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퇴계 이황댁 제사상 들여다보니… 조상들,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음성으로 읽기기사 스크랩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인쇄 글꼴

화이트보스 2018. 9. 17. 11:39


퇴계 이황댁 제사상 들여다보니… 조상들,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입력 2018.09.17 10:00 | 수정 2018.09.17 11:32

명재 윤증댁 "엄정하고 간소하게 지내라"... 제사상은 크기 작게 줄여
휴대용 노마드 제기부터 미니멀한 병풍까지… ‘아름지기' 현대적 제사 문화 선보여

퇴계 이황 종가 불천위 제사상. 상에 올린 제물이 총 26종으로 적은 편이다. /아름지기
"제사는 우리 때까지만 할거예요. 아버님 어머님 돌아가시면 땡 치고 안 하기로 했어. 애들한테는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그랬어요."

60대 중반 주부로 보이는 여성이 전시장에 재현된 퇴계 이황 종가 불천위(不遷位) 제사상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여성의 말은 제사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지키지만,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불편한 전통. 

서울 효자동 ‘아름지기’에서 열리고 있는 ‘가가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은 조상에게 예와 효를 갖추는 의례라는 제사의 원뜻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방법 모색하는 전시이다. 

◇허례허식에서 자유로운 전통 제사상

명재 윤증 종가 기제사상. 상판 넓이가 가로 99cm, 세로 68cm로 좁은 편이다. 음식을 과하게 준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명재 선생은 “(제사상이) 이 규격을 넘지 않도록 하라”며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지내라”고 유언했다. /아름지기
전시는 ‘전통 제사상’과 ‘현대 제사상’ 둘로 나뉜다. 아름지기 1층 전시장에서는 전통 제사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꼽히는 퇴계 이황 종가의 불천위 제사, 그리고 간결하고 검약해 모범 삼을만 한 명재 윤증 종가 제사상을 전시했다. 불천위(不遷位) 제사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신주는 4대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고 제사 지내도록 나라로부터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전시장은 평일 오전임에도 방문객이 의외로 많았다. 주로 50~7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었다. 한 관람객이 "퇴계 이황댁은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렸다고 하던데, 실제 보니까 그렇지 않네요?"라고 해설사에게 물었다. "다른 댁과 비교하면 간소한 거예요. 제사상을 보시면 기름에 튀긴 유밀과나 기름에 지진 전이 전혀 올라가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기름이 엄청나게 비쌌거든요." 상에 올린 제물은 총 26가지로, 다른 종가의 평균 제물이 35~40종이고 일반 가정에서도 30종 내외임을 고려하면 적은 편이다.

명재윤증 종가 기제사상은 퇴계 이황댁보다 더 간소했다. "제사상이 가로 99cm, 세로 68cm밖에 되지 않습니다. 명재 윤증 선생은 ‘제사상을 이 규격이 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명재는 당파싸움을 혐오해 벼슬을 하지 않고 학업과 후학양성에 전념해 살림이 궁핍했습니다. 이런 힘든 형편에서 제물을 마련해야 할 후손들을 위해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고, 손 많이 가는 화려한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유언하셨답니다."

퇴계와 명재 종가 제사상을 보면 제례를 시대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댁 불천위 제사상을 보면 앞에서 봤을 때 주로 왼쪽에 놓는 대구포가 가운데 놓여있다. "퇴계 손주며느리가 혼자서 음식을 준비해야 했을 때가 있었는데, 자꾸 치마자락이 대구포에 걸려 넘어졌답니다. ‘그럴 바에야 가운데 놓고 지내자’ 해서 가운데 놓게 됐다고 해요. 또 파평 윤씨 종가에서는 삼색나물을 반드시 시금치·고사리·도라지로 하지 않고, 그때그때 구하기 쉬운 걸로 하셨다고 합니다. 도라지가 비싸면 같은 뿌리채소인 당근으로 대신하는 식이죠."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현대적 제사상

플라스틱수지로 만든 휴대용 제기 세트 ‘노마드 제사상’. 관람객들의 구입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아름지기
전시장 2층과 3층에는 오늘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한 제사상 네 가지를 소개한다. 관람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건 ‘노마드 제사상’이었다. 산업디자이너 이건민이 플라스틱수지로 만든 휴대용 제기 세트다. 

"이 작가가 ‘유학을 가거나 해외출장 갔을 때 제사를 어떻게 지내지?’ 고민하다 디자인했다고 해요. 시중에 나와있는 휴대용 제기는 들고다니면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운데, 노마드 제사상은 제기를 담으면 꼭 맞게 물려서 움직이지 않아요. 색깔도 짙은 회색으로 세련됐죠." 관람객들은 "성묘하러 갈 때 가져가면 딱이겠다"며 "어디서 살 수 있느냐"며 궁금해했다. 해설사는 "구입 문의가 많이 들어와서 현재 제작 준비 중"이라고 했다.

현대적 제사상 4가지 중에서 ‘아파트 제사상’이 가장 의미있을 듯하다. 아파트는 한국인 절반 가량이 거주하는 가장 보편적 주거양식이 됐다. 전통 한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생활했다면, 아파트는 서서 생활하는 입식 문화. 소파와 식탁이 놓인 아파트에서 제사상으로 흔히 사용하는 낮은 교자상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한자가 쓰인 병풍과 옻칠한 목기, 유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 주거공간인 아파트에 맞게 재해석한 제사상. 상은 평소 식탁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높였고, 제기는 해체하면 접시와 찬합, 잔 등이 된다. 병풍은 단순하고 현대적이라 칸막이로 쓸 수 있다. /아름지기
도예가 이기욱이 제너럴그레이와 협업해 개발한 제기. 백자와 나무로 된 그릇들을 포개면 굽이 있는 제기가 된다. 평소에는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 가능하다. /아름지기
제너럴그레이가 설계한 제사상은 전통 제사상의 하부구조가 상판을 받치는 형태를 디자인 요소로 차용했지만, 평소에는 식탁으로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현대적이다. 높이도 일반 식탁과 같아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다. "제사에 흔히 쓰는 교자상은 일제 때 정착됐다고 합니다. 사당에서는 높은 상을 썼지요. 그러니 높더라도 전통을 해치거나 어긋나는 건 아닙니다."


제사에 흔히 사용하는 전통적인 병풍과 달리, 아름지기 디자인팀이 고안한 병풍은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이라 아파트 거실에 펼쳐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아름지기
도예가 이기욱은 평소에는 접시나 그릇으로 사용하다가 포개어 조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기를 디자인했다. 아름지기 디자인팀에서 개발한 병풍은 가느다란 금속 프레임에 반투명 천으로 만들었다. 현대적인 디자인이라 기존 병풍처럼 창고에 처박아뒀다가 제사 때만 사용하지 않고 평소에도 활용 가능하다.

전시 자문을 맡은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그동안 제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문화로서 그 의미만 지나치게 강조돼 왔다"며 "이번 전시가 서서히 박제되어 온 우리의 제사문화를 가족간 화합을 이루는 아름다운 문화로 바꾸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유리공예가 양유완이 만든 1인 제기 세트 ‘녹지 않는 얼음’. 이밖에도 도자기, 금속, 목재 등으로 만든 세련되고 실용적인 제기 세트가 이번 전시에 다양하게 소개됐다. /아름지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7/20180917005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