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태준은 여느 날처럼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 8시 30분 임원간담회의 주재로 시작한 빡빡한 일정 중에 특별한 일은 특강이었다. 그는 제철연수원에 강사로 가서 포스코 중간간부들에게 ‘자주관리’와 ‘국제수준의 안목’을 역설했다.
“하나의 기업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도 국가와 꼭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창립 초창기, 즉 유년기와 소년기에는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따라 회사의 장래와 성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유년기와 소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까지는 본인이 앞장서서 본인의 방침대로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회사는 청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본인의 판단입니다. 한 국가가 성장단계에 따라서 리더십의 패턴도 상이(相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우리 회사에 있어서 리더십의 패턴도 지금까지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여러분은 ‘자주관리’를 토착화하려는 본인의 뜻을 충분히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기업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도 국가와 꼭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창립 초창기, 즉 유년기와 소년기에는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따라 회사의 장래와 성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유년기와 소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까지는 본인이 앞장서서 본인의 방침대로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회사는 청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본인의 판단입니다. 한 국가가 성장단계에 따라서 리더십의 패턴도 상이(相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우리 회사에 있어서 리더십의 패턴도 지금까지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여러분은 ‘자주관리’를 토착화하려는 본인의 뜻을 충분히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자주관리 특강을 하는 박태준 사장.
“본인이 평소에 생각하는 바는 우리 직원들의 안목은 최소한 국제수준의 안목으로 표준화되고 평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는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일본에 뒤지고 있는가? 물론 축적된 기술력의 격차나 일천한 역사 등 모든 면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안목이 일본 수준에 미치지 못한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안목의 국제화가 자주관리의 성공의 요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국제수준의 안목을 가지는 것이 곧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힘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포항시 효자동에 있는 제철연수원에서 박태준이 회사의 리더십 패턴 변화에 대해 국가의 그것에 비유하며 자주관리와 국제수준의 안목을 강조한 그날 저녁, 박정희는 무참히 시해를 당한다. 그 비보를 박태준은 이튿날 이른 아침에 포항의 숙소에서 처음 들었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포항시 효자동 포철주택단지 내(內) 야트막한 야산 언덕 위에 외톨의 자그만 절간처럼 자리 잡은 박태준 사장의 숙소를 ‘효자사(孝子寺)’라 부르고 박 사장을 ‘효자사 주지’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 포항시 효자동에 남은 박태준 사장의 외딴집 숙소.
꼬박 하루를 두문불출로 보낸 박태준은 이튿날 아침에야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안전화를 졸라맸다. 그러나 회사에 당도하여 먼저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다. 혼자서 묵묵히 걸었다. ‘나는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정녕 이것이었단 말인가? 몇 차례나 부질없는 원망처럼 그 말을 되뇐 박태준의 납덩이같은 발길이 이어 나가는 동선(動線)은 박정희의 포항제철소 방문 발길이 그려놓은, 지표에는 없지만 그의 머리에는 뚜렷이 남은 동선이었다. 1978년 12월 포철을 열두 번째로 찾은 박정희가 걸어갔던 동선을 따라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박태준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 속에서도 박정희와 약속하고 박정희와 함께 꿈꾼 ‘철강 2000만 톤 시대’를 놓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방법을 쓰든 그 약속을 실현해야겠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 있는가?’
- 포항제철에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 조문하는 박태준 사장.
6‧25전쟁 발발 전에 간신히 숙군(肅軍)의 사선(死線)을 빠져나온 박정희, 그의 전도(前途)가 암울하기 짝이 없었던 그때부터 그의 생이 비극으로 마감된 그날까지 언제나 한결같고 허물없는 술친구로 지내온 구상(具常) 시인. 박정희가 권유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이나 장관직뿐만 아니라 대학 총장직도 번번이 사양했던 구상 시인이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자렛 예수’를 집필하고 있다. ‘졸지에 유명을 달리한 대통령 박정희’의 고독한 영혼을 위하여 조시(弔詩) ‘진혼축 鎭魂祝’을 바쳤다.
- 박정희의 친구, 구상 시인.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나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나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그 스스로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시기를 구상의 조시는 절절히 희원하건만, 당장에는 그 간곡한 기도의 시어(詩語)에도 숱한 돌멩이가 날아들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구상 시인은 “독재자에게 조시를 바치다니!”라는 온갖 비난에 대해 “친구니까”라고 단 한마디만 반응했다.)
박정희의 실존이 없는 지상에는 두고두고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시비가 격렬하고도 지루하게 이어지게 되지만, 박정희의 갑작스런 공백이 발생한 시간대에 오직 포스코만으로 한정해서 들여다볼 경우, 그의 죽음은 포스코로 불어오는 온갖 정치적 외풍을 막아주던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느닷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별안간 박태준은 오싹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삼남매가 영정에 묵념하고 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이것은 속담이어도 틀린 말일 수 있다. 공든 탑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고 힘차게 주장하는 말인데, 실상은 탑을 쌓아 올리기야 어려워도 무너뜨리기야 얼마나 쉬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