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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특구 장관 楊斌 미스터리

화이트보스 2015. 7. 6. 11:29
신의주특구 장관 楊斌 미스터리 

11일만에 막 내린 야망의 모래城

 


신의주특구 장관 楊斌 미스터리




중국이 楊斌을 연금한 일곱 가지 이유

신의주특구 개발은 중국 국익에 맞지 않는다


중국은 왜 양빈을 연금하며 신의주특구 계획에 재를 뿌렸을까. 현재 중국 당국은 양빈의 연금 사유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동안 양빈의 행적과 양국의 이해관계를 감안해 추측할 따름이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이유는 괘씸죄다. 비공식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신의주특구 같은 거대한 사업을 하면서 중국 당국에 일언반구 협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 외교부의 기자 브리핑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중국 외교부 부대변인은 북한의 신의주특구 계획에 관해 이렇게 발언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지지한다. 하지만 이런 개혁 개방이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두번째는 신의주특구가 개방되면 중국의 랴오닝성과 외국 자본 유치에서 경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둥시의 경우 중국 당국이 한국 기업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산업공단을 건설했고 지금 준공 단계다. 중국은 이런 와중에 양빈 회장이 일방적으로 신의주특구를 발표해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본 것이다.

중국의 이런 불쾌감은 중앙당 기구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에 내린 보도지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당국은 모든 언론에 “기사를 쓸 때 양빈의 이름을 절대 쓰지 말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지침 이후 실제로 중국의 보도 매체는 양빈과 신의주특구에 관한 기사를 줄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중국인이 쓴 양빈의 일대기도 중국 당국의 판금 조치 때문에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세번째 이유는 신의주특구 지역의 석유 매장 가능성 때문이다. 신의주특구가 자리잡은 압록강 하류의 삼각주 비단섬과 이 일대 바다에는 석유 매장 가능성이 크다. 중국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김일성 주석 생전에 중국의 대경유전이 이 지역의 석유를 개발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특구가 개발되어 외국 자본이 이 지역에 들어서면, 지하에 묻혀 있는 석유자원에 대한 개발권과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중국 당국은 북한이 여기에 대한 상의가 없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양빈의 외환관리법 위반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양빈은 북한 당국에 2,000만 달러 가량을 비공식으로 원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당국은 이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보고 있다.


다음은 양빈의 탈세 혐의다. 이와 관련해 양빈은 인민폐 1,550만위안(약 23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시인했고, 이달 안에 밀린 세금을 모두 내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혹자는 이번 연금이 11월에 열리는 제16차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관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베이징(北京) 당국은 부유한 사업가들에게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도록 압력을 넣고, 자본가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에 반대하는 공산당 보수파를 달래기 위해 양빈을 연금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된 어우야그룹의 투기와 주가 조작 혐의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양빈 회장과 어우야그룹은 투기와 주가조작 혐의로 조사받고 있었다. 그 결과 어우야그룹은 최근 주가가 크게 떨어져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난 9월에는 홍콩 주식시장에서 거래 내역을 충분히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거래가 중지되기도 했다.

 


10월4일 새벽 5시,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楊)시 허란춘(荷蘭村) 외곽의 한 호화로운 저택에 중국 공안이 들이닥쳤다. 이 집은 11일 전인 9월24일, 북한의 신의주특구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된 양빈(楊斌)의 집이었다. 체포 당시 양빈은 아내와 친구들, 허란춘 건설 관계자, 한국의 은행 관계자 등 20여명과 같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흘 뒤인 10월7일 한국을 방문해 신의주특구 투자유치 활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이렇게 연행된 그는 10월13일 현재까지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실로 11일천하였다.

양빈이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9월23일, 선양에서 각국 기자를 모아놓고 신의주특구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곧바로 제트여객기를 대절해 선양에서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는 이 비행기에 홍콩 주재 CNN·TIME·월스트리트저널·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기자 4명을 태워 평양으로 날아갔다. 취재비용은 모두 무료였다.

