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담양-화순에 이름난 정자(亭子)가 많습니다. 이곳이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後學)을 교육하던 장(場)입니다. 이름을 열거해봅니다.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송강정(松江亭)-면앙정(俛仰亭)-취가정(醉歌亭)…. 범위를 전라남북도로 넓히면 그 수가 100개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양-화순의 정자에는 꼭 이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고있지요.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대문호(大文豪)로 자타가 공인하고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선생입니다.
- 무등산 자락 화순-담양에는 수많은 정자가 산재해있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있다.
- 식영정은 특이하게도 지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인지 여름에도 곰팡이가 없고 눅눅하지도 않다.
- 서하당은 황혼 무렵에 비치는 석양이 안개처럼 깃든다는 뜻이다.
- 식영정의 마루와 기둥을 보면 우리의 멋을 알 수 있다.
- 식영정 마루에서 본 천장의 모습이다. 한옥은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 식영정 마루에 누우면 여름이 느껴지지않는다. 한 커플이 마루에 누워있다.
- 식영정 뒤에는 성산별곡이 새겨져있다. 정철이 이곳에서 지은 가사문학의 대표작이다.
식영정 맞은 편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지은 정자로, 환벽은 ‘푸르름이 고리를 이루듯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는 김윤제와 정철의 인연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 환벽당의 내부다. 어린 정철은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고 중앙 관계로 진출했다.
- 환벽당을 앞에서보면 원형과 사각형이 교차하는 묘한 모습이 된다.
- 환벽당에서는 영산강 지류가 내려다보인다. 사촌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 용이 멱을 감는 꿈을 꿨는데 놀라 밑으로 내려가보니 어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 송강정은 벼슬을 지내던 정철이 낙향해 머물던 곳이다.
- 송강정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으나 후손들이 바꿨다.
-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한 곳이다.
- 취가정은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지었다는 사연이 있다.
- 의병장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취가정.
- 면앙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외진 곳에 있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 면앙정은 원래 초당이었으나 훗날 지금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 호남학파의 비조라 할 면앙정. 면앙은 송순의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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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마저 칭찬한 송강 정철의 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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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 편집국 선임기자
- E-mail : gsmoon@chosun.com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上편에서 계속>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의 딸로, 아버지는 늘 “내 딸의 효행(孝行)은 열 명의 아들에 못지않다”고 자랑했습니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윤십이월 6일에 수도 한양(漢陽)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그가 열 살 되던 해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 남방행(南方行)이 정철에게는 절묘한 기회가 되니 인생의 깊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서 전한 설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김윤제 선생은 그를 데려다 공부를 시켰고 대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에게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훗날 그의 친구가 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대학자로 명망 높았습니다.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의 딸로, 아버지는 늘 “내 딸의 효행(孝行)은 열 명의 아들에 못지않다”고 자랑했습니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윤십이월 6일에 수도 한양(漢陽)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그가 열 살 되던 해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 남방행(南方行)이 정철에게는 절묘한 기회가 되니 인생의 깊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서 전한 설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김윤제 선생은 그를 데려다 공부를 시켰고 대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에게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훗날 그의 친구가 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대학자로 명망 높았습니다.
- 고봉 기대승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면앙 송순을 위해 지은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수석(水石)이 멋진 곳에서 누군가 ‘세상에 이 수석과 비길 만한 청절(淸絶)한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고봉은 ‘오직 정철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지요. 훗날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중봉(重峯) 조헌은 ‘송강은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전라도의 정수(精髓)를 이어받은 그는 1561년(명종 16년) 사마시(司馬試)에 상유(上游)로 합격했고 이듬해 장원(壯元)급제합니다. 사화에 연루된 집안 출신이어서 곧 벼슬을 하진 못했지만 1566년, 헌납(獻納)ㆍ지평(持平)에 발탁됩니다.
- 식영정 마루에 가득찬 외국인들. 아마 이런 건물을 처음 봤을 것이다.
1577년 다시 한양으로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지만 이때 이발(李潑)과 사이가 나빠져, 훗날 대사간(大司諫)이 됐을 때는 “사당(邪黨)을 만들었다”는 상소 때문에 사직합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율곡은 이때 그를 변호하는 소(疏)를 올렸습니다. “정철은 충청 강개(忠淸剛介)하고 한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므로 그 기절(氣節)은 실로 한 마리 독수리에 견줄 만한데 도리어 사당이란 명목을 붙여 조정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 때문에 율곡까지 탄핵을 당하고 맙니다.
