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건너 연락한 27년, 이젠 직접 북으로 편지 보내고파
이하늬 기자 입력 2018.04.28. 15:47
[경향신문] ‘로또’ 보다 어려운 이산가족 상봉…“1세대 사망 전에 규모 커져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4월 27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남북이산가족협회 사무실의 관심은 온통 방송 뉴스 화면에 쏠려 있었다. ‘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담기나’라는 글자가 뜨자 화면을 가만히 보던 김경재씨(87)는 “어? 나온다”며 반색을 하다 “에이 기대도 안 해. 산 넘어 산이야. 안될 이야기만 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이다. 김씨는 “북청 물장수라고 들어봤나”라며 운을 뗐다. 1950년 겨울, 김씨를 비롯한 형제 네 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조부모와 부모, 여동생은 북한에 남겨둔 채였다. 당시 김씨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이후 40년 가까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에서야 우여곡절 끝에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외국 국적 실향민들이 북한을 방문했어요. 그 중에 내 고향 선배가 있어서 부탁을 했지. 그 선배가 고향에 가서 내 누이동생을 만난 거예요. 누이동생이 어머니 아버지 사진이랑 돌아가신 날짜를 써서 보냈어요. 오빠들이 모두 이남에 있으니까 제사라도 지내라 는 의미지요. 그런데 이 양반이 누이동생 주소를 안 가져왔네. 주소 찾는다고 한참 또 고생했습니다.”
동생 주소를 확인한 건 1991년이다. 남한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일을 하던 김씨는 일본 지인을 통해 동생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일본 지인의 주소로 북한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몇 달 뒤 동생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역시 일본을 통해 남한으로 건너왔다. 김씨가 ‘보물’이라며 꺼낸 27년 전 편지는 잉크가 옅어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주소가 확인되자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됐다.
김씨는 “일본 친구들을 통해 편지를 보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년 지나니까 미안해서 부탁을 못 하겠더라는 말이지요”라고 말했다. 1999년, 김씨는 부인과 자녀들은 한국에 두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송금도 가능할 때였다. 김씨는 편지와 택배는 물론이고 여유가 되는대로 송금도 했다. 하지만 2006년 일본에서 북한으로 물건을 보내는 게 까다로워지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생사 확인해도 상봉 기회는 ‘로또’
분단 이후, 동생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도 일본에서다. 2002년 수신자 부담으로 해외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지는 평양.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 해외 전화가 가능한 도시는 평양밖에 없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가 기억하던 동생은 늘 9살 어린아이였는데, 전화기에서는 60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화가 40분가량 이어졌지만 김씨는 “뭘 들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버렸다”고 회상했다.
동생을 만나지는 못했다. 생사를 확인한 90년대 이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당첨’된 적은 없다. 김씨는 “추첨이 돼서 만난 사람은 그야말로 행운아 중에 행운아예요. 우리는 로또보다도 더 어렵다고 생각해요”라며 “이산가족 대부분이 당연하게 못 만났다고 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등에서 만나는 이산가족도 있지만 쉽게 성사되는 일이 아니다.
심구섭 남북이산가족협의회 대표(84)도 지난 20년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심 대표는 1993년, 미국 지인을 통해 북한의 동생과 어머니가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을 때였다. 1994년 심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중국에서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심 대표는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공항 저 편에서 동생이 “형님” 하고 들어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했다. 47년 만이었다. 60대 남성 둘은 중국 공항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형제는 이날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얼마 전 세상을 등졌다. 그럼에도 심 대표는 “나는 운이 좋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한 건 1985년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까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00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이산가족 상봉은 총 15차례 이뤄졌고 그 규모는 4120건(방남 상봉 301건, 방북 상봉 3819건)이다. 햇수로 계산했을 때 1년에 216가구 정도가 만난 셈이다. 1988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3만1000명이다.
