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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김대중(1924~2009)

화이트보스 2017. 11. 26. 19:26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김대중(1924~2009)
1972년 처음 만나 빠릿빠릿하고 잘생긴 40代 후반의 멋진 사나이
그에 대한 불만은 한 가지, 한화갑·한광옥…주변에 사람들 있는데 후계자 키우지 않은 것
대통령이 된 그가 날 보자고 한 적 없어요 다음 세상에서 만나도 난 그에게 할 말이 없다

김대중을 아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안다고 대답할 것이지만 잘 아느냐고 캐서 물으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김대중을 알기는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을 두고 "그는 입에 지퍼를 단 사람이었다"고 말한 평론가가 있었다. 김대중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도 지퍼가 달려 있었고 그 지퍼를 전혀 열지 않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세월에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성규 기자

세상 사람들이 나를 김대중에 대해 불만이 많은 줄로 잘못 알고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품고 있지 않다. 조국의 근대사에 그가 아니면 안 됐을 일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불만으로 여기는 일이 있다면, 왜 그가 생전에 후계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않고 떠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서 한평생 받들던 사람들―예컨대 한화갑, 한광옥 같은 준비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한 사람을 택하여 후계자로 삼고 키우지 않았고 그것이 잘못된 처신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후계자를 키우고 힘이 있을 때 밀어주어 훗날 청와대 주인이 되게 한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박정희가 재임 중에 김종필을 후계자로 삼았다면 10·26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이 대통령일 때 감사원장으로 발탁했던 이회창을 정치인으로 키우고 끝까지 밀어주었다면 김영삼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었을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대중과 나의 인연은 특별하다.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각 대학 문제 학생 명단을 만들어 문교부를 통해 대학 총장들에게 보내면서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연세대 박대선 총장을 찾아가 사표를 내면서 "그 학생들을 제적하면 나도 이 학교를 떠나겠습니다" 하고 한마디 던졌다. 집에 돌아왔더니 그 사실이 석간신문에 보도됐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그런 나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같이하자고 제의했다. 그다음 날 점심시간 서울시청 앞 어떤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때 김대중은 빠릿빠릿하고 잘생긴 사십 대 후반의 멋있는 사나이였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돼 생사가 불투명할 때 나의 동지들은 조마조마했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동교동 자택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먼저 달려가 그 문전에 진 치고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안에 들어가 면회한 사람 중에 나도 있었다. 박정희가 가고 전두환이 등장해 김대중이 국가 반란죄로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는 특별사면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나는 그가 워싱턴DC에서 우거(寓居)하고 있던 때 강연 때문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워싱턴까지 갔다. 문동환(문익환 목사 동생) 박사가 거기서 나에게 "김대중 선생을 한번 만나보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문 박사가 주선하여 김대중이 부인과 함께 머물던 교외의 한 아파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만일 그 사실을 전두환의 심복들이 알았다면 나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벤츠를 갖고 있던 교포 한 사람에게 부탁해 김대중이 칩거하던 아파트 주소만 일러주고 데려다 달라고 했다. 누구를 찾아가는지 말하지도 않고 그렇게 은밀하게 만남을 강행했다. 두 분은 기쁜 낯으로 나를 맞아주었고 이희호 여사는 우리가 밀담을 나누는 그 자리에 앉아서 성서를 펴놓고 읽었다. 김대중은 정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종교적 체험만을 늘어놓기에 "앞으로 정치는 안 하실 건가요"라고 한마디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세월이 가고 세상도 바뀌어 묶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를 재개할 수 있게 됐다. 그때 김대중은 나와 정치판에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정치와 인연이 멀었기에 거절했다. 내가 칼럼을 연재하던 한국일보에 '3김 낚시론'을 기고함으로써 김대중과 거리가 멀어졌을 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과 원수가 된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에 여러 번 출마했지만 자신이 당선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었다. 다만 노벨 평화상을 받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랬던 그가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를 다 누렸다. 대통령이 된 그가 나를 보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어디서 나를 만나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들고나온 햇볕 정책을 내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를 좋게 생각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오해를 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석양에 홀로 서서' 조용히 나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요다음 세상에서 그를 만나도 나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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