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자료관리과 222-1966
o 한일합방 당시인 1910년말 한반도 총인구는 13,313천명
- 남자 7,057천명(53.0%), 여자 6,256천명(47.0%)으로 성비(여자 백명당 남자 인구비율)는 112.8에 달함.
- 총인구중 한국인은 13,129천명(98.6%), 남자 6,954천명, 여자 6,175천명
- 일본인은 172천명으로 총인구의 1.3%에 해당
o 1930년 이전에 한반도 총인구 2천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
o 1935년경 인구밀도(명/제곱킬로미터)는 100명선을 넘고, 당시 한국인의 평균 가족수는 5.3명 내외 수준
<> 광복 전해 한국인 인구는 한해전보다 오히려 694천명 줄어 : 1944년
o 1943년말 총인구는 26,662천명으로 일제강점당시에 비해 2배를 넘어 섬.
- 한반도내 일본인 거주자도 759천명(총인구의 2.8%)으로 최고수준(1910년 대비 4.4배 증가)
o 1944.5.1 실시한 국세조사결과에 의하면 1943년말 보고된 인구에 비해 한국인 인구는 694천명(남자 392천명, 여자 302천명)이 오히려 줄어듬.
- 국민 징용령(1939), 조선인 징병제(1943), 학병제(1943), 총동원법에 의한 전면징용(1944), 여자정신대 경남, 경북, 경기반동원(1994) 등이 당시에 이루어졌음.
<> 경기도(서울 포함) 인구 1위, 전라남도 2위, 3위는 경북 : 1994.5.1 당시
o 1920년말 당시 인구
1위는 경북(2,112천명, 총인구의 12.2%), 2위는 전남(제주도 포함 : 1,955천명, 총인구의 11.3%), 3위 는 경남(부산 포함 : 1,796천명, 총인구의 10.4%)
o 1944년 5월 1일 기준으로 인구 1위는 경기(서울 포함 : 3,092천명, 총인구의 11.9%), 2위는 전남(제주도 포함 : 2,750천명, 10.6%), 3위는 경북(대구 포함 : 2,605천명, 10.0%)
<> 주요 도시(당시 부)인구 1920-1944년 사이 5.7배 늘어
o 일제강점 이후 도시상공업의 발달과 농촌인구의 이농, 실업자와 세궁민의 도회지 이주 등으로 1920-1944년 사이 도시인구는 5.7배 늘 어난 대신, 농촌(군.도)인구는 불과 1.3배 증가
o 특히 경기도의 부인구는 경기도 전체인구의 16.1%(1920년)에서 41.4% (1944.5)까지 확대
<> 서울(당시 경성부)인구는 989천명('44년 5월)으로 1920년대비 약 4배 증가
o 서울(당시 경성부)인구는 1920년말 250천명에서 1944년 5월 989천명으로 4.0배 증가
- 인천 5.9배, 대구 4.6배, 부산 4.5배, 평양 4.8배, 원산 4.1배, 청진 16.4배, 신의주 8.6배 증가
<> 일본인 63%는 부에 살고 경기도(서울 포함)내 일본인수는 전체 일본인의 28% : 1944년
o 한국거주 일본인의 대다수는 주요도시인 부에 살면서 공무.자유업.상공업 등에 주로 종사
- 부에 사는 일본인 비율은 1920년 당시 전체 일본인수의 49.8%, 1930년 52.5%, 1944년 62.8%
o 도별로는 경기도(서울 포함)에 전체 일본인의 27.8%(1944년)가 살았고, 다음은 경남(부산 포함) 13.7%, 함북 10.4% 등이었음.
<> 0-14세의 유년인구가 총인구의 43% 차지 : 1944년
o 1944년 당시 0-10세 사이의 유년인구는 총인구의 43.2%에 이르고, 15-64세까지의 노동력 인구는 52.9%였으며, 65세 이상은 3.9%였음.