그는 한국 기자 등 다른 나라 기자들은 따돌리고 미국의 주요 언론과 홍콩의 대표적 신문만 고른 것이었다. 그가 기자 4명의 북한 입국 비자를 받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시간. 선택된 외신기자 4명은 너무나도 엉뚱하고 당돌한 제안에 어리둥절했지만 양빈의 실력에 놀랄 따름이었다. 홍콩 주재 외신기자들은 양빈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대다수였다. 평양행 비행기를 탄 기자들도 사전 연락을 전혀 받지 못한 터여서 사전 정보수집 같은 취재 준비도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자 4명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간 양빈은 9월24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전원회의에 참가해 김영남 위원장으로부터 정식으로 신의주특별행정구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이 소식을 조선중앙통신은 다음날인 9월25일 보도했다. 양빈 장관이 신의주특별행정구의 기본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이미 서명된 합의문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고 특별행정구를 빠른 시일 안에 세계 수준의 현대적 도시로 건설해 강성대국 건설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서약했다는 것이었다.

권총 찬 김정일 경호대가 만취한 양빈 부축

이날 임명장을 받은 후 양빈은 만수대의사당 2층으로 올라가 김정일 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가했다. 목격한 기자들에 따르면 그는 만찬을 끝내고 내려올 때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비틀거렸고, 권총을 찬 김정일의 경호원들이 직접 그를 부축해 김정일이 내준 메르세데스 벤츠 리무진에 태워 숙소로 옮겼다고 한다.

홍콩에서 날아온 외신기자 4명은 평양에 며칠 머무르다 양빈과 함께 버스 편으로 신의주로 들어갔다. 이 외신기자 가운데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기자가 있었다. 이 기자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양빈과 은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양빈은 기자 일행과 함께 신의주 시내를 둘러보며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밝혔다. 다음은 신의주 시내에서 기자 일행과 양빈 회장이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저 낡은 건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 건물은 까 없애버려야 해.”

양빈 회장은 이런 식으로 신의주 시가에 있는 건물을 깡그리 철거하고 새로 짓겠다고 피력했다. 그가 구상했던 토목공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행이 신의주 역사(驛舍) 앞에 이르렀다. 신의주 역사는 신의주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기자 한 명이 물었다.

“저 역 건물도 철거할 것인가.”

“저것도 없애야 한다.”

이번에는 한 기자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신의주 역사 앞에 있는 저 거대한 김일성 동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 동상도 옥내(屋內)로 옮겨야지. 저렇게 야외에 둘 수는 없다.”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물론 이런 대화는 외신기자 중 1명이 중국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측 관리가 따라붙었지만 양빈과 기자는 귀엣말에 가까운 수준으로 이런 대화를 중국말로 나눈 것이다. 그는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신의주특구 안에 있는 건물은 역사적인 기념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할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시설도 시대에 뒤진 것이라면 모조리 밀어버리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신의주 시내를 깡그리 밀어버리겠다”

양빈 회장은 기자들에게 신의주특구를 항구와 시가지 등 두 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고속도로로 잇겠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이 두 구역은 모두 ‘장벽’으로 북한 영토와 분리될 계획이었다. 양빈은 이런 거창한 사회간접자본시설을 모두 갖추기 위해서는 약15억달러가 들어갈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양빈은 신의주에 살고 있는 시민 50만명은 앞으로 2년 동안 북한의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대신 북한과 중국에서 젊고 기술 있는 이주자 20만명을 새로 받아들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홍콩의 입법원 같은 입법기구(입법위원 15명)를 임시로 만들어 위원의 반수를 외국인으로 채우고, 특히 입법원장은 유럽인 가운데서 선임할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신의주특구의 행정 체계는 홍콩행정특구를 완전히 모방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외신기자 1명이 일행을 수행하던 북한 안내원에게 중국말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신의주특구가 성공하리라고 보십니까.”

이 관리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양빈이 김정일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기에 이런 짓을 벌일까요.”

거의 빈정거림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 관리는 중국말로 속삭이듯 불만을 쏟아냈다.

“주체사상의 기본은 주인의식이다. 자기 나라 영토를 외국인에게 식민지 시대에 외국에 조차(租借)하는 것처럼 내주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중국이 상하이(上海)를 서구 열강에 조계(租界)를 정해 떼어준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신의주특구를 시행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식민지 시대가 다시 온 것 아닌가.”

