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4.21 03:02
입력 : 2018.04.21 03:02
입력 : 2018.04.21 03:02
11년 만의 남북 정상회담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27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판문점으로 온다. 북한 최고 지도자가 MDL을 넘는 것은 정전 이후 65년만. 우리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의 표어로 '평화, 새로운 시작'을 내걸었다. 언뜻 봐선 한반도는 평화와 통일의 목전(目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봄이 왔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연금 가입이벤트 진행중(~4/30)
2001년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에 뛰어든 김 전 의원은 10년 만에 금배지를 달았다. 앳된 외모와 패션 감각으로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은 30대 초선 의원은 얼마 안 가 난관을 마주한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북한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당의 정체성"이라고 답한 게 화근이 됐다. '북측이 공격해오더라도 참아야 하는가'란 질문엔 "맞불을 놓으면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했다. 천안함과 연평도 등 북한의 잇단 도발과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된 시점이었다. 현직 국회의원의 이런 발언에 대중은 경악했다. 좌파 진영 인사들도 "통진당과 그 일당은 도무지 답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종북'이란 두 글자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6년 넘게 들어왔다. 이젠 딱지가 앉은 기분이다. 숨고 싶거나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냥 치러내야 될 일련의 일들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체념하며 살아왔다."
―핵 개발과 3대(代) 세습, 북한 인권 등에 대해 그냥 한번 속 시원하게 일갈해주면 끝날 일 아닌가.
"우리 생각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통진당은 의석 수도 몇 개 되지 않았고, 안보 기밀을 알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토론은 없었고 한국의 정치 지형 안에서 공격 거리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다시 우리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안함은 누구의 소행인지 더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입장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정치적 행위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면 김정은은 여전히 자유와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다.
"그 보편적인 시선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수 아이린이 '(위원장이) 악수를 해주셔서 영광이었다'고 말한 것을 듣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내가 과거에 그 표현을 했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1년 전엔 절대 상상할 수도 없었던 표현을 지금은 해도 된다. 지금은 언론도 여러 가지 수식어로 김정은을 한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해준다. 문재인·트럼프 대통령도 북한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니까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것 아니냐."
―체제를 인정하자고 하니까 자꾸 '종북'이란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닌가.
"종북의 종은 '따를 종(從)'자다. 북에서 뭘 주장하는지 잘 알지 못해서라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내 머리로 사고하고 싶다. 나의 소신은 '남북이 더 친해져서 힘을 모으고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거다. 종북은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을 뜻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작년에는 반미 시위에 앞장섰다. 북한보단 미국이 문제라는 건가.
"트럼프 대통령의 호전성 때문이다. '본토가 아니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이 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방한 당시 국회 연설에서도 북한을 자극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먼저 긴장을 고조시킨 쪽은 북한인데.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 정부는 계속 대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정부도 그런 제재 일변도 정책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고. '강 대 강'이 비핵화의 해법이 되어선 안 된다.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 우리 주장은 뭐든 '대화'를 통해 하자는 거다."
좌파 진영 일각에선 그동안 북핵의 원인을 미국의 '강경 일변도 정책'에서 찾으려 했다. 중요한 시국마다 미국 대사관 앞은 반미(反美)의 물결로 뒤덮였다.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에 헌신해온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그들 눈으로 보면 북한은 자주국가이고, 남한은 미국에 의존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북한은 선, 미국은 악'이라는 논리로까지 나아간다"고 했다. 그는 "진보가 반미민족주의를 뿌리째 뽑지 못하면 끝내 주사파와 같게 된다"고 경고한다.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여의도
2014년 12월19일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해산됐다. 비례대표 신분이었던 김 전 의원도 의원직을 상실했다. 지난해 12월 신당 민중당의 대변인으로 약 4년 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매일 오전 6시면 의정부 집을 나와 여의도로 출퇴근한다.
―민중당은 통진당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다.
"통진당이 해산됐을 때 '유사 정당을 만들 것이다'는 추측이 끊임없이 나왔다. 차라리 '도로 통진당'이란 연상 작용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 정당을 만들어 안착시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다."
―'통진당 2기'라는 지적이 있다.
"통진당 활동 전력이 없는 이들이 전체 당원의 50%다. 얼마 전엔 마트 노동자들 1000명이 집단 입당했는데, 과거 총선에서 보수당에 투표한 분들도 있을 거다. 나 같은 사람이 통진당 때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해도 맘처럼 안 되는 구조다. 지도부는 대부분 통진당 출신인데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초기에는 정당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나름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한때 이석기 전 의원과 '종북 남매'라고 불렸는데.
"사실 별로 친분이 없다. 19대 국회 전에는 만날 일조차 없었고. 2012년 당시 이석기 의원은 청년 의원인 내가 풍파에 시달리는 걸 안타까워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는 '투샷'도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 했다. 연초에 면회를 가 10분 정도 보고 왔다.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그저 웃으셨다."
―'서민을 위한다'는 진보 정당의 지지율은 왜 답보 상태일까.
