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銃砲 전문가로 거듭나 임진왜란의 '준비된 장군' 되다 송우혜

화이트보스 2017. 3. 22. 11:18


銃砲 전문가로 거듭나 임진왜란의 '준비된 장군' 되다

  • 송우혜 소설가

입력 : 2017.03.22 03:06

[이순신 리더십] [12] 

함경도에 세 차례 근무하며 맡은 일을 자기 계발에 활용 
말단 무관으로 국경 방어 익히고 둔전 경영 요령도 크게 깨우쳐 
총포로 여진족 토벌 경험까지… '준비된 장수'로 임진왜란 맞아

송우혜 소설가
송우혜 소설가
함경도는 도약의 땅이었다. 이순신은 평생 세 차례 함경도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는데, 그 모든 경험이 그를 조선 왕조 최고의 위대한 무장으로 조련해냈다. 그의 첫 함경도 부임은 선조 9년(1576년)이었다. 그해 과거에 급제하고 2년간 동구비보(董仇非堡)에서 무관 최하위 벼슬인 종9품 권관으로 복무하면서 국경 방어의 실체를 체득했다. 두 번째 부임은 선조 16년 3월로 10개월간 머물렀다. 당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러 간 그는 피비린내나는 전투 현장에서 무장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눈부시도록 강력하게 성장했다. 이때 그는 최고 지도자의 시각으로 전쟁 전체를 고찰하는 안력(眼力)을 키웠고, '전략 및 전술'의 중요성과 불가피성을 엄중히 인식했으며, 그것을 우을기내 생포 작전의 화려한 성공으로 실현했다.

세 번째 부임은 선조 19년 1월로, 2년간 머물렀다. 조산보 만호로 임명받아 다시 함경도에 간 그는 다음해에 녹둔도 둔전관으로 겸임 발령을 받아 직접 둔전을 관리하면서 '둔전 경영의 묘리'를 깨쳤다. '군대는 하루치 양식이 있으면 하루의 군대가 되고 100일치 양식이 있으면 100일의 군대가 된다'고 한다. 군대와 군량의 관계는 그토록 엄중한데, 이때 겪은 둔전 경영 경험이 뒷날 임진왜란 때 매우 긴요하게 활용됐다. 임란 당시 그는 많은 둔전을 설치해 군량을 조달하면서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의 '녹둔도 둔전관 김경눌 희롱 사건'의 여파가 훗날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의 처절한 대결에서 그처럼 요긴하고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으랴!

선조 21년(1588년)은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보낸 마지막 해였다. 전년인 선조 20년 9월의 녹둔도 전투 패배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그는 새해 벽두로 계획된 여진족 토벌전을 기다렸다. 그것은 녹둔도 침공에 대한 응징이자 이순신이 그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 처분을 해제받기 위한 전투이기도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토벌 부대는 2700여 명으로 조직됐다. 부대장인 북병사 이일이 수하 장교들과 지휘본부를 구성했고, 실제 전투는 좌위군(左衛軍)과 우위군(右衛軍)으로 편성된 두 부대가 맡았다. 이때 크게 주목할 사안이 있다. 이순신이 토벌전에서 맡은 직책이다. 그는 우위 부대를 구성한 단위 부대장 24명 중 한 사람으로서 '우화열장(右火熱將)'이란 직책을 맡았다(육군박물관 소장,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화열장은 '총포대(銃砲隊)의 대장'을 뜻하는데 좌위부대와 우위부대 모두 좌·우 두 명의 화열장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우화열장'으로 선정된 것은 토벌대 무장 총 58명 중 총포를 가장 잘 아는 4명의 장수 중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을 뜻한다.

이순신이 전쟁 무기로 총포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니탕개의 난 때였다. 그는 선조 16년 5월 5일에 니탕개군 2만여 명의 공격으로 벌어진 종성진 전투를 크게 주목했다. 신임 북병사 김우서는 첫날 전투에서 활과 창 등 종래 써오던 무기가 모두 소진되자 둘째 날에는 무기고에 방치돼 있던 낯선 무기 승자총통을 꺼내 매우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승자총통은 무기 창제에 재능이 많았던 전 병사 김지가 새로 개발한 무기로 이때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됐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매우 기뻐서 고인인 김지에게 증직(贈職)하고 그의 후손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16년 6월 11일)

그뿐 아니다. 선조는 급히 승자총통을 다량 제작해 각지에 추가 배치하려 했다.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 힘들자 하삼도(下三道:충청·경상·전라)에 있는 사찰의 종을 징발하도록 명하면서 불교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런 희한한 하교까지 내렸다. "불씨(佛氏·부처)는 본시 자비심으로 은덕을 베푸는지라, 머리와 눈까지 아끼지 않고 인명을 구한다고 한다. 하물며 지금은 국가가 어려운 처지에 있고 변방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 때니, 그 종을 버려서 적국을 막는 것이야말로 불씨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우성전, '계갑일록')

이순신은 이때 새 무기인 총포의 중요성을 기민하게 알아보고 계속 관심을 가진 결과 후일 여진족 토벌전에서 우화열장으로 활약할 만큼 전문가가 됐고, 이후 임진왜란 때도 매우 유용한 자산이 됐다. 당대 무장들이 모두 이순신처럼 총포를 주목하고 전문가가 됐다면 임진왜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 패배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지 석 달 뒤인 선조 21년 1월 14일. 야밤에 출동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 조선군 토벌대는 이튿날 날이 샐 무렵 녹둔도 침공의 중심 세력이었던 여진족 부락을 덮쳐 초토화했다. 전리품은 적의 수급 383급과 말 9필과 소 20마리. 이 전투는 토벌 대상이었던 여진족 부락 이름을 따서 '시전부락 전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올랐다. 이 전투에서 올린 전공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분에서 벗어났다. 그 후 자유인으로 함경도를 떠난 이순신은 다시는 함경도에 가지 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21/20170321036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