이번의 신의주특구 발표는 하부 당 기구에서 면밀히 연구해 올라간 안이 아니라, 김정일과 양빈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체사상으로 교육받은 노동당 청년간부들에게는 이번 결정이 날벼락인 셈이다. 개혁 개방을 하는 것도 좋지만 왜 외국인을 행정장관으로 앉히느냐며 불만이 나올 법도 하다.  

양빈은 신의주특구 행정장관 제의를 언제 받았느냐는 질문에 지난 1월에 처음 받았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김정일의 아이디어다. 그들은 내가 북한의 농업을 어떻게 돕는지 지켜보면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신의주특구의 에너지에 대한 구상도 비쳤다. 우선 단둥(丹東)의 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끌어 쓰고, 장기적으로는 자체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안이었다. 또 통신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외국 법인을 유치할 계획도 내놓았다. 이 모든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은 외국의 개인투자로 충당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현 단계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이미 항구를 새로 건설하는 데 참여할 일본과 대만의 기업과 교섭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빈은 이어 더 파격적인 구상을 내놓았다. 신의주특구 경찰 책임자에 미국인을 앉힐 수 있다는 안이었다. 그는 “특구 치안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미국인을 경찰 총수로 앉힐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양빈 회장이 신의주 시내에서 미국 기자들에게 밝힌 청사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신의주 장벽’에 관한 대목이다. 양빈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했다는 구상에 따르면 신의주를 남북으로 나누어 압록강과 단둥을 바라보는 북부 신의주는 양빈이 맡고, 남(南)신의주와의 경계에 베를린 장벽(일설에 따르면 5m 정도 높이) 같은 담을 쌓아 북한 영토와 특구를 완전히 가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분할하는 데는 북한 당국의 속사정이 숨어있다. 첫째는 탈북자 때문이다. 신의주는 원래 일제시대 일본이 대륙으로 쳐들어가려고 인위적으로 만든 도시다.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탈북자를 틀어막는 데는 중요한 요충이다. 이런 식으로 장벽을 쌓지 않으면 쏟아지는 탈북자를 막을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찰 책임자로 미국인 앉히겠다”

또 다른 이유는 북신의주는 이미 북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의 개혁 개방 물결이 휩쓴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북한 당국은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체제를 사수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 것 같다. 실제로 압록강 상류 수풍 지역에서는 이미 장마당이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 일대 북한 공장 시설은 지난 7∼8년 동안 황폐해진 실정이다. 이 지역은 북한으로서는 지킬 의미가 없는 곳이 된 것이다.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신의주 이남으로 침투하는 ‘자본주의 바이러스’를 막는 방어선을 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9월23일 양빈이 선양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갑자기 등장했을 때 전세계 언론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가 어떤 인물이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온갖 추측보도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키가 작고 비대한 그의 외모가 김정일 위원장과 비슷했기 때문에 김정일의 이복형제라는 설도 나왔다.  

이런 의문은 그가 평양으로 데리고 간 미국 기자들에게 자신의 이력을 밝히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양빈은 1963년 중국 장쑤(江蘇)성 성도인 난징(南京)에서 출생했다. 다섯살 때 양친을 모두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문화혁명이 진행되던 어린 시절, 그는 학교에 입고 갈 옷과 책을 살 여유가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돈을 빌려 학교에 다녔다. 20대이던 1980년대에 양빈은 랴오닝성 후루도에 있는 중국 제2해군함포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학비가 무료이고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학교여서 가난한 양빈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해군 장교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훈련이 너무 힘들어 양빈은 중도에 퇴교하고 만다.

이후 양빈은 1987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라이덴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의 접시닦기부터 레스토랑 웨이터, 이삿짐센터 인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1990년까지 1만달러를 저축했다. 이 돈으로 양빈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무역회사를 차렸다. 이 무역회사를 통해 그는 중국 본토에서 의류·완구·전기기구를 수입해 동유럽과 소련에 팔았다. 당시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동구에 자본주의가 물밀 듯 밀려드는 시기여서 그가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기회를 제대로 잡은 양빈은 2년 동안 2,000만달러라는 거금을 저축할 정도로 떼돈을 벌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네덜란드 시민권을 획득했다. 다시 이를 밑천으로 그는 1992년말 중국으로 귀국해 ‘어우야(歐亞)농산물회사’를 차렸다. 그는 이 회사를 통해 중국의 장쑤성에서 화훼와 채소를 싼 값으로 키워 시들지 않도록 특수 약품처리해 유럽으로 수출했다. 그에게는 네덜란드의 선진 농업기술과 네덜란드 시민권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 신분으로 사업상 여러 가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투자 관계로 세금 혜택을 받으려는 사업가들에게는 외국인 신분이 요긴하다. 그는 이 농산물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올리기 시작했다.