- 노동력 인구의 부양부담(총부양비)은 89.0%(유년부양비 81.6%, 노년부양비 7.4%)
* '95년 현재 유년인구비율은 23.2%, 노년인구비율은 5.7%, 노동력 인구는 71.1%, 총부양비는 40.6%
<> 1940년 당시 한국인 평균연령은 24.2세(중위연령 19세)
o 1940년 국세조사결과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의 평균연령은 24.2세, 중위수 인구연령(총인구의 절반이 되는 인구가 속한 연령)은 19세
* '95년 현재 평균연령은 31.2세, 중위연령은 29세
<> 15-19세 여자중 63%가 결혼, 10-14세 기혼여자도 4% : 1935년
o 1935.10.1 기준 국세조사자료에 따르면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과 조혼 풍습으로 인해 한국인 여자 15-19세 인구중 63.3%가 이미 결혼(유배우 62.4%, 사별 및 이혼 0.9%)하였던 것으로 나타남.
- 10-14세 여자중 유배우 인구도 4.0%나 됨.
- 남자의 경우 20-24세 인구중 67.8%가 결훈(유배우 65.3%, 사별 및 이혼 2.5%)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15-19세 남자의 23.6%, 10-14세 남자의 1.5%도 유배우로 나타남.
<> 45세 이상 인구중 여자는 44%, 남자는 19%가 사별 : 1935년
o 45세 이상 한국인중 남자는 18.7%, 여자는 44.1%가 부부중 한쪽이 사망한 사별인구로 나타남.
- 특히 여자의 경우 60-64세 인구중 54.9%가 남편과 사별
<> 20-24세 신부, 연하의 신랑과 혼인하는 비율 27% : 1923년
o 1923년 당시 20-24세 신부가 같은 연령계층의 신랑과 혼인하는 비율은 39.9%, 신랑연령이 보다 위인 연령계층(25-29세)과 혼인하는 비율은 19.5%였으며 신랑연령이 신부보다 적은 20세 미만의 연령계층과 혼인하는 비율도 26.9%에 이름.
o 25-29세 신부가 연하의 신랑과 혼인하는 비율은 31.5%
<> 한국인의 8할이 농업에 의존 : 1930년
o 1930년 당시 한국인 가구의 78.3%(인구수로는 80.5%)가 농림목축업에 생활기반을 두었음.
o 상업 및 교통업 의존가구는 7.0%(인구수 6.4%), 작업장 인부, 막노동, 날품팔이 등 기타 직업의존가구도 5.8%(인구수 4.8%)에 이르렀음.
<> 14세 이하 어린이의 6%가 생계를 돕기 위해 나서 : 1944년
o 한국인 14세 이하 어린이(총수 10,850천명)의 6.0%(654천명)가 생계에 보탬을 얻기 위해 주로 고된 작업일에 나서고 있었음.
- 11세 이하 어린이(총수 9,122천명)의 1.7%(154천명), 12-14세 어린이(1,728천명)의 28.9%(500천명)가 일터에 나서고 있었음.
<> 일자리를 잃은 전직실업자만도 10% 넘어 : 1933년
o 1933년 조사자료에 따르면 직업이 있었던 자가 실직한 한국인 전직실업자 비율이 조사대상자 총수(1,278.5천명)의 10.3%에 이르고 있었음.
- 봉급생활자였던 자 12.3%, 일용노동자였던 자 11.7%, 기타 노동자였던 자의 8.2%가 실업자로 전락하였음.
o 일본인의 경우(조사대상자 88.9천명)는 전직실업자가 3.0%에 지나지 않았음.
<> 생활이 절박한 영세궁민수가 총인구의 27% : 1931년
o 1931년 조사자료에 따르면 생활이 지극히 궁박한 상태에 있으나 우선 허겁지겁 연명하는 세민과 긴급구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궁민 및 걸인의 수가 총인구(20,263천명)의 26.7%에 이르는 542만명이라 하였고, 이는 5년전인 1926년 당시(총인구 19,104천명)에 비해 2.5배 이상 늘어난 것이라 하였음.
