명, '삐끼' 170명이 종적을 감췄다. 사람들은 "역시 불도저"라고 했다. 두 달 뒤인 11월 30일 전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종 황제 시절인 1899년 5월 17일 처음 종을 울린 지 69년 6개월 13일 만이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사람들은 더러운 일은 남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아웃소싱, 1960년대 말로는 미화 용역이었다. 구자관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 6푼짜리 달러빚을 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윤보다 이자가 더 많았다. 물건은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몸을 쓰는 청소 일이 오히려 나았다. 만든 걸레는 아버지가 나가서 팔고, 자관은 아줌마들을 고용해 식당 변소와 빌딩 복도를 청소하고 다녔다. 자관은 일하는 곳마다 귀신처럼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변기를 닦았다.

    자관이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수제비를 밥상에 올리곤 했다. 통밀가루로 만들고 멸치 몇 마리로 육수를 낸 멀건 수제비에 건더기도 별로 없었다. 자관은 자기 수제비를 다 건져 먹고 옆에 있는 어머니 수제비도 건져 먹었다. 어머니는 국물로 배를 채웠다. 수제비가 떨어지면 어머니는 별미로 인기였던 라면을 끓였다.

    "왜 또 국물을 드세요?" "수프가 닭고기라잖니. 소고기 대신에 이거라도."

    
	행상으로 가족을 지탱한 우리들의 어머니.
    행상으로 가족을 지탱한 우리들의 어머니.

    무학(無學)이지만 어깨너머로 글을 배운 여자였다. 한자투성이 신문을 읽을 줄 알았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줄 아는 어머니였다. 노름판에서 돌아온 남편 밥그릇에 밥 대신 화투짝을 넣어 투전판 출입을 끊게 만든 지혜로운 아내였다. 투덜대는 아들에게 건더기를 다 주고 짜디짠 국물로 속을 채우는 현명한 어머니였다. 어느 날 철없는 아들이 집에 와 보니 그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고혈압에 반신불수였다.

    노름을 끊고 아내를 간호하던 남편은 1970년 먼저 하늘로 갔다. 어머니는 그해 부엌에서 아들 밥상을 차리다 넘어져 허벅지가 부러졌다. 며칠 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네 공장 아이가 의자를 만들어줘서 변소만큼은 다리 억지로 구부리지 않아도 갈 수 있구나. 고맙다."

    어느 비 내리던 밤, 자관은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멍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다리도 구부리지 못하고 낙숫물 틈에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날 밤 이후 자관은 베개에 머리를 뉘며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제발 해가 뜨지 않게 해주세요."

    197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그제야 알았다. '소금물만 평생 드신 분이니 뼈는 오죽 약하며 혈압은 오죽 높았을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죽였다.' 자관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서 홍수가 난다. 그다음 날부터 자관은 함께 일하는 청소부 아줌마를 여사님이라 불렀다. 아저씨들은 선생님이라 불렀다. 밖에서는 천대받지만 집에 가면 모두가 거룩한 어머니고 아버지가 아닌가.

    1968년 초 북한에서 김신조 부대가 내려왔다. 가을에는 울진에 무장 공비 떼가 침입했다. 이듬해 대한민국 정부의 구호가 살벌하게 바뀌었다.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 시장 김현옥은 서울을 요새(要塞)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북악스카이웨이 건설로 북쪽은 철통같이 막혔다. 서울 국경은 남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청소 일감도 덩달아 늘어갔다.

    어머니가 낙상(落傷)하던 그해,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다. 무한질주하던 김현옥은 시장에서 물러났다. 시장 집무실 벽에는 숱한 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김현옥은 부산 기장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떴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29주년 광복절이었다. 기념식이 열리던 남산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재일 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잠시 중단된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며칠 동안 라디오에서는 조곡(弔曲)이 흘렀다.

    
	1974년 광복절,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서거했다.
    1974년 광복절,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서거했다.

    구자관은 가정을 꾸렸다. 두 살 어린 박덕희와 결혼해 아들 본훈이와 딸 본아를 낳았다. 미아리 집이 헐리고 가족은 변경을 떠돌았다. 집세를 감당 못하는 가장(家長)을 보고 복덕방 영감님들은 며칠이라도 살라며 빈집을 소개해줬다. 메아리가 울리는 대저택에서 판잣집 단칸방까지 1년에 일곱 번 이사를 했다. 아들 본훈이는 미아리 너머 누나 집에 맡겼고 젖먹이 본아는 이모네에 맡겼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또 한 번 오래도록 조곡이 울려 퍼졌다. 세상이 뒤집혔다. 12월 12일과 이듬해 5월 17일 연이은 충격에 세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관의 밑바닥 인생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 많은 청소 업체는 미군 부대에서 업자들이 빼돌린 군용(軍用) 왁스를 사서 청소했다. 세관이 군수품을 빼돌린 업자들을 족쳤다. 자관은 장물아비로 몰려 서부역 옆에 있는 서울세관으로 끌려갔다. 사흘을 온몸이 시커메지도록 두드려 맞고 벌금 4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자관은 이를 갈았다. "다 덤벼라. 하나도 안 무섭다." 자관은 왁스 공장을 차리고 바닥 청소용 왁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장마가 시작됐다. 자관은 왁스 재료를 끓이고 솔벤트를 부었다. 궂은 날이라 솔벤트 가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연탄아궁이에 닿은 가스가 폭발했다. 눈을 떠 보니 명동에 있는 백병원 12층 병실이었다.
    손가락과 팔은 달라붙고 온몸이 녹아 있었다. 사흘에 한 번씩 간호사는 자관을 목욕탕에 데려가 수세미로 상처를 박박 밀어 벗겨냈다. 너무 아파서 죽고 싶었다. 의사한테 물었다. "퇴원하면 손가락이 펴지기는 하나요?" "지켜봐야죠."

