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부 장관 발언에 기업들 부글부글 속앓이
- ▲ 김영주 고용부 장관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먼저 시행)하는데 대기업은 준비가 충분히 돼 있고, 대기업 계열사도 (준비가) 돼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 참석한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한국 기자들과 만나 다음 달 1일 시행하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 한 발언이다. 그는 이어 "지금 시행해보고 보완할 부분 있으면 보완하고 이렇게 메워나가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김 장관 발언에 재계 관계자는 "우리가 실험실 연구 대상이냐"며 "작년 최저임금 올릴 때도 그러더니 일단 해보고 보완한다는 건 선후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10대 그룹 임원은 "기업들이 정부가 아니라 로펌에 문의해 자체 가이드라인을 짜다 보니 로펌 내에서 가장 바쁜 부서가 HR(인사노무)팀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장관이 정말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찍힐까 봐 문의도 못 하는데…"
기업들은 정부가 주 52시간 시행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도 구체적인 지침조차 제시하지 않아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고용부엔 문의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유통 관련 대기업 계열사 부장은 "(고용부에) 직접 물어보면 정책에 반대한다는 식으로 찍힐까 봐 이런저런 궁금증을 간접적으로 물어봤더니 '알아서 하라'는 답만 돌아오더라"며 "14년 만에 근로시간이 주는데 4개월 시한을 주곤 다그치니 답답하다"고 했다.
대기업 계열사들은 주로 탄력근로제나 선택적근로제와 같은 유연근무제 도입을 통해 주 52시간에 대비하고는 있지만 정작 가장 기본이 되는 '근무시간' 개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10대 그룹의 한 간부는 "제도는 도입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과정에 애매모호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며 "이달 말까지는 팀장 재량으로 판단하고 이후엔 분위기 봐서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제조업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사무직이야 PC 꺼버리면 된다지만 생산직은 얘기가 다르다"면서 "근로시간 바꾸려면 일일이 노조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논의만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과 여건 달라
전문가들은 외국과 다른 노동 환경에서 경직된 근로시간 단축은 부작용이 속출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직무·성과급 위주의 임금 체계인 외국과 달리 기본급과 각종 수당이 많은 임금 구조여서 근로시간이 줄면 그만큼 임금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또 쉬운 해고 등 노동시장 경직 탓에 줄어든 근로시간을 대체할 정규직 추가 채용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연공서열이나 수당 위주로 임금을 주는 경우가 많아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이 더 클 수밖에 없다"며 "근로시간 단축은 필요하지만 완충장치가 없어 한동안 부작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외국은 우리보다 노사에 자율성을 많이 주고, 근로시간 적용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하루 8시간을 넘겨 근무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6개월 동안 하루 평균 8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하루 10시간까지 초과근무가 가능하다. 단체협약으로 평균을 내는 기간을 6개월 이상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업종에 따라 평균 주당 근로시간이 48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1주일에 60시간도 허용된다. 근로자가 초과근로를 하면 나중에 휴가와 맞바꿀 수 있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는 계절적 작업이나 정기적으로 특정 시기에만 일이 몰리는 경우 근로감독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 하루 근무시간 한도를 아예 없앨 수 있다. 영국은 주 48시간이 한도지만 근로자의 자발적인 서명이 있으면 주 60시간까지 가능하다. 미국과 홍콩은 근로시간 제한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2주나 3개월로만 적용할 수 있지만, 프랑스, 포르투갈, 핀란드, 일본, 미국 등은 1년 단위 설계도 가능하도록 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은 대개 근로시간을 기업과 근로자가 정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주고 있지만, 우리는 모든 규정을 법에다 명시하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기업이 근로시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했고, 바뀐 법만 바라보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소득·일자리 창출 효과 있을까… 최저임금 논란 판박이 될 것
근로시간 단축의 가장 큰 목적은 근로자 삶의 질 개선이다. 여기에 줄어든 근로시간만큼 일자리를 나눈다는 취지도 있다. 하지만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늘어날지는 불명확하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가 주 35시간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했을 때 고용 창출 효과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됐다. OECD는 보고서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고용 창출을 했다고 입증할 실증 결과가 별로 없고, 국가의 특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시간 단축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캐나다 퀘벡주(주 44→40시간), 포르투갈(주 44→40시간)은 근로시간을 단축하자, 기업이 인건비 부담 증가를 피해 고용을 늘리는 대신 설비를 늘렸다. 고용은 오히려 악화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잡셰어링을 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임금이 줄어든 불완전한 일자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