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전체가 무너집니다.”
1983년 2월 이런 보고를 받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탁자 위엔 ‘기술도 없는 조그만 기업이 경영자의 욕심 때문에 무모한 사업을 시작했다’는 투자자들의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고심하던 이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됐다. 누가 뭐래도 밀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선포해라.” 이 회장의 나이 73세였다. 그 다음달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반도체 신화’의 시작이었다.
삼성은 그해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예상보다 3년이나 앞당겼다. 하지만 84년부터 이어진 D램 가격의 폭락으로 4년간 1400억원의 누적적자가 발생했다. 이 회장은 87년 또다시 제3라인 증설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반도체 사업이 삼성을 뒤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다시 쏟아졌지만 이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사용이 활성화되면서 이 회장이 작고(87년 11월)한 이듬해 삼성은 단번에 누적적자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92년에는 64메가D램으로 이 분야 1위로 등극해 256메가D램(94년), 1기가D램(96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기술 격차를 벌려 나갔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 기업들은 D램 세계점유율 67.8%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손욱(70)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원 센터장은 “국가의 미래와 기업의 미래를 동일시한 사명감 때문에 기업의 명운을 건 도전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승부수는 유명하다. 71년 9월 현대중공업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위해 세계적 선박컨설턴트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준 장면이 압권이다.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말로 추천서를 받아냈다.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주고 계약금에 이자까지 주겠다”는 자신감으로 아직 건설되지도 않은 조선소의 유조선을 두 척이나 팔았다. 이렇게 74년 탄생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는 국내 중공업 분야의 서막을 알렸다. 국내 조선소들은 세계 건조량의 34.5%를 차지하며 1위에 올라 있다.
세계 자동차 생산 5위국이라는 위상은 강력한 기술 독립의 의지로 시작됐다. 67년 12월 탄생한 현대차는 포드와 계약을 맺고 조립차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국산차 개발팀 대리였던 이충구(70) 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장에 따르면 정 회장은 “너희가 무슨 메이드 인 코리아 차를…”이라며 깔보던 포드와는 아예 결별해 버렸다. 이 갈라섬이 계기가 돼 76년 첫 국산 고유 모델차 포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정 회장의 “해 봤어?” 정신이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초창기부터 현대차가 사용하던 일본 미쓰비시의 새턴과 오리온 엔진은 91년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로 개발한 알파 엔진으로 대체됐다. 2004년에는 독일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미쓰비시에 기술을 이전하고 로열티를 받는 쾌거도 이뤘다.
죽음까지 불사한 비장한 각오로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생산해 국가에 기여한다) 정신을 강조한 고 박태준 포스코(옛 포항제철) 회장의 결의는 대단했다. 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후 73년 6월 첫 쇳물을 생산할 때까지 박 회장은 ‘우향우 정신’을 외쳤다. “실패하면 현장사무소에서 나가 바로 우향우해서 다같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 73년 우리나라 최초로 조강 103만t의 1기 설비가 준공된 이래 네 번의 확장사업을 통해 83년 조강 910만t 체제의 포항제철소가 완공됐다. 이후 광양제철소가 추가로 건설되며 포스코는 지난해 연간 조강생산 3770만t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철강기업이 됐다. 현재 한국은 연간 조강생산량 7100만t으로 세계 5위에 랭크돼 있다.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은 생전 “남이 미처 안 한 것 중 국민에게 필요한 걸 시작하자”고 임직원을 독려했다. 59년 금성사를 세우고 그해 탄생시킨 국산 라디오 1호 ‘A-501’은 구 회장 기업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라디오는 고도의 기술이니 힘들다”는 보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생산에 들어간 라디오가 좀처럼 팔리지 않았지만 5000대를 무료로 농어촌에 보내는 과감한 결정으로 활로를 뚫어 라디오방송 시대까지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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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신(66)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돈만 벌자고 생각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라며 “경영자의 강한 보국 의지에 직원 모두가 공감해 산업화시대의 열정이 나왔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황의영·김기환·임지수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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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이런 보고를 받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탁자 위엔 ‘기술도 없는 조그만 기업이 경영자의 욕심 때문에 무모한 사업을 시작했다’는 투자자들의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고심하던 이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됐다. 누가 뭐래도 밀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선포해라.” 이 회장의 나이 73세였다. 그 다음달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반도체 신화’의 시작이었다.
