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어야 산다 -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누구나 아마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이
노량해전일 것이다.
그 노량해전을 떠올리면서
늘 스스로 묻는 2개의 질문이 있다.
왜 돌아가려는 적을 끝까지 잡으려 했을까?
그리고 왜 앞장서 싸우다가 죽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랜 동안 찾았고
그를 위해 먼저
노량해전이 일어난 배경과 진행을 봐야 한다.
역사에서 이 해전을
'노량해전'이라고 가르치지만
지리적으로는 '순천 해전'이나
'남해도 해전'이라고 하는 게 맞다.
한산도 해전의 시작이 '견내량'이듯이
'노량'은 하룻밤을 싸운 해전의
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일 뿐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
바다길목에서 싸운 해전은
13척으로 싸운 울돌목해전이 유일하다.
울돌목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진격해서
조선의 수도 한양을 공격한다는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군의 도움 없이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온
5년 전의 아픔으로 일본군은 전의를 잃고
남해안에 몰려와 왜성을 쌓고
공격이 아닌 수비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은 순천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를 수륙합동을 공격을 하려 했으나
명군의 방해로 결과가 별로 크지 않았다.
1598년 8월18일 전쟁의 주범 도요토미가 죽자
고니시와 가토 등 전쟁의 선봉에 섰던
도요토미의 가신들은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도요토미의 반대세력과 맞서야 했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광양만이 좁아졌으나 만의 서북쪽 끝 순천에는
고니시가 쌓은 왜성에 1만6천명의 왜군이
본국으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제멋대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이들을
편하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11월18일 도요토미가 죽은 지 3달째 되는 날
모든 일본군은 철수하기 위해 거제도로 모였다.
그러나 선봉장 고니시의 군대는 갈 수 없었다.
그날 밤 9시 이순신 장군은
10여척에 함선과 위장한 어선들로
바다에서 순천왜성을 포위하는 위계를 썼다.
순천왜성을 바다에서 감싼 것처럼 보여
거제에서 고니시를 기다리는 일본군 주력이
고니시를 구하러 '노량'을 건너오길 기다렸다.
규슈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를 필두로
4만7천명의 복귀를 기다리던 병력 대다수가
500척 배를 타고 노량을 지나
순천의 이순신 함대의 배후를 치러왔다.
노량은 하동군과 남해도 사이 해협으로
광양만의 동북쪽으로 함대를 끌고 와
광양만 서북의 이순신의 뒤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계략은 이들과 달랐다.
광양만 서쪽은 63척의 진린의 명군이 맡아
순천을 나와 본국으로 가려는 고니시를 잡고
동쪽은 노량을 건너 거제에서 오는
일본군 주력부대를 조선수군 83척이 맡았다.
11월19일 새벽4시
500척의 일본군 배가 모두 노량을 건너오자
남해도 관음포에 숨어있었던
조선수군 50척이 기습공격하며 해전이 일었다.
그러나 서쪽의 진린의 명나라 함대는
고니시로부터 사전에 뇌물을 받고
남해도를 돌아 도망가게 놔 주었다.
여기서 또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고니시를 조선수군이 맡지 않고
명의 수군에게 맡겼냐는 것이다.
한산도 해전을 보면 견내량을 건너온
일본 수군 73척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U자형으로 포위 공격해 섬멸했다.
광양만은 여수반도와 남해도 사이가 좁아
이곳에 함대를 매복해 함포로 공격하면
순천 왜군과 노량을 건너온 왜군을
일거에 섬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연합지휘권이 명의 수군에게 있었고
이순신 장군도 고니시 하나보다는
더 많은 왜군과 대적하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왜성을 나온 고니시가
동북쪽으로 가서 시마즈 함대를
지원하지 못하게 진린 함대가 막은 것이다.
노량의 길목을 나오면서 급습으로 당황한
일본군이 남쪽의 관음포로 뱃머리를 돌렸고
조선수군은 입구를 막고 화포로 공격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이었다.
일본수군은 예전에는
싸움이 불리해지면 언제나 도망갔으나
이번에는 육지로도 올라갈 수가 없으니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명군의 부사령관인 등자룡이 배를 끌고
조선수군을 돕기 위해 관음포로 왔고
일본군은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으며
남해도 서부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연합함대의 화포와 불화살로
200여척이 파손되어 침몰하고
150여척이 부분 파손되었다.
날이 밝자 일본군의 조총 명중률도 높아졌다.
장수들만 조준해 포위망을 뚫으려 했고
그 조총에 명군 부사령관 등자룡이 맞아 죽고
그의 배는 일본군에 의해 침몰당했다.
이제 조총은 조선수군 장수들에게 집중됐다.
8시경 그 중 한 발이 장군의 몸에 들어왔고
10여명의 조선 장수들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일본배 100여척이 나포되고
50여척만이 남해도를 돌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정오쯤 노량해전이 끝나고
7년간의 왜군에 의한 조선에서의 전쟁도 끝났다.
당시 순천에 와 있던 이덕형이 이렇게 보고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시체와
깨진 선박의 나무판자, 무기와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어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이고
바닷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비록 적장들은 도망쳐 갔지만
다시는 조선을 침략할 의욕을 갖지 못하게 해
그 후 300년동안 조선을 지켜낸 해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조정에서 명과 왜의 눈치를 보면서
화친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공론을 벌이지 않고
하나가 되어 이순신을 밀어 줬다면 어떠했을까?
순천만에서 고니시를 잡고 거제로 가서
왜군을 모두 섬멸했다면
300년후 일본에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을 게다.
도성의 정치지도자들은 자리보전만 찾았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결전의지가 없었는데
이 해전에서 직접 싸운 이들은
나라를 위한 결전의 의지가 하늘을 뚫었다.
DA 300
장군뿐만 아니라 많은 장수가
이 해전에서 근접전으로 죽었다.
이전에는 하지 않던 근접전을 하면서까지
왜 그들은 적을 모두 섬멸하려 했을까?
이순신 장군과 장수들에게는
나라와 백성과 그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였다.
백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내놓았고
백성도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 놓았다.
의병이 바로 그 증거이다.
나를 죽여서라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하나된 운명 공동체 의식이
어떻게 우리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이어졌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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