- 명옥헌 옆 베어낸 나무 위로 떨어진 꽃잎. 마치 윤회를 보는 것같다.
“정철은 마음이 바르고 행동이 방정(方正)하나, 다만 그 혀가 곧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직책에 있으면서 죽도록 힘을 다한 충청 절의(忠淸節義)는 초목(草木)까지도 알 것이니, 참으로 원반(鵷班)의 한 마리 독수리요, 전상(殿上)의 사나운 호랑이인 셈이다. 전날 바른말로 간사한 무리를 지탄하기에 내가 이미 오늘날 이런 훼방이 있게 될 줄을 짐작하였다. 만약 정철을 죄준다면 이는 주운(朱雲ㆍ후한 때의 직신(直臣))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송강이 전라도와 척을 진 것은 기축옥사 때문입니다. 1589년 10월2일 선조에게 전달된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로 인해 시작된 사화는 4대 사화 중 가장 많은 1000여명의 피해자를 낳았으며 동인ㆍ서인은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지요.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ㆍ1546~1589)은 이이-성혼을 따르던 서인인데 당시 집권 동인에 아부하고 스승 율곡이 죽자 그를 배반한 인물로 기록됐습니다. 선조는 그가 성혼을 비판하자 불쾌해 생각했고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지요.
- 식영정 올라가는 계단마다 이끼가 껴있다.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했다.
이런 움직임이 황해관찰사 한준, 신천군수 한응인,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에 의해 잇따라 선조에게 전해지자 관군이 출동하지요. 결국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에서 자살합니다. 정여립의 난을 두고는 아직도 말이 많습니다. 일례로 조선일보 이한우 부장은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책에서 정여립의 난을 이렇게 봅니다. 즉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 18척의 왜적이 상륙해 노략질을 벌이자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조선 수군 100여명이 오히려 왜구의 포로가 돼지요.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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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싸움 희생양 된 정여립의 결정적인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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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 편집국 선임기자
- E-mail : gsmoon@chosun.com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中편에서 계속>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 명옥헌의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여하간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일 뿐 모반을 꾀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 연루자를 색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희생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시민-이억기-신립-이순신 등을 이끌고 오랑캐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구촌 사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게 대표적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 역시 정여립과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요. 이때 선조는 정철로 하여금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빌미로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 동인 가운데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됐고 전라도 출신 선비들이 대거 희생된 것입니다. 훗날 정철은 ‘동인백정(白丁)’이라는 말이 따라다닐 만큼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런 감정 대립은 오늘날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전라도 인사들이 얼마나 희생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기축옥사 전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입니다. 이것을 보년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는데 기축옥사 이후에는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로 떨어집니다. 결국 기축옥사 후 호남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됐음을 잘 알 수 있지요.
-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축옥사는 책 한권으로 다뤄도 못 미칠 분량이나 이번 편에서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한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같이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길삼봉이라는 이름이 묘하지요. 길은 당시 도둑 수령으로 꼽히던 홍길동의 ‘길’이고 삼봉은 국초 대역죄인의 우두머리로 간주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호입니다. 이 둘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름이니 선조가 공포를 느낄 만도 했겠습니다. 결국 선조는 팔도에 길삼봉을 잡으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그의 생김새를 두고 ‘나이는 60쯤 돼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이고 귀가 크고 얼굴을 여위었다’, ‘나이는 50쯤인데 수염이 길어 배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희고 길다’는 설이 난무한 겁니다.
또한 길삼봉으로 지목된 이가 최영경(崔永慶ㆍ1529~1590)인데 그가 하필 정철과 사이가 나빴던 탓에 ‘정철이 최영경을 죽이려 길삼봉 소문을 냈다’는 말까지 나돌았지요. 실제론 정철이 최영경을 구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매를 맞고 옥사(獄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최영경 역시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전라도 인맥으로 분류되던 이였습니다. 이러니 정철에 대한 전라도의 인심을 날이 갈수록 뜬소문이 눈덩이처럼 악성으로 불어나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구(老軀)를 이끌고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다 선조에게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청하다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되지요. 때는 온 나라가 전쟁으로 엉망일 때였습니다.
-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宮柳青青花亂飛)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滿冠蓋媚城春輝)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誰遺危言出布衣)’
-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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