삼성은 그해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예상보다 3년이나 앞당겼다. 하지만 84년부터 이어진 D램 가격의 폭락으로 4년간 1400억원의 누적적자가 발생했다. 이 회장은 87년 또다시 제3라인 증설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반도체 사업이 삼성을 뒤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다시 쏟아졌지만 이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사용이 활성화되면서 이 회장이 작고(87년 11월)한 이듬해 삼성은 단번에 누적적자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92년에는 64메가D램으로 이 분야 1위로 등극해 256메가D램(94년), 1기가D램(96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기술 격차를 벌려 나갔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 기업들은 D램 세계점유율 67.8%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손욱(70)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원 센터장은 “국가의 미래와 기업의 미래를 동일시한 사명감 때문에 기업의 명운을 건 도전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승부수는 유명하다. 71년 9월 현대중공업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위해 세계적 선박컨설턴트사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준 장면이 압권이다.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말로 추천서를 받아냈다.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주고 계약금에 이자까지 주겠다”는 자신감으로 아직 건설되지도 않은 조선소의 유조선을 두 척이나 팔았다. 이렇게 74년 탄생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는 국내 중공업 분야의 서막을 알렸다. 국내 조선소들은 세계 건조량의 34.5%를 차지하며 1위에 올라 있다.
세계 자동차 생산 5위국이라는 위상은 강력한 기술 독립의 의지로 시작됐다. 67년 12월 탄생한 현대차는 포드와 계약을 맺고 조립차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국산차 개발팀 대리였던 이충구(70) 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장에 따르면 정 회장은 “너희가 무슨 메이드 인 코리아 차를…”이라며 깔보던 포드와는 아예 결별해 버렸다. 이 갈라섬이 계기가 돼 76년 첫 국산 고유 모델차 포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정 회장의 “해 봤어?” 정신이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초창기부터 현대차가 사용하던 일본 미쓰비시의 새턴과 오리온 엔진은 91년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로 개발한 알파 엔진으로 대체됐다. 2004년에는 독일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미쓰비시에 기술을 이전하고 로열티를 받는 쾌거도 이뤘다.
죽음까지 불사한 비장한 각오로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생산해 국가에 기여한다) 정신을 강조한 고 박태준 포스코(옛 포항제철) 회장의 결의는 대단했다. 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후 73년 6월 첫 쇳물을 생산할 때까지 박 회장은 ‘우향우 정신’을 외쳤다. “실패하면 현장사무소에서 나가 바로 우향우해서 다같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 73년 우리나라 최초로 조강 103만t의 1기 설비가 준공된 이래 네 번의 확장사업을 통해 83년 조강 910만t 체제의 포항제철소가 완공됐다. 이후 광양제철소가 추가로 건설되며 포스코는 지난해 연간 조강생산 3770만t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철강기업이 됐다. 현재 한국은 연간 조강생산량 7100만t으로 세계 5위에 랭크돼 있다.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은 생전 “남이 미처 안 한 것 중 국민에게 필요한 걸 시작하자”고 임직원을 독려했다. 59년 금성사를 세우고 그해 탄생시킨 국산 라디오 1호 ‘A-501’은 구 회장 기업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라디오는 고도의 기술이니 힘들다”는 보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생산에 들어간 라디오가 좀처럼 팔리지 않았지만 5000대를 무료로 농어촌에 보내는 과감한 결정으로 활로를 뚫어 라디오방송 시대까지 꽃피웠다.

권태신(66)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돈만 벌자고 생각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라며 “경영자의 강한 보국 의지에 직원 모두가 공감해 산업화시대의 열정이 나왔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황의영·김기환·임지수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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