바르샤바에서 떼돈 벌다

여세를 몰아 그는 지난해 7월17일 홍콩 증권거래소에 어우야농산물회사를 상장시켜 6억달러라는 자본금을 모았다. 양빈은 이 회사의 주식 가운데 70%를 소유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최대 갑부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포브스’(Forbes)지는 그의 개인재산을 9억달러라고 평가했고, 2001년 현재 중국 본토에서 두번째 부자라고 소개했다. 그의 회사인 어우야회사는 지난 5월 홍콩 주식시장에서 주당 2.80홍콩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이 회사의 주당 가격은 1.48홍콩달러였으니 두 배나 뛴 셈이다.

승승장구하던 양빈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거점을 중국 북동부 랴오닝성 선양시로 옮겼다. 그는 선양에서 1억5,000만위안으로 땅 220㏊(여의도의 3분의 2 크기)를 사들여 허란춘(荷蘭村·네덜란드 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랴오닝성이 모범사업지구로 선정한 성(省) 10대 중점사업의 하나. 그는 이곳에 하이테크 농업 시설을 짓고 총 8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농업시설로 허가받고는 이곳에 고층 아파트단지와 빌라·테마파크 같은 휴양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애초 약속했던 농업단지는 이 허란춘에서 10%도 차지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농업시설을 짓겠다고 싸게 토지를 사서 아파트와 놀이시설을 지어 비싸게 팔아먹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그는 당시 이 과정에서 전 선양시장 무쑤이신(慕綏新)과 전 부시장 마샹둥(馬向東)에게 로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빈의 사업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는 허란춘에 아파트 66동과 빌라 180채를 짓고 삼성의 에버랜드 같은 테마파크를 만들었는데 공사 규모가 너무 크고 아파트와 빌라가 생각대로 분양되지 않아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허란춘은 공사를 하다 중단된 상태다. 외장 공사는 끝냈으나 실내장식은 손을 대지 못했다. 돈을 주지 못해 인부들이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아파트도 매물로 내놓았으나 선양 도심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어 찾는 발길이 거의 없다.

두번째 불행은 그의 후원자가 체포된 사건이었다. 중국에서는 사업을 크게 벌이는 이들은 관료와 ‘콴시’(關系)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양빈의 후원자는 전 선양시장 무쑤이신과 전 부시장 마샹둥이었다. 2000년에 이들이 독직부패사건으로 체포되어 부시장 마샹둥은 지난해에 처형당하고 무쑤이신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폐암을 앓고 있어 집행이 연기된 상태다. 중국 당국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두 인물과 관련된 사람들을 수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양빈의 이름이 나왔다.


중국 공산당 최대 부패사건 ‘무·마 스캔들’

문제는 이 ‘무·마 스캔들’에 대한 조사를 주룽지(朱鎔其) 총리가 직접 이끌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의 부패 추방과 관련해 주총리가 언급한 유명한 발언이 있다.

“나는 관 100개를 짜 놓았다. 그 중 99개는 부패공직자가 들어갈 관이고, 마지막 하나는 내가 들어갈 관이다.”부패사범에 대한 주총리의 결의는 이처럼 단호했다. 더구나 양빈은 근거지 랴오닝성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많았으나 중앙정부에는 이렇다할 ‘콴시’를 만들어 놓은 사람이 없었다.