<> 1930년 당시 일본내 한국인 거주자 42만명, 노동자.막일꾼이 유업자의 71.5%
o 일본 국세조사자료에 의하면 1930년 당시 일본내 한국인은 41만 9천여명, 1920년(4만 1천명)에 비해 10배 이상 불어났다고 함.
o 한국인의 직업은 전체인구(419천명)의 33.0%가 공장노동자(138천명) 3.9%가 광산노동자(16천명), 7.5%가 막노동, 날품팔이 등 기타 유업자(31천명)였고, 노약자, 어린이, 주부, 실업자 등 무업자(159천명)를 제외하면 한국인 유업자(260천명)의 71.5%(186천명)가 노동자, 막 일꾼이었던 셈임.
<> 일제강점 이후 만주 등지로 떠난 사람 100만명 넘는 것으로 추산
o 기근과 가난, 압제와 핍박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서북간도 등지로 이주한 동포는 조선총독부 통계자료에 의하더라도 1910년 9월-1929년까지 약 20년간 35만 7천명이라 하였음.
o 조선총독부 촉탁 선생영조의 "조선의 인구" 자료에 따르면 1923년말까지 북방대륙으로 이주한 한국인수가 839,079명이라 하였음.
o 일본 외무성 및 만주국 정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942년 당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수가 151만 2천명에 이른다 하였음.
<>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수도 152만여명 : 1936년
o 빚이나 생활고에 쪼들려 농토, 가재도구들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찾아 들어간 화전민수도 1936년 현재 28만 2천호에 152만여명이라 하였음.
- 1916년 당시에는 화전민 호수 4만 9천호에 인구 24만 6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음.
o 1928년 함남 갑산군 화전민 1,448호를 대상으로 화전민이 된 이유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41.6%가 식량수확 감소로 생계가 막연해서, 26.7%가 재난으로 가산을 모두 잃어, 13.1%가 농촌에서 채무로 인해 토지를 팔아 생계가 막막하여, 11.0%가 분가를 하였으나, 농사를 지어 먹고 살 분배토지가 없어서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
<> 세궁민과 억압받던 백성들 함북, 경기로 몰려 : 1940년
o 1940년 당시 한국인의 6.5%가 자신의 본적지인 도를 떠나 타도에 거주
o 함경북도는 25.5%, 경기도는 12.0%가 타도 사람으로 타도 인구비율이 매우 높았고, 특히 함경북도에는 함남, 강원, 전남, 경남, 경기도 사 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음.
<> 12세 이상 한국인중 약 80%가 문맹 : 1944년
o 1944년 국세조사자료에 의하면 12세 이상 한국인(15,426천명)중 간이서당조차 다니지 못한 사람이 79.8%(12,305천명)에 이르렀음.
- 남자의 66.1%(4,954천명), 여자의 92.7%(7,351천명)가 불취학자
o 한국인의 79.8%가 문맹인 것과는 달리, 당시 한반도내 일본인(12세이상 478천명)의 불취학 비율은 3.8%(18천명)에 불과
<> 인구천명당 31명 출생, 18명 사망 : 1930-1943년 평균
o 1930년부터 1943년까지 14년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은 한해 평균 약 725천명이 출생하여 조출생률(인구천명당 출생아수)은 평균 30.6명꼴
o 같은 기간동안 한해 평균 415천명이 사망하여 조사망률(인구천명당 사망자수)은 평균 17.5명꼴
<> 출생아 천명당 1세 미만 영아사망은 74명꼴 : 1925-1937년 평균
o 1925년부터 1937년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한해 평균 1세 미만의 영아 사망수는 49천명, 영아사망률(출생아 천명당 영아사망수)은 73.7명꼴
<> 총사망자중 0-4세아는 35%, 35세 이상은 38% 차지 : 1930년
o 1930년 당시 총사망자(381.9천명)중 0-4세아의 사망비율은 34.5%(131.9천명)였고, 35세 이상 사망비율은 38.2%(145.8천명)였음.
o 여자사망자 백명당 남자사망자 비율은 116.1명으로 남자가 16.1명 더 많았고, 0세아의 경우는 122.8명, 35세 이상은 119.7명이었음.
