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⑤
“아들 죽이고 개선가라, 이건 또 뭐지?”
“울려야지, 당연히 울려야지. 그게 주상과 우리의 의리야!”
“그 의리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2.
“선대왕(영조)과의 의리를 잊지 마시오, 주상”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마마마”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영화 ‘사도’에는 유난히 ‘의리(義理)’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전자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 개선가를 울리며 궁으로 행차하는 것을 바라보던 노론계 대신들이 주고받는 장면입니다. 딱히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후자는 어떨까요.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옥새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왕과 대비 사이라지만 손자에게 ‘할아버지와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들립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학계에서는 15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2/24/7319d2e5-d191-4e34-9fea-942f57b39ca9.jpg)
영화 '사도'의 한 장면. 학계에서는 15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포토]
이처럼 영화 ‘사도’에서 등장인물들이 ‘의리’를 강조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정조 시대가 말 그대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주고 받는 ‘의리(義理)’는 글자 그대로의 뜻을 넘어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신임의리(辛壬義理)
어렵사리 경종이 즉위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모친이 폐비된 장희빈이라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그렇기에 노론 측은 주장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등 노론 측 인사들은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인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직 30대에 불과한 왕에게 왕세제를 요구하는 것만 해도 괘씸한 마당에 대리청정까지 들고 나온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측에서는 연일 노론을 공격했습니다.
때맞춰 노론 인사들이 반역 모의를 벌였다는 밀고 사건이 벌어지면서 노론은 풍비박산이 납니다. 김창집 등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고 관련자 200여명이 귀양을 가거나 처벌받습니다. 이 과정이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이어지면서 신임의리(辛壬義理)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은 노론 측 의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노론의 고난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사망하고, 영조가 집권하자 노론의 세상이 시작됩니다. 영조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은 신임의리를 내세우며 붙박이 ‘여당’ 노릇을 하게 됩니다. '신임의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금과옥조'가 됐습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41세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지만 양측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다. [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2/24/cf354ec4-7c52-4929-9ca3-9fcb462a70e4.jpg)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조는 41세에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지만 양측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다. [중앙포토]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노론은 그런 세자와 첨예한 갈등을 빚게 됩니다. 문제는 사도세자의 이같은 태도가 자칫 신임의리에 대한 부정으로 비쳐지고, 더 나아가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보면 영조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할 때는 출입문이 다르고, 안 좋은 의미를 가진 한자는 절대 쓰지 않는 등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용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노론계 대신들의 대화 #1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됐을 것입니다. 또한 ”그 의리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라는 우려는 얼마 후 현실화 됩니다.
정조의 반격, 임오의리(壬午義理)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비를 겪었던 정조는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16년이 지난 뒤 이를 끄집어 냈습니다.
이무렵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영남 유생 1만 57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