    '병신이 된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관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 침대 아래 물통들이 요란하게 굴렀다. 의사들은 아내 덕희에게 "왜 환자를 팽개치고 나갔느냐"고 화를 냈다. 한 달 뒤 자관은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끌고 퇴원했다. 공장은 불타고 빚쟁이들이 휩쓸고 간 사무실은 다 뒤집혀 있었다. 장부를 보니 빚만 8000만원이 남아 있었다. 거지였다.

    "수남아, 보험 좀 들자. 실적 올려줄게." 보험소장을 하고 있던 고등학교 동창 이수남은 신이 나서 첫회 차(次)를 자기 돈으로 내줬다. 사망 보험금은 1억2500만원. 자관은 치밀했다.
    '빚이 8000만원, 옷 행상 하는 마누라가 평화시장에 가게를 얻는 데 2000만원, 서른 평짜리 아파트가 2500만원. 1억2500만원이면 먹고는 살겠다.'

    자관은 유서를 썼다. "이 구덩이에서 꺼내주십시오. 푸른 초원 위를 달리지는 못해도 걷게라도 해주십시오. 제발 숨을 좀 쉬게 해 주십시오."

    
	1976년 한강 잠수교가 개통됐다. 절망한 구자관은 이 다리로 차를 몰았다.
    1976년 한강 잠수교가 개통됐다. 절망한 구자관은 이 다리로 차를 몰았다.

    자관은 빨간 포니 픽업을 몰고 장충동으로 갔다. 족발집에서 낮술을 퍼마시고 잠수교로 달려가 교각을 들이받았다. 차는 박살이 났고 자관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으로 튕겨져나갔다. 또 죽지 못한 것이다. 자살이 발각되면 보험금이 없다기에 투신하지도 못했다. 미생(未生)? 산 것도 아니었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초라한 가장은 차를 폐기하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새로 권력을 잡은 정권은 초대형 행사를 많이 벌였다. 프로 스포츠가 시작됐고 '국풍(國風) 81'을 시작으로 많은 이벤트가 열렸다. 1983년 KBS가 주관한 우주과학 전람회가 열렸다. 자관은 변소보다는 낫겠다 생각하고 전람회 청소 용역에 입찰했다. 신기하게도 용역을 따냈다. 첫날 밤 여사님 선생님들과 함께 쓰레기를 모아놓으니 고물업자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알루미늄 캔을 모아주면 한 개당 10원씩 쳐주겠다."

    훗날 자관이 기적이라 부른 사건이 시작됐다. 유리병 대신에 알루미늄 캔이 막 나온 때였다. 콜라도 사이다도 맥주도 모두 알루미늄 캔에 담겨 나왔고, 박람회 구경꾼들 손에는 누구나 캔 음료가 들려 있었다. 마대 자루에 캔을 모아놓으면 고물업자가 현금을 주고 사갔다. 청소는 적자였다. 깡통 팔아 번 돈은 그 몇 십 배였다. 박람회는 두 달 동안 수십만 명이 구경했다. 천변을 헤매던 무학 소년에게 40년 만에 코미디 같은 기적이 벌어졌다. KBS는 이후 구자관에게 용역을 계속 맡겼고 대학교와 기업들이 줄을 섰다. 직원 2명으로 시작했던 용역 회사는 자관에게 화상(火傷)을 남기고 매출 5000억 원짜리 회사가 되었다. 여사님을 모시고 선생님을 모시며 이를 악물고 남의 집 청소를 하는 회사 이름은 삼구아이앤씨다.

    2015년. 친척 집을 전전했던 아이들은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옷가지 행상을 하던 아내는 사모님이 되었다. 자관은 못 배운 게 서러워 예순 넘어 석사까지 땄다. 오십 넘어 스키도 배웠다. 젊은이들처럼 가죽점퍼에 쇠사슬 감고 오토바이도 몰아봤다.

    다 이루었는데 가끔 눈물이 난다. 젊은 날 그때는 왜 몰랐을까. 어머니의 타는 가슴속을 왜 몰랐을까. 천변에서 고달픈 청년기를 살아낸 일흔한 살 먹은 이 한국인은 지금도 궁금하다.

    대한국인2-늙은 광부의 꿈, 한창석으로 계속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멀건 수제비 씹으며 빌딩 변기부터 닦았다… 밑바닥 人生이 움텄다
    인기 동영상
    -->
    X

    '경제,사회문화 > 사회 ,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인세 인상은 경제 효율성 훼손  (0) 2015.03.01
    다단계 주의보 발령  (0) 2015.03.01
    박원순 시장의 공무원연금 개혁 반대, 대권 꿈 때문인가  (0) 2015.02.27
    나를 마약범으로 몬 사채왕 눈감은 판사-경찰 용서못해”  (0) 2015.02.27
    세계 무역 질서 재편, 美·中 눈치만 보고 있을 때인가  (0) 201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