<> 평균수명 45세 못미쳐 : 1942년
o 높은 영.유아 사망률과 중장년층의 사망률을 반영, 1940년대 초반의 한국인 평균수명은 44.9세(남자 42.8세, 여자 47.1세) 정도로 나타나고 있음.
<> 소.돼지는 농가 2호당 1마리, 닭은 농가당 2마리꼴로 사육 : 1935년
o 1935년 당시 소사육두수는 168만마리, 전체농가 2호당 1마리꼴이었고, 돼지사육두수는 162만마리로 역시 농가 2호당 1마리꼴이었으며, 닭은 712만마리로 농가 1호당 2마리꼴이었음.
<> 국민학교 취학률 불과 32% : 1940년
o 1940년 당시 국민학교 학생수는 1,483.7천명으로 취학률(적령아동수에 대한 재학생수의 비율 : 적령아동수는 1940년 기준 국세조사결과의 7-14세 아동 4,677.8천명을 이용)은 불과 31.7%였음(일본아동 포함 : 일본아동 취학률은 1942년 당시 99.9%).
o 국민학교 1학급당 학생수는 71명꼴로 나타나고 있음(1943년 자료).
<> 한국인 중등학교생 인구의 0.3%, 일본인 중등학교생은 일본인 총수의 5.2% : 1943년
o 1943년 당시 공.사립중학교, 공.사립고등여학교, 관.공.사립 실업학교 및 실업보습학교를 합한 중등교육기관은 모두 401개교, 학생수는 129.2천명으로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의 비율은 69% 대 31%였음.
o 민족별 총인구당 학생비율은 한국 0.3% 남짓, 일본 5.2%였음.
o 중등학교 교직원 5,142명중 일본인은 71.6%(3,682명), 한국인은 28.4%(1,460명)였음.
- 사립학교 및 실업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므로 이를 제외한 공립학교의 경우 일본인 교사비율은 87.3%에 이르렀음.
o 인문계라 할 수 있는 공.사립중학교, 공.사립고등여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수는 전체의 48.9%였고, 농업.상업.수산 등 실업학교 및 실업보습학교에 다니는 학생수는 전체의 51.1%였음.
<> 사범학교생 한국인 3,452명당 1명꼴 : 1943년
o 1943년 당시 초등교원 양성기관인 범학교(15개교) 학생수는 10,955명으로 그중 한국인 학생수는 68.3%인 7,482명이었음.
- 한국인 학생수는 한국인 3,452명당 1명꼴, 일본인 학생수는 일본인 227명당 1명꼴이었음.
o 교직원수는 449명으로 한국인은 16.7%인 75명이었음.
<> 고등교육을 받는 한국인 학생수는 5,682명당 1명꼴 : 1943년
o 1943년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수는 통털어 8,527명, 그중 한국인 학생수는 53.8%인 4,589명이었음.
- 한국인 학생수는 한국인 5,628명당 1명, 일본인 학생수는 일본인 193명당 1명꼴
<> 한국아동의 유치원 취원율 0.7%, 일본아동 취원율은 6.5% : 1940년
o 1940년 당시 3-6세 아동수는 한국아동 2,888.9천명, 일본아동 67.0천명이었고, 이중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수는 한국아동 20.1천명, 일본 아동 4.3천명이었음.
- 한국아동의 취원율은 해당아동 천명당 7명, 일본아동의 취원율은 천명당 65명이었던 셈임.
<> 서당은 1935년 6,209개소에서 1943년에는 2,679개소로 줄어
o 1935년 당시 서당수는 6,209개소, 학생수는 161.8천명이었고, 선생수는 6.9천명이었음.
o 1943년 당시 서당수는 2,679개소, 학생수는 142.4천명, 선생수는 3.4천명으로 신식교육에 그 터전을 잃어 갔음.
