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The Telegraph, Smithsonian Magazine]](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9597d33f-634a-4d02-a863-823e8cd68bf1.jpg)
[사진 The Telegraph, Smithsonian Magazine]
화장실 수 부족, 관리 미비, 화변기 다수
2015년부터 화장실 혁명...3조원 투입
![[사진 후슈왕]](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bbe2651c-8d7b-49b8-bb20-c6df58b2f139.jpg)
[사진 후슈왕]
과거 중국 도시에도 배설물을 처리하는 시설이 있었지만, 물로 배설물을 내리는 지금의 공중화장실은 근대 서방 이민자들이 남긴 유산(?)이다.
청나라 시기, 우리나라도 그랬듯 각 집마다 큰 독 위에 나무 판자 두 개를 붙인 간이 뒷간이 있었다. 독에 인분이 어느 정도 쌓이면 분부(粪夫)들이 가져가 도시 밖 농민들에게 비료로 팔았다.
![청나라 말기, 배설물을 치우는 노인 [사진 후슈왕]](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2bf4661d-d29c-463f-92ff-f6c527eaa4a3.jpg)
청나라 말기, 배설물을 치우는 노인 [사진 후슈왕]
1945년 분표 1장의 가치가 45위안에 달했다. 1948년에 이르러서는 분표 1장이 무려 70만위안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분표 [사진 바이두백과]](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3ee5a139-a65d-4960-b20f-5cced16ca341.jpg)
분표 [사진 바이두백과]
하지만 화장실 수가 너무 부족했고 시설도 열악했다. 때문에 일반 백성들부터 고관대작까지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보는 습관이 들었다. 더불어 도시에 하수도 시설이 부족해 거리에는 소, 말 같은 가축은 물론 노인, 아이의 대소변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19세기,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첫 인상은 '더럽다'였다. 1843년 상하이에 간 영국인 낙위림(雒魏林, William Lockhart)은 "썩은 물에 각종 쓰레기가 난무했다. 한 번도 청소된 것 같지 않았다. 더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고 평했다. 물론 산업혁명 이전 유럽도 더럽긴 매한가지였지만.
![1928년 상하이 조계지 모습 [사진 후슈왕]](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e96daf81-5425-4d7f-9ed2-70467b7ecab2.jpg)
1928년 상하이 조계지 모습 [사진 후슈왕]
콜레라 사태로 조계지에서 유럽의 경험을 살려 위생에 각별히 신경쓰기 시작했다. 1863년 상하이 조계공부국은 분예고(粪秽股)를 설립해 조계지 내 인분과 쓰레기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식 공중화장실이 생겼다.
공중화장실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관련 제도가 마련돼야 했다. 상하이 분예고는 인분 처리를 담당하는 업자를 공개 입찰했다. 입찰은 매년 한 번씩 치러졌다.
하지만 문제는 조계지 밖 화장실은 여전히 더러웠다는 점이다. 1909년이 돼서야 상하이 조계지 밖에 첫 공중화장실이 생겼다. 심지어 물로 내리는 화장실이 아니어서 그냥 공중 '뒷간' 같은 개념이었다. 정부 예산이 부족해 절대적인 수도 적었다. 1928년 상하이시는 55개의 공중화장실을 설치하려 했으나 7년이 지난 뒤 18개를 겨우 완공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정부가 세운 공중화장실보다는 민간 공중화장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945년 상하이 공중화장실 중 민간 소유의 비중이 40%에 달했으나 2년 뒤에는 60%까지 치솟았다. 고공행진하는 인분 가격으로 민간 화장실이 돈이 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웬만한 수익형 부동산 뺨을 치면서 자신의 공중화장실을 갖는 것이 모든 이의 꿈이었다고. 인분 사업자들을 재벌의 벌을 따 '분벌(粪阀)'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중국 국민혁명 시기 군대 참모총장을 지냈던 리징룽(李镜龙)도 공중화장실 사업으로 떼돈을 번 케이스다.
그러나 민간 공중화장실은 99.9%가 더러웠다. 그냥 큰 독 몇개가 옹기종기 모여있을 뿐이었다. 청소도 하루에 한 번밖에 안 했다. 당시 개념으로는 화장실은 그냥 급한 일을 해결하는 곳이지 더러운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깨끗한 화장실을 쓰자고 멀리 있는 곳을 찾아갈 사람은 없기 때문.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청방의 두목 두월생(杜月笙). 상하이의 인분 사업을 꽉 잡고 있었다. [사진 후슈왕]](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29af090d-f4bc-4415-b3e6-a9066983a518.jpg)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청방의 두목 두월생(杜月笙). 상하이의 인분 사업을 꽉 잡고 있었다. [사진 후슈왕]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는 국가가 공중화장실의 건설과 관리를 맡게됐다. 기존의 민간 화장실들도 국가 소유가 되면서 인분 사업이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만족할만큼 시설이 개선된 건 아니었다. 개혁개방 이후인 1980년대 중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여전히 중국 화장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80년대부터 공중화장실 환경 개선을 위한 운동이 몇 차례 일어났다. 특히 1990년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계기가 되어 80년대 이후 1300개가 넘는 공중화장실이 새로 생겼다. 2002년 이후에는 3000여개의 공중화장실이 환경이 더 좋은 이류화장실(二类公厕)로 개조됐다.
![[사진 셔터스톡]](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98ad241d-8c42-4efc-829e-ad04d6f1b5b4.jpg)
[사진 셔터스톡]
물론 공중화장실이 적다는 것이 더러움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80년대 중국에선 인구 1만명당 공중화장실의 수가 4개에 달했지만 시설이 지금보다 쾌적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 결국 중요한 건 일상적인 위생 관리다. 중국은 공중화장실 관리에 그리 큰 예산을 투입하지 않는다. 당장 화장실 관리인의 월급만 봐도 2000위안(약 33만원) 수준이다. 심지어 소도시는 몇백위안 수준이라고 신문은 지적한다.
![악취의 주범 화변기 [사진 셔터스톡]](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8d116de1-f28e-46d7-90a5-262ca1af702d.jpg)
악취의 주범 화변기 [사진 셔터스톡]
더불어 중국인들은 사용한 화장지를 변기 옆 휴지통에 버리는 습관이 있어 이 또한 악취와 비위생적인 환경에 일조하고 있다. 이는 시민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중국 공중화장실에 화장지가 부족해 물에 잘 녹지 않는 개인 화장지 혹은 냅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막힐까봐) 변기에 못 버리는 것. 화장지가 부족한 이유는 인구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화장지를 훔쳐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화장실 혁명'으로 점점 개선되고 있는 중국 공중화장실 [사진 diyitui.com, gd.qq.com]](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8/18/57657597-d020-4ac6-9a19-46f7dc668bed.jpg)
'화장실 혁명'으로 점점 개선되고 있는 중국 공중화장실 [사진 diyitui.com, gd.qq.com]
중국이 강조하는 질적 성장, 그리고 시민의식 수준을 보려면 앞으로 공중화장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차이나랩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