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의 작심 발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은 핵심기술 이전 확보돼야
안 된 상태에서 추진하면리스크 몹시 크다' 〈보고서〉
"정부 부처마다 다투어 시대착오적 연구개발을
과거에 하던 관행으로 여전히 해오고 있어"
"국방(國防) 부문 사업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국방과학연구소 등에서 이미 다섯 차례나 사업 타당성 조사를 벌였다. 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을 추진하느니 외국에서 사 들여와 쓰는 게 낫다는 분석도 나왔다. 결론이 엇갈리자 방위사업청이 우리에게 평가를 의뢰해왔다."
박영아(55)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을 만난 것은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 논란 때문이다. 세간에는 낯선 이 기관은 정부가 수행하는 연구 개발 사업의 타당성을 최종 평가하는 곳이다.
―당시 어떤 식으로 연구가 진행됐나?
"기술성·경제성, 국가전략적 필요성 관점에서 사업 타당성을 분석해달라는 것이었다. 2013년 4월부터 약 8개월 동안 진행했다. 당시 핵심 기술 협력 및 이전을 해줄 수 있는 해외 사업체가 확정되지 않았을 때다. 우리 기관은 '현재의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개발 사업의 타당성이 확보되지 않았다'고 결론 냈다."
―부정적 결론인데…. 그 연구 결과 보고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
"그 직후 변동이 생겼다. 대상 기종(機種)이 쌍발형 엔진 전투기로 바뀌었고, 인도네시아와 공동 개발한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상황이 바뀌면서 한국국방연구원에서 다시 타당성 조사를 했다. 우리 기관에는 기술성 분석을 맡겼다. 그때도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지만 핵심 기술 이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할 경우 위험부담이 몹시 크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 박영아 원장은 “전문성이 떨어지는 공무원들이 모든 단계에서 일일이 간섭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결국 미국에서 핵심 기술을 못 받는 걸로 확정됐으니, 그 보고서대로라면 사업 추진을 안 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때는 핵심 기술 이전을 전제로 수립된 사업 계획을 평가한 것이다. 지금은 정부가 '독자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전제가 달라졌으니 다시 연구 분석을 해봐야겠지."
―당신 기관의 보고서에는 핵심 기술을 이전받을 수 있느냐에 사업 타당성이 달려 있다고 했다. 이는 '독자 개발'은 타당성이 없다는 뜻이 되지 않나?
"추가적 분석 없이 현 시점에서 내가 답변하기 어렵다. 독자 개발을 위한 구체적 전략과 비용 조달 계획 등을 세운 뒤 타당성 분석을 해봐야 할 것이다."
―설령 핵심 기술을 자체 개발할 경우에도 전투기의 다른 부품·장비와 호환(互換)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직 기술 개발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평가 결과에 따라 연구 개발 사업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예비 타당성 평가는 사업 착수 여부를 정하는 것이다. 이 시험대를 통과해야 사업 예산이 책정된다."
―정부 개발 연구 사업 전체의 통과율은?
"사전에 행하는 '기술성' 분석까지 합치면 대략 30% 선이다. 일례로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활동이 한창 뉴스가 됐을 때, 해양수산부에서 '지속 가능한 수산자원 관리 및 이용 기술 개발 사업'을 올렸다. 하지만 성과 목표가 미흡하고 국립수산과학원의 고유 기능과 중복돼 보류시켰다. 이미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해서는 중간 평가를 한다. '우수' 이상 등급 사업은 예산을 증액하고, '미흡' 등급은 감액이 원칙이다."
―해당 부처나 국회를 통해 로비가 들어오지 않나?
"다소 부탁이 들어온다. 우리 기관은 나름대로 공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 해당 부처에서는 보충 및 소명 자료를 내 다시 평가받기도 한다."
―1년에 평가할 사업이 얼마나 되나?
"100여개 된다. 올해 이런 연구 개발 사업의 전체 예산은 2조7201억원이다. 작년에는 5조3875억원이었다."
―정부가 이렇게 연구 개발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니 놀랍다.
"과거에는 산업부와 과학기술부에서만 연구 개발 사업을 해왔다. 지금은 정부 부처마다 다투어 연구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유행(流行) 비슷하다. 아마 법무부 빼고는 다 할 것이다. 사무관이 책상에 앉아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업도 기안해 올린다. 황당한 게 많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나?
"연구 개발 사업을 얼마나 하느냐를 해당 부처의 실적(實績)처럼 여긴다. 15개 부처에서 18개 연구 관리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기관들끼리 연계나 업무 협조가 잘될 리 없다. 관리 규정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니 부처마다 유사·중복 정부 사업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쪽 부처의 사업에 손을 들어주고, 중복된다고 다른 부처를 탈락시키기란 쉽지 않다."