<> 중도퇴학생 졸업자 대비 55%에 달해 : 1934-1942년
o 1934-1942년간 자료에 의하면 정규학교(유치원, 서당, 간이학교 제외) 재학생중 경제적 이유(수업료를 내지 못함)나 사회적, 가정사정 등으로 인해 중도퇴학한 학생은 총졸업자 대비 54.6%, 총입학자 대비 23.6%에 이르렀음.
o 특히 국민학교의 경우 중도퇴학생 비율은 졸업자 대비 57.1%에 달하였음.
<> 한국인 전체 교직원 평균월급은 일본인의 절반 못미쳐 : 1943년
o 1943년 당시 학교예산에서 지급되는(학교비지변) 일본인 교직원의 평균월급은 163.3원이었고, 한국인은 그 절반에 못미치는 51.3원으로 차별이 심하였음.
<서당>
(단위 : 개소, 명) ==================================== 1935 1938 1940 1943 --------------------------------------------------------- 서당수 6,209 5,293 4,105 2,679 학생수 161,774 172,456 158,320 142,380 ====================================
<> 일본 신앙인 신도와 일본 불교가 활개쳐
o 1943년 당시 불교사찰 및 포교소수는 1,466개소(그중 조선불교포교소 수는 90.5%(1,326개소), 진종대곡파, 일연종 등을 비롯한 일본불교는 9.5%(140개소))였고, 신도수는 조선불교 250천명(42.5%), 일본불교 338천명(57.5%)으로 일본 불교세가 신도수에 있어서 조선불교를 압도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o 기독교 교회 및 포교소수는 4,797개소(천주교 515개소 포함)가 있었으나, 일본 기독교단 소속교회(일본기독교회, 일본조합기독교회, 일 본성결교회, 일본성교회, 일본에소시스트교회)도 54개소 있었음. 신도수는 327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음.
o 일본의 민간신앙으로 국교인 신도가 들어와 그 사원인 신사가 국내 각지에 세워졌음. 1943년 당시 포교당수는 326개소로 나타나고 있음.
o 그밖에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 등 대소종교단체가 많이 있었으나, 법령상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유사종교"로 지목하여 경무국 관할하에 두어 탄압하였던 관계로 교세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단위 : 명) ==================================== 불교 기독교 신도 ------------------ ------------------ ------------------ 포교소 신도수 포교소 신도수 포교소 신도수 ----------------------------------------------------------------- 1934 614 414,750 4,409 441,419 275 101,295 1940 1,038 537,864 5,522 507,922 315 96,725 1943 1,466 588,210 4,797 326,711 326 78,580 ====================================
<> 1917년 이후 노동쟁의 급증
o 노동쟁의 발생건수는 1912-1916년 당시에는 한해 평균 5-6건에 불과 하였고 연평균 참가인원도 663명 정도였음.
o 1928-1936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158건 발생에 연평균 참가인원도 1만 2천여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o 쟁의발생의 67.1%(1917-1940년 계)가 열악한 임금을 인상하라는 요구 였고, 작업장에서의 대우개선요구가 10.8%였음.
- 1931년 6월 총독부 경무국이 조사한 "공장 및 광산노동상황조사" 자료에 따르면 총 1,199개 조사대상 공장중 8시간이내 작업 0.9%, 8-9시간 4.7%, 9-10시간 8.5%, 10-12시간 44.0%이내, 12시간 이상도 41.1%에 달하였다고 함.
<> 소작농민들의 반발도 심해
o 소작권 이동 반대, 소작료 인하, 지세.공과금 등을 지주가 부담해 줄 것 등을 요구하는 소작쟁의도 많았음. 1922-1931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445건, 1932-1939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18,287건의 크고 작은 쟁의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음.
