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조선이 감당한 마지막 육전(陸戰)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입간판은 피바위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그 혈흔(血痕)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피바위 위로는 족히 수십 m쯤 되는 가파른 벼랑이 산성으로 이어졌다.
420년 전 이맘때 숱한 아녀자들까지 비장한 죽음으로 내몬 왜군의 수괴는 가토 기요마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력제로 바치겠다며 조선 호랑이를 마구 사냥해 ‘호랑이 가토’로 불린 그는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학살자로 더 악명을 떨쳤다. 사명대사가 가토와의 대담에서 “조선 제일의 보배는 그대(가토)의 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조선의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가토는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이 승리하자, 곧바로 일본군 우군의 선봉을 맡아 육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왜군 총대장 고바야가와 히데아키는 좌군(4만9000여 명)과 우군(6만4000여 명)의 2개 군으로 재편성해 호남정벌 작전을 펼쳤다. 좌군은 진주와 구례를 거쳐 수군과 합세해 남원성을 공략한 뒤 전주성으로 가고, 우군은 밀양과 합천 등을 경유해 거창, 안의(안음) 등을 공략한 뒤 전주성에서 좌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우군 중 약 3만 명의 주력부대를 이끈 가토는 의병장 곽재우가 지키고 있는 화왕산성(창녕)을 포기하고, 대신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황석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1597년 8월 15일, 가토가 이끄는 왜군이 겹겹이 포위한 황석산성은 전쟁의 살기(殺氣)가 성 안팎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의 풍년이 들어 성 안에는 곡식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왜군은 전쟁을 치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 성을 탈취해야 했다.
왜군은 철포대를 배치하고, 둘레가 약 3km에 달하는 산성 주위 여러 산봉우리에 화포를 갖춘 진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왜군이 철포와 화포를 아무리 쏘아대도 성안의 조선 관군 500명과 백성 수천 명은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했다(7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예상 외의 저항에 부닥치자 당황한 왜군은 심리전을 펼쳤다. 왜군의 통사(通事·통역관)가 성 안 사람들에게 들리게 조선말로 소리쳤다.
“개산(介山)아. 네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아라.”
개산은 김해 사람이었다. 김해는 임진왜란 이후 일찌감치 왜군의 수중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순왜(順倭·왜군에 협력하는 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개산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부터 왜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난중잡록’)
왜군이 김해 출신 성안 사람들을 겨냥한 심리전을 펼친다고 판단한 김해부사 겸 출전장(出戰將) 백사림은 본보기로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무장(武將)이기도 한 백사림은 자신의 관할 지역인 김해 사람들을 이끌고 황석산성에 합류해 동문과 북문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100명의 개산을 죽인다 한들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하고 비웃었다. 다음날인 8월 16일, 통사가 또 와서 최후 통첩을 했다.
“성을 비워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난중잡록’)
그날 밤 왜군은 총 야간 공격을 펼쳤다. 성안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왜군과 맞섰다. 병사들은 활과 칼을 쓰며 왜군에게 대항했고,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낫과 죽창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냇가의 돌을 실어 나르고 끓는 물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과 맞섰다. 황석산성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성벽 주변에는 성내 계곡의 냇가에서 행주치마로 운반해온 듯한 주먹만 한 크기의 몽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부녀자들이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던진 난석(蘭石)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정예화된 왜군의 병력과 막강한 화력 앞에서 중과부족이었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김필동이 김해 사람 20여 명을 인솔해 몰래 동문을 열고 성을 빠져나가 왜적에게 투항해 버렸다. 성문을 지키던 백사림도 밧줄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탈출시킨 뒤,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왜적에게 붙은 김해부의 아전과 백성들의 꼬임에 넘어가 백사림이 성을 넘어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다).
산성내 조선 관군의 총지휘관인 백사림이 달아나자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성은 결국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