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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을 버텨낸 7년의 사랑

화이트보스 2016. 5. 31. 17:20



60년을 버텨낸 '7년의 사랑'

입력 : 2016.05.31 03:00 | 수정 : 2016.05.31 15:41

[이중섭 탄생 100주년展에 부치는 95세 아내 야마모토의 편지]

"꿈속 당신은 서른 그대로인데 나는 이렇게 늙어 버렸네요…
6·25피란때 畵具부터 챙긴 당신
다시 태어나도 함께할 거예요… 우린 운명이니까
폭격 뚫고 간 서울 반도호텔…
삶은 계란과 사과를 들고 당신도 원산에서 달려왔죠
꿀 같은 사과맛, 따스한 품… 70년 지나도 생생하답니다"

- 도쿄서 처음 본 당신은
운동·노래·詩 잘하는 팔방미인… '천재'였지만 뻐기는 법 없었죠

- 신혼과 전쟁
원산 신혼생활은 축복이었어요
하지만 6·25 터지고 원산서 부산, 부산서 서귀포로 걷고 또 걸었죠

- 1953년, 도쿄서 마지막 만남
당신이 선원증 구해 日 왔을때 세상 다 가진 듯 기뻤지요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면 가족사진이라도 남기는 건데…

이중섭이 간직했던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사진(왼쪽)과 젊은 날의 이중섭 사진
이중섭이 간직했던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사진(왼쪽)과 젊은 날의 이중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사흘 뒤 드디어 덕수궁에 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과 조선일보사 주최로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다. 이중섭과 7년간 살 맞대고 살며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95·한국명 이남덕) 여사를 도쿄 세타가야(世田谷)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이중섭과의 사랑을 버팀목 삼아 두 아들을 홀로 키워내며 60년을 버텼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사가 남편 이중섭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아고리!(일본어로 턱을 뜻하는 '아고'와 이중섭의 성 '李'를 합친 말로 턱이 긴 이중섭의 애칭.)

당신이 태어난 지 100년, 세상과 이별한 지 60년 되었어요. 시간 참 빨리도 흘러요, 그렇죠? 요즘도 꿈에 가끔 당신이 나와요. 태현(장남), 태성(차남)이하고 아이처럼 장난치고 그림 그리는 당신이. 꿈속 당신 시계는 멈췄는지 서른 얼굴 그대로인데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네요.

한국에선 당신 그림들이 덕수궁에 모여 관람객을 맞는다지요.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당신 그림을 알아볼 거란 내 믿음은 옳았어요. 그래도 초등학생까지 다 아는 '국민화가'가 되리라곤 상상 못했지요. 이토록 기쁠 수가요. 당신이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시 열리는 덕수궁이 1945년 내가 현해탄 건너 천신만고 끝에 당신과 재회한 반도호텔(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호텔) 근처라네요. 기억나세요? 원산으로 돌아간 당신을 2년 넘게 기다리던 내게 다급하게 보냈던 전보를. 집안에서 결혼 승낙받았다고 빨리 오라 했지요. 백방으로 수소문해 친정아버지(전 미쓰이창고주식회사 대표)가 배표를 구해주셨어요. 아고리가 우리 집에 처음 인사 왔을 때 "조선 사람인 건 상관없는데 화가라 식구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겠나" 걱정했던 그 아버지께서요. 무작정 시모노세키로 갔지요. 이틀치 끼니 때울 쌀만 들고. 그런데 기뢰(機雷)가 폭발해 시모노세키 배편이 끊어져 며칠을 기다리다 하카다에서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죠.

 

아내가 너무 보고싶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부부’ - “이 세상에 나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미친 듯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끝도 없이 상냥한 나의 아름다운 천사여!” 이중섭에게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영감의 원천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다. 재회를 꿈꾸며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담뱃갑 속 은박지에 긁어 그린 은지화(銀紙畵)‘부부’(1950년대 작).
아내가 너무 보고싶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부부’ - “이 세상에 나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미친 듯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끝도 없이 상냥한 나의 아름다운 천사여!” 이중섭에게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영감의 원천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다. 재회를 꿈꾸며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담뱃갑 속 은박지에 긁어 그린 은지화(銀紙畵)‘부부’(1950년대 작).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공습으로 머리 위로 시커멓게 떨어지는 폭탄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토록 그리던 아고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났을까요. 그거 알아요? '문화학원'에 나와 이름 똑같은 학생이 하나 더 있었던걸. 나중에 친구들이 전쟁통에 아고리 만나러 간 마사코가 자그맣고 조용했던 나였단 사실을 알고 다들 놀랐다지요. 부산에서 다시 기차 타고 서울 반도호텔에 도착해 당신에게 전화 걸었어요. 한달음에 원산에서 달려온 당신의 커다란 손엔 삶은 계란과 사과가 한가득이었어요. 꿀 같은 사과 맛, 아고리의 따스한 품. 70년이 넘어도 생생하답니다.


아고리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요. 1939년 문화학원 미술과에 함께 다닐 때 2층 우리 교실에서 당신이 배구하던 모습을 봤어요. 서른 살 만학도 이케다가 "저 사람 훤칠하니 잘생겼구먼" 하기에 곁눈으로 봤지요. 무리엔 조선 유학생 이(李)씨 셋이 있었어요. 턱이 긴 아고리, 키 작은 '지비리(일본어로 꼬맹이를 뜻하는 '지비'와 李'를 합친 말)', 머리에 포마드 잔뜩 발랐던 '데카리(번쩍인다는 '데카데카'와 李'를 합친 말)'…. 하늘나라에서도 이씨 셋이서 배구하나요? 얼마 뒤 팔레트 씻으러 수도에 갔다가 당신과 마주쳤죠.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 석 자를 알려줬어요. 아고리는 운동도, 노래도, 시도 잘하는 팔방미인이었어요. 모두들 '천재'라고 했지만 뻐기는 법이 없었지요.

지주 집안 부잣집 도련님답게 당신은 마음 넉넉한 이었어요. 낭만 넘치는 괴짜이기도 했지요. 유학 시절 기치조지(吉祥寺)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 살 때 하숙방 한가운데에 난(蘭)을 두고 키웠던 기억이 나네요. 온갖 화구 뒤죽박죽 뒹구는 좁은 방에서 당시로선 고가 식물이었던 난초를 고이 키웠어요. 망중한(忙中閑)의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어요. 소설은 싫다 했지만 시는 좋아했지요. 문학소녀였던 내게 보들레르, 릴케 시를 멋들어지게 써서 편지 보내곤 했지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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