주총리는 또 반부패운동을 벌이면서 중국의 최대 부호 10명을 집중 내사했는데, 10명 모두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났다. 양빈의 이름도 당연히 이 명단에 들어 있었다. 이렇게 세금포탈 혐의로 조사받고 있을 때 양빈은 신의주특구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양빈이 신의주특구 장관이 된 뒤 관련 사실을 서둘러 발표하고,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는데도 미리 후속 조치를 내놓은 데는 이런 뒷 배경이 숨어 있었다. 그는 신의주특구 장관으로 정식 취임만 하면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나아가 탈세 혐의에 따른 처벌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또 그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으로 자신의 기업을 살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홍콩 현지에서 어우야그룹의 미래와 관련해 여러 가지 나쁜 소문이 일자 “기업인으로서 나는 어우야그룹 회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주식 투자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불가피하다면 일시 사임할 생각은 있다”고도 밝혔다. 그는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북한에 온실 10만개를 새로 지어 채소를 생산해 러시아와 일본으로 수출할 것이고, 어우야그룹이 이 업무를 맡아 높은 수익을 올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빈이 중국 당국에 쫓기면서 그토록 목을 맨 김정일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 계기는 꽃이었다. 양빈에게 날개를 달아준 네덜란드는 세계 최대의 화훼 수입국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양빈은 대만과 중국에서 난초를 키워 약품처리해 배에 실어 네덜란드로 수출했다. 이 사업은 크게 성공하여 그에게는 ‘난초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화훼사업을 하면서 그는 우연한 기회에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묘에 꽃을 납품하게 되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500만달러 분량의 꽃을 만수대에 공짜로 심어 주었다고 한다. 양빈과 김정일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만수대에 꽃 500만달러어치 선물해 김정일과 인연

김정일은 곧 만수대에 엄청난 꽃을 선물한 양빈의 배경을 조사했다. 조사한 결과 그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랴오닝성 사람이고, 화훼를 네덜란드로 수출해 거금을 모았으며, 씀씀이가 크고 중국에서 거부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정일은 그를 자주 불러 술도 마시면서 친분을 맺었는데, 김정일은 1942년생이고 양빈은 1962년생인 탓에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양빈의 처신도 많이 작용했다. 그는 평양에 갈 때마다 비행기를 대절해 갔고, 돈을 크게 쓰면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도 두 사람은 함께 있었고,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양빈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북한에 채소를 키우는 온실과 재배기술을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양빈 회장은 북한 당국에 2,000만달러 가량의 비공식 원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 보도에 따르면 양빈은 지난해 초 북한의 농업현황을 시찰했을 때 겨울에 농산물과 식량이 크게 부족한 것을 목격하고 북한의 농업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자사 직원들을 북한에 파견하고 무상으로 자금으로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가 갑자기 거물로 뜬 데는 미디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양빈은 막강한 재력으로 파격적인 행동을 자주 했고, 특히 그런 행동으로 언론플레이를 잘 했다. 앞서 말했듯 예고 없이 전세 비행기를 홍콩으로 보내 기자들을 태워 평양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가 아니면 발상조차 힘든 돌출행동이다. 그러나 초창기 거품이 빠지고 언론의 검증을 받으면서 양빈은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지는 그와 랴오닝 성장 보시라이 사이의 스캔들을 폭로했다. 랴오닝 성장 보시라이가 양빈의 불법 대출을 알선했다는 것이다. 이런 스캔들이 터지기 시작하자, 금융전문가들도 양빈에게 일침을 가하기 시작했다. UBS Warburg의 조우 장 애널리스트는 어우야그룹의 재정능력이 의심스럽다고 분석했다. 이런 와중에 그는 신의주 카드를 던진 것이다.  

고아에서 중국의 두번째 부호로,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에서 11일만에 범죄자로 곤두박질한 양빈. 중국과 북한은 당과 정부 등 각종 대화 채널을 통한 협의 끝에 양빈 장관 사건을 조기에 해결하기로 10월10일 합의했다고 중국 소식통들이 말했다.

양장관의 거취 문제는 유임후 적절한 시기에 사임하거나 조만간 사임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중국은 양빈을 국외로 추방하는 방안을 선호하고 있으나 전통 우방인 북한을 배려해 형식상으로 양장관의 자진출국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그는 즉흥적인 김정일과 냉혹한 중국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받는 카드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사기꾼인가, 자수성가한 위대한 사업가인가. 그의 성공과 실패는 앞으로의 논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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