남북 정상이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했음에도 이들이 크게 기대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난 20년 동안 기대와 좌절이 반복된 탓이다. 김씨는 “희망은 있지. 희망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기대는 안 하고 싶어요. 괜히 기대했다가 나중에 실망할 것이 훤합니다”라고 말했다.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김동래씨(76) 역시 ‘상봉 상시화’를 묻자 “헛소리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이들은 오는 광복절을 계기로 열리게 될 상봉에 대해서도 기존 규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심 대표는 “지금 이산가족 1세대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1년에 100가구, 200가구 만나게 해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며 “우리 노인네들한테는 그거 기대하는 게 더 괴로워”라고 말했다. 올해 3월 기준으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456명 중 7만3195명이 사망했다.
문제는 상봉의 규모나 정례화가 우리 정부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김동래씨는 “면회소? 좋지. 아 좋아. 그런데 우리야 쉽지만 북측은 힘들지”라며 “사람 찾아야 하지, 깨끗한 옷 입혀야 하지. 음식 잘 먹여야 하지. 혹시나 실수 할까봐 교육시켜야 하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남한 입장에서 상봉은 ‘인도주의’ 차원이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신청자 비해 상봉 가족은 극소수
<주체의 나라 북한>의 저자 강진웅 경기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1970년대에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잘 살았다. 그럼에도 북한 당국은 주민들 간의 직접 교류를 부담스러워했다”며 “지금은 북한 젊은 층 사이에서 남한에 관심이 높기 때문에 더 부담스러울 것이다. 북한 당국이 상봉에 적극적으로 나오게 하려면 그만한 이익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산가족들은 첫 상봉 이전에 우편교류부터 추진해달라고 입을 모았다. 우편교류는 상봉에 비해 북한이 받는 정치·경제적 부담이 적고 지금 분위기라면 논의를 못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이산가족과 북한 이탈주민 상당수가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북한의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지낸다. 지난 33년간 민간 차원에서 오간 편지는 1만1593건에 달한다.
김경재씨는 얼마 전에도 동생에게 택배를 보냈다. 무엇을 보내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고양이 뿔 제외하고는 다 보낸다”고 웃으며 말했다. 북한에서는 미싱 하나 있으면 온가족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에 미싱을 보내기도 했고, 몇 년 전에는 동생이 다리가 아파 걸을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보행보조기를 보냈다. 약품과 겨울옷이 인기품목이다.
하지만 편지와 택배를 보낼 수 있으려면 생사 여부와 주소를 알아야 한다. 김씨의 경우 27년 전 주소를 확인한 이후, 그나마 연락을 주고 받고 있지만 이산가족 대부분이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이들이 생사를 확인하려면 세 다리, 네 다리를 거쳐야 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통일부에서 생사를 확인한 이산가족에게 300만원(1회성으로 후지급)을 지원하는 이유다.
현실적으로 우편교류부터 우선해야
주소 확인도 마찬가지다. 생사를 확인했다 해도 주소를 파악하지 못한 경우,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통상 3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이들은 말했다. 송금은 불법이기 때문에 인편으로만 돈을 보낼 수 있는데, “남한에서 100만원 보내면 이것저것 다 떼면 20만원 정도 북한 가족에게 간다”고 말했다.
남북 간 우편교류가 가능해지면 이산가족들의 이런 부담이 줄게 된다. 그리고 우편교류가 위법도 아니다. 조민행 변호사는 4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남북 우편교류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남북 우편교류와 관련한 현행 법령의 기본태도는 원칙적 금지·예외적 허용”이라고 설명했다. 국가보안법이 금지하고 있지만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근거에 예외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 대표는 “상봉 전에 정부 차원에서 생사 확인, 그리고 주소 확인부터 해줘야 한다. 지금은 생사를 확인하는 것도 힘이 많이 들고 어렵다”며 “이산가족 1세대들이 다 세상 뜨기 전에 얼굴은 못 보더라도 편지라도 전할 수 있게 해달라. 편지가 안 되면 내용을 볼 수 있는 엽서라도 괜찮다”고 말했다.
힘 닿을 때까지는 동생과 사촌동생에게 편지와 택배를 보낼 것이라는 김씨는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물건을 사는 것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택배를 부치는 것도 힘이 많이 듭니다”라며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당첨되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지요. 지금보다 조금 더 편하게 편지만 주고 받아도 정말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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