<> 경찰관서 3,212개소로 국토강점 당시에 비해 6.7배 늘어 : 1941년
o 1910년 일제강점 당시 경찰관서는 경찰부 14개소, 경찰서 107개소, 주재소 269개소, 파출소 91개소 합계 481개소가 있었음. 경찰관헌수는 5,694명이었음(일본인 39.8%)
o 1941년 당시에는 경찰부 13개소, 경찰서 256개소, 주재소 2,392개소, 파출소 318개소, 출장소 233개소로 총경찰관서수는 3,212개소로 1910년 대비 6.7배 늘어났으며, 경찰관헌수도 23,269명(일본인 비율 61.9%)으로 4.1배 늘어났음.
<> 인구 1인당 연간 우편물 이용 17.3통꼴 : 1943년
o 1910년 당시 934개에 불과하던 우편함수는 1943년 6,495개로 약 7배 가량 늘어났음(1943년 당시 우편함 1개당 인구수는 4,105명 꼴)
o 총우편물 배달통수는 1910년 53,181천통(인구 1인당 4.0통)이었으나, 1943년에는 477,976천통(인구 1인당 17.3통)으로 9.0배 늘어났음.
o 전보발신통수는 1910년 2,060천통에서 1943년 15,525천통으로 약 7.5배 늘어났음.
(단위 : 개, 천통) ==================================== 연도 우편함수 우편물배달통수 전보발신통수 --------------------------------------------------------- 1910 934 53,181 2,060 1935 6,726 358,872 7,992 1943 6,495 477,976 15,525 ====================================
<> 한국인 전화가입자 1,357명당 1명 : 1941년
o 1910년 당시 전화가입자수는 6,448명
- 한국인 254명(3.9%), 일본인 6,114명(94.8%), 기타 외국인 80명(1.3%)
o 1941년말 당시 전화가입자수는 61,682명
- 한국인 17,620명(28.6%), 일본인 43,502명(70.5%), 기타 외국인 560명(0.9%)
o 공중전화대수는 1910년말 30대에서 1943년말에는 141대가 되었음.
<> 한국인 라디오 청취자 인구천명당 5명꼴 : 1943년
o 라디오 방송국수는 1943년 당시 11개소, 청취자수는 295,032명, 그 중 한국인은 128,509명(43.5%), 일본인은 164,810명(55,9%), 기타 외국인은 1,713명(0.6%)이었음.
o 민족별 인구천명당으로 따져 한국인은 5.0명, 일본인은 217.3명, 기타 외국인은 22.5명 꼴이었음.
<> 총호수대비 수도급수호수는 7.2%('42년), 전기수용가수는 17.7%('43년)
o 1942년 당시 수도수는 72개소, 급수호수는 346.2천호로 당시 전체호수의 7.2%에 해당하였으며, 급수량은 연간 83,116백만리터, 1일 평균 227.7백만리터로 급수호수 1호당 하루 평균 658리터 정도였음.
o 전력발전량은 1943년 당시 5,691.8백만kWh였고, 전등수용가수는 861.8천호로 총호수의 17.7%에 해당하였으며, 1호당 전등수는 3.8등 이었다.
<> 활동사진 1사람당 연간 1회, 연극은 6명당 1명 관람한 셈 : 1943년
o 1943년 당시 연극관람인원은 4,218.9천명으로 인구 6.3명당 1명이 관 람한 셈이었고, 영화(활동사진)관람인원은 총 26,592.3천명으로 인구 1인당 1회 관람한 셈이었음.
o 당시 1회 연극관람료는 1원 9전꼴, 1회 영화관람료는 평균 47전꼴이었음.
<> 가난, 질병 등에 못이겨 자살하는 사람도 늘어
o 가난과 질병, 이민족과의 갈등 등으로 자살자수도 크게 늘어났음. 1910년 당시 474명에 불과하였던 자살자수는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에 이르렀음.
o 1943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자살자 1,957명(총 2,027명의 96.5%)의 자살원인을 보면, 병고(22.0%), 생활곤란(16.2%)으로 인한 것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 이리.표범 등에 의한 인명, 가축피해도 상당수 있어
o 일제 당시만 하더라도 이리, 곰, 호랑이, 표범 등에 의한 인명 사상자와 가축 피해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