"답답한 부분이다. 선거에선 항상 부자들을 찍더라. 가난과 답답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힘 있는 사람이 더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내 얘기를 더 들어달라'며 부자 정당을 찍어왔다. 노동자나 서민의 편에 있는 정치 세력을 지지했을 때 어떤 변화가 있을지 유권자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 우리 능력의 한계도 컸다고 생각한다."
"아직 내 역할 남아 있다"
대구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해 서울 곳곳을 전전한 김 전 의원은 2012년 결혼 이듬해 의정부에 정착했다. 2014년 의원직을 상실한 후 약 2년 동안은 인터넷 방송의 진행자(BJ)도 했고, 지역에서 신문 배달도 했다. 재작년 12월엔 골목 한 귀퉁이에 동네 서점을 열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문학과 인문학 서적 등을 추천해주고 판매한다.
―정치로부터의 외도가 길었다.
"한 번도 정치에서 떨어져 있다고 생각은 안 했다. 현장에서 정치를 한 셈이다. 인터넷 방송은 일반 청년들과 소통하고 싶어 시작했다."
―조선일보를 배달했다고 들었다. 당신이 가장 불편해한 신문이었을 텐데 아이러니다(웃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의원직 상실 후 몇년 동안 밥벌이를 못했다. 원외(院外)에선 자기 돈을 써가며 정치를 한다. 취직을 해야 하는데 통진당 국회의원을 하다 잘린 김재연에게 누가 일자리를 줄까? 처음부터 '조선일보를 배달하겠다'고 한 건 아니다. 아파트 단지에 26종의 신문을 고루 배달했다. 그중 조선일보가 제일 맘에 안 들었다. 신문이 두껍고 간지가 많이 들어가 있어 제일 무거웠으니까.(웃음)"
김 전 의원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의정부 을 지역구에 출마해 3.8%(3810표)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현재 민중당의 의정부시 지역위원장도 맡고 있다.
―시댁이 의정부 유지라는 소문이 있다.
"시부모가 의정부에서 40년 넘게 허름한 한약방을 해오셨다. 한때 '초호화 주택에 산다'란 루머도 돌았는데, 그린벨트라 30평 이내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냥 조그마한 전원주택이다.(웃음)"
남편 최호현씨는 같은 운동권 출신이다. 최씨는 김일성의 회고록 등 이적표현물 90여건을 소지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현재 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외모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국회 등원 첫날 언론에서 '패셔니스타' 운운한 보라색 미니스커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입고 나온 거였다. 브로치나 머리핀까지 하나하나 다 세세하게 클로즈업하더라. 지난 2월 방남한 현송월 단장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정치인은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고 한다. 결국 인지도 향상에 도움이 된 것 아닌가.
"맞는다. 하지만 덕을 본 것은 없다. 그런 관심도 결국 이석기·김재연의 제명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이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당 해산 문제가 닥쳤다. 주위에선 계속해서 '김재연이 과연 정치를 계속 할 수 있을까?'하고 흔들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은 없었나.
"왜 없겠나. 당시 청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 나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게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벌어진 상황만을 수습하다 의원직을 잃었다. 내가 가진 메시지나 청년 정치 등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제대로 내보이지 못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엔 정말 무섭고 외로웠다. 누구에게 말 걸지도, 사진 찍자고 말하지도 못했다. 국회에 들어오자마자 운전면허를 땄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들고 있는 신문 1면에 항상 내 사진이 박혀 있었으니까."
―'정치인 김재연'의 궁극적인 목표는.
"난 진보 정당의 청년 비례대표를 했던 사람이다. 내가 여기서 힘들다고 손을 놓는다면 '먹튀'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 속에까지 기억이 선명한 진보 정치인이 별로 없다. 내가 진보 정치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얘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전선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재연 전 의원은 99학번. 스물세 살 외국어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무렵부터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제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듯했다. 지금 그는 원내 1석에 불과한 초미니 정당 민중당 소속. 그 어느 정당보다 북한에 유연하고, 그 누구보다 서민과 빈민을 위한다는 정당은 왜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그는 "자신들 능력의 한계"라고 겸양했지만, 동시에 서민과 빈민이 부자 정당들에 속고 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속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닐까.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은 "한반도에서 비핵화 논의는 북측의 일방적인 합의 파기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북한은 2002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 94년 제네바 합의를 깼
다. 2007년 6자회담의 결과로 도출된 2·13 합의는 2년 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파기됐다. 2012년 2·29 합의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로 날아갔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반문명적 폭압과 인권 침해를 해온 북한 정권을 섣불리 인정하고 대화하자는 것은 무책임하고 나이브한 발상"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20/2018042001792.html
유럽에 초밥 도시락 팔아 5000억원 벌다 (0) | 2018.04.21 |
---|---|
좌파세력이 국가 파괴"… 保守 2000명 비상국민회의 창립 (0) | 2018.04.21 |
北 거듭됐던 쇼 경계해야… 100m 달리기서 2m 온 것" (0) | 2018.04.21 |
•당장 안오른다고 환매 일쑤… 참는 자가 돈번다 (0) | 2018.04.21 |
사분오열 된 보수右派, 원로 2000명 총연합체 결성 (0) | 2018.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