―당신 기관에서 걸러주면 되지 않나?
"물론 그렇게 하지만 한계가 있다. 우리의 직무는 독립적이지만 정부 부처 산하기관이다. 압박을 안 받을 수 없다. 정부 부처보다 상위 기구에서 국가 전체를 보고 연구 개발 사업을 조정해야 한다."
―우리의 정부 연구 개발 사업에는 어떤 트렌드(trend)가 있나?
"우리는 경제성장이나 산업 기술 개발과 관련된 사업이 절반 넘는다. 반면 미국·영국·독일·일본 등은 경제성장 목적보다는 보건·환경·교육에 대한 투자가 많다."
―내가 보기에는 자연스러운데, 그걸 문제로 인식하나?
"복지·환경·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공재로서 역할이 더 필요하다. 중요하게 대두하는 우리 사회의 의제(議題)에 과연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정부 역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20년 전부터 나왔지만 늘 과거에 하던 식 그대로다."
―아직 경제성장을 더 해야 하는 형편에서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문제는 우리 정부 사업이 경제성장에 치중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정부가 경제를 견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민간과 경쟁하거나 중복 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정부가 자동차·조선·반도체 등에 투자해 민간을 선도해왔다. 이제는 세월이 바뀌었다."
―아직은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굴러가지 않을까?
"한정된 예산에서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은 민간이 하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데를 찾아야 한다. 1970·80년대식으로 공무원이 민간을 이끌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산업 기술 개발 등에서 민간과 정부의 투자 규모는 7대3쯤 된다. 이미 민간이 정부를 앞서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부문에서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은 투자한 만큼 별로 효력이 없다."
―현 정부로서는 '신(新)성장 동력'을 찾아 경제를 되살려보겠다는 절박함이 있다.
"여전히 산업화 시대에 머무른, 시대착오적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해오던 관행으로 투자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국가 전략을 위한 미래 기술에 집중하지 못하고, 게다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위 '신성장 동력'도 바뀐다."
―'신성장 동력'이 바뀐다고?
"가령 이명박 정권에서는 '녹색 기술'이라는 것에 투자했다가 정권이 바뀌면 그만두고 또 다른 걸 한다. 역대 정권마다 이런 식으로 반복돼왔다. 제도적으로도 밑에서 올라오는 창의적 연구에 대한 장기 집중 투자는 어렵게 돼있다."
―제도적으로도 어렵다는 뜻은 뭔가?
"정부가 투자하는 연구 개발 사업은 길어봐야 3년 단위다. 기간을 연장해 같은 주제로 계속 연구하면 지원이 끊긴다. 노벨상 발표 때마다 나오는, 한 우물을 몇 십 년 판다는 게 우리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 사업은 1년 안에 답이 나오는 것을 주로 하게 된다."
―남의 일처럼 비판할 게 아니라, 당신 기관에서 이런 철학으로 사업 평가를 하면 되지 않는가?
"사업 평가 항목과 점수가 다 짜여 있다. 틀에 박힌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어길 경우 감사(監査)를 받거나 시달린다. 정부 공무원들의 간섭과 개입이 너무 심하다. 공무원들은 전문성이 떨어지면서 모든 단계에서 일일이 컨트롤하려고 한다. 미국과 독일은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대원칙이다."
―담당 공무원들은 엘리트인데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말에 동의하겠는가?
"잦은 정부 조직 개편과 보직 이동으로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성이 크게 떨어진다. 나는 공무원 숫자가 불필요하게 많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은 뭔가 일을 해야 하니까 규제하고 간섭할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다."
―공무원으로서는 관리 책임 역할도 있지 않은가?
"우리 기관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다. 그런데 우리 연구원 1명당 정부 공무원 2명을 지원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당 공무원에게 보고하고 부처에 들어가 회의해야 한다. 시간 낭비와 비효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욱이 정부 공무원이 산하기관에 업무를 위탁해놓고 그 성과는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일이 다반사다. 심각한 연구 윤리 위반이 아닌가."
―실제 그런 일을 경험했나?
"일례로 우리 기관에서 올해 광복 70년을 맞아 '과학기술 성과 70선(選)'이라는 자료집을 만들었다. 미래부의 해당 국(局) 에서 보도 자료를 내고 기자 브리핑을 했다. 우리 기관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아마 다른 데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공무원들의 존재 이유가 궁금할 때가 많다. 지금은 창의와 혁신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그러려면 정부부터 혁신해야 한다. 현재의 공무원 마인드로는 백날 해봐야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형 전투기 사업'으로 시작했는데, 인터뷰는 예정되지 않은 길로 갔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영아 원장은?
1979년 예비고사 여학생 전체 수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 석·박사, 명지대 교수, 18대 국회의원. 현 정권에서 지금 직책을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