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정치, 외교.

지독한 대통령의 독한 공무원연금 개혁

화이트보스 2015. 5. 6. 11:53

 지독한 대통령의 독한 공무원연금 개혁[중앙일보] 입력 2015.05.06 00:10 / 수정 2015.05.06 00:32

이하경
논설주간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는 만 아홉 살인 조카 세현이다. ‘보물 1호’ 세현이가 태어나자 자장가 연습까지 했다. 아무리 심각할 때도 누군가 “세현이 어때요”라고 물으면 환하게 웃으면서 말투와 행동을 흉내냈다. 그런 세현이를 대통령이 된 이후로 보지 않고 있다. 세현이 아빠이자 자신의 동생인 지만씨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다.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은 “지만씨가 청와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 인사와 이권청탁이 밀려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대통령이 독하게 절제하고 있다”고 전했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합의했지만 역풍이 거세다.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의 효과로 내년부터 하루 적자 보전액이 60억원으로 줄어들지만 2021년에는 다시 100억원이 넘게 된다. 딱 6년 만에 약발이 사라지는 것이다. 70년간 333조원의 재정절감 효과를 거뒀다지만 1654조원은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 40대 중반 이상 공무원들은 2009년 개혁에 이어 이번에도 웃었다. 공무원단체의 압력에 개혁의 칼날이 비켜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의 발의자인 박 대통령을 비난할 수 없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후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을 떠넘기게 되는 것”이라며 인기 없는 개혁에 앞장선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단 1년짜리 개혁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를 안 볼 정도로 지독하게 원칙을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야 대표가 “사회적 대합의를 이뤘다”며 자화자찬했지만 대통령은 “국민이 기대했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기로 덜컥 합의한 것도 “국민께 큰 부담을 지우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맞다. 여야 합의안이 이행되려면 연금지급액으로 2083년까지 1669조원이 더 들어가야 한다. 보험료를 두 배로 올리지 않으면 국민연금 적립금이 바닥나는 시기(2060년)가 4년 당겨진다. 107만 명이 가입한 공무원연금에서 어설픈 개혁의 시늉을 내려다 2100만 가입자의 노후 생명줄인 국민연금이 무너질 판이다.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은 “Wag the dog(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라며 어이없어했다.

 대통령이 잘 해보자고 시작한 일이 꼬여버린 것은 이익단체에 포획된 정치권의 포퓰리즘과 정부의 무능 때문이다. 하지만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지는 대통령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장악력이 센 집권 직후의 골든 타임을 놓친 게 뼈아프다. 조윤선 정무수석은 “집권 초에 공무원단체를 빼고 여야가 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개혁안 합의 시한을 5월 초로 못박은 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공무원단체의 페이스에 휘둘렸다. 대통령에게 등 떠밀려 나선 정치권과 정부는 애초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개혁안을 껍데기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상대에게 다시 완패했다. 대통령은 이런 무능과 혼선을 제때에 바로잡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였어야 했다.

 10월이면 연금 개혁의 마침표를 찍는 이웃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은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해 차별을 없애고 소득대체율도 확 낮췄다. 회의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해 신뢰를 쌓았다. 우리는 권한도 없는 실무기구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에 합의한 사실을 청와대와 주무장관이 몰랐을 정도로 협상의 투명성이 낮았다. 남이 30년에 걸쳐 한 일을 1년2개월 만에 해치우려니 이렇게 허점 투성이다.

 이번 합의안이 실제 상황이 된다면 미래 세대는 희망을 접어야 한다. 국민연금의 금고는 텅텅 빌 것이고, 번 돈의 4분의 1 이상을 보험료로 내서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 그러고도 남는 돈은 퇴직 공무원을 먹여살리는 데 매년 수십조원씩 갖다 바쳐야 한다. 노인과 공무원에게 끌려다니는 노예가 따로 없다. 대통령은 재정적자를 해소해 미래 세대에 대한 부당한 부담을 줄이겠다고 공무원연금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는데 결과는 정반대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6년짜리 공무원연금 개혁을 없었던 일로 돌릴 수는 없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자는 주장은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국민 동의를 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처럼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하나로 만드는, 제대로 된 연금 구조개혁을 준비하는 것이다. 모두가 초고령사회의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우리만 팔짱 끼고 있을 수는 없다. 사랑하는 조카의 재롱마저 포기한 지독한 원칙주의자 박근혜의 독한 연금 개혁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하경 논설주간




시사·경제지 디지털 구독신청하고, 종이잡지와 상품권 받아가세요!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