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임진왜란

임진전쟁의 역사, 나고야성 박물관에서 만나다.

화이트보스 2016. 1. 20. 10:29



임진전쟁의 역사, 나고야성 박물관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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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라 이웃추가 | 2016.01.06.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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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우리나라 역사문화탐방 3>

임진전쟁의 역사, 나고야성 박물관에서 만나다.


2015년 12월, 문화재환수국제연대탐방단은 나고야성 박물관을 찾았다.
사가현 가라츠에 있는 나고야성은 임진전쟁 당시 왜병들이 총 집결, 출병한 곳이다. 성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바다(灣)는 섬 깊숙이 파고 들어와 당시 22여만 대군을 숨겨 놓아도 들킬 염려가 없는 천혜의 요새이다.

<임진전쟁 당시 왜군의 집결 모습>

1592년 4월 13일시작하여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 벌어진 왜군의 의한 조선 침략 전쟁은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 조선군은 17만5천명, 명나라 원군 10만 명이고 여기에 전국 각지에 일어난 의병까지 합치면 수십만 명이 전쟁에 참여한 반면, 왜군은 1차 임진전쟁 당시 최정예군 22만 명과 2차 정유전쟁 시에는 14만 명이 참전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어 조선군이 약 7만 명이 전사하였고, 명나라군은 약 3만 명 그리고 왜군은 14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사상자는 약 15만 명이라 하고 인질로 잡혀 간 수가 10만 명에 이른다 한다. 이는 당시 조선인구 수가 1천3백만 명 정도로 전쟁 후 인구가 1/10 이상이 줄었다 하니 그 피해 규모가 얼마인 지 상상할 수 없다.


<당시 전투도>


이 뿐 아니라 고려청자, 고려불화, 나전경합, 세종대왕 측우기 등 10만 여점 이상의 유물이 약탈당하였고, 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에  『종군문서참모부』는 문서 약탈만을 목적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활동 한 바, 이들은 문서를 감정하고 주요 문서 보관장소를 집중적으로 약탈하여 당시 수십만 권의 문서가 약탈당하였다. 당시 『종군문서참모부』로 참여한 교토의 상국사에는 지금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등 1,965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가가미 신사(鏡神社)가 보관하고 있는 고려 불화 ‘양류관음상’을 복제하여 전시하여 놓은 것은 세계적인 진품을 아끼는 마음이라 생각하여 이해하려 했으나, 아래 적혀 있는 설명문을 보니 의심이 부쩍 든다.
안내문을 줄여 말하면 “고려 왕실 화원에서 제작되어 곧바로 일본에 전해져 1391년 신사에 봉납되었다” ??
가로 419.4cm 세로 254.2cm이나 되는 대작을 안내대로 하면 일본에 전해주기 위하여 제작한 것처럼 이해되는 데 사실일까? 자주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 현존하는 약 160여점의 고려불화 중 제작국인 한국에는 10여점만 있고 미국과 유럽에 20여점, 대다수는 130여점이 일본에 있다는 이 기형적인 현황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예술품인 고려불화는 약탈꾼들에게는 최우선의 품목이었을 것이고 임진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으로 그리고 일본 장사꾼들에 의해 유럽과 미국으로 팔려갔을 것이다. 고려불화를 그토록 소중히 아끼고 계승하고자 했다면 왜 일본인 중에는 세계적인 고려불화 계승자가 없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충무 충렬사 팔사품-복제>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무엇보다 임진전쟁과 관련된 유물이나 기록물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명조 팔사품과 도독인함등이 복제되어 있고, 거북선 모형과 이순신 장군 초상화 등도 있다.

수장고에 수많은 유물과 기록 등을 수집하여 놓았다 하니, 일본인에게 임진전쟁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베 노부유키 말과 겹쳐 뇌리를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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