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일본

홋카이도 다이세츠산국립공원]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천상의 화원

화이트보스 2018. 9. 18. 14:34


홋카이도 다이세츠산국립공원]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천상의 화원

  • 글·사진 김영미 자유여행가

입력 : 2018.09.14 09:50[587호] 2018.09

7~8월에만 설산 눈 녹아 화려한 꽃 피워… 살아있는 분화구 주변 큰곰 서식

한 여름에도 시원한 홋카이도. 여름 장마도 없고 습도도 낮아서 일본인들이 최고의 휴가지로 꼽는다. 홋카이도의 중부 지역에 위치한 다이세츠산大雪山국립공원은 한여름에도 설산을 즐길 수 있다. 일본 최대의 국립공원으로 설악산 면적의 약 6.5배에 달한다. 홋카이도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다이세츠산 연봉과 도카치화산군 및 이시카리산군 등으로 이루어진 산악공원이고 일본에서 얼마 남지 않은 큰곰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고산지대는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다가 태양이 가장 가까워지는 한여름 7~8월에만 지표면의 눈이 살짝 녹는다. 이때 고산식물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 온 천지가 천상의 꽃밭으로 변한다. 특히 바위 표면과 이끼에 핀 암매는 초록의 양탄자 위에 꽃봉오리를 뿌려 놓은 모습이다.

또한 설산의 분화구에서는 화산활동으로 증기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진동해 이곳이 살아 있는 산임을 실감케 한다.

이번 백패킹은 아사히다케의 수가타미 스테이션에서 시작해 아사히다케旭岳, 하쿠운다케白雲岳, 쥬베츠다케忠別岳, 도무라우시산トムラウシ山, 오푸다테시케산オプタテシケ山, 도카치다케十勝岳, 후라노다케富良野岳를 6일간 종주하는 일정이다.

1일차 약 14km 

수가타미 스테이션(1,600m)-아사히다케(2,290m)-하쿠운다케(2,230m)-하쿠운다케 대피소(2,040m)

내 심장이 활화산처럼 요동친다

첫날 걸어야 할 거리는 14km. 7월이지만 아직 많은 눈이 남아 있다. 겨울 산행에 필요한 아이젠과 피켈까지 준비했다. 소운교 청소년 캠핑 야영장에서 1박을 하고 아사히다케 방문자센터로 향한다. 모두 스틱을 사용해서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분이 스틱에 캡을 사용하라고 말씀해 주신다. 아~ 이곳도 산이 훼손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고무캡을 사용하는구나. 지난 페루 잉카트레일에서도 그랬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쯤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로프웨이를 타는 사무소의 한쪽 벽면에는 날씨 현황판이 걸려 있다. 아사히다케 날씨를 기온, 풍속, 풍향, 시간까지 보여 준다. 그 위에 있는 모니터에선 현재의 아사히다케를 실시간으로 보여 주고 있다. 눈으로 덮인 활화산 아사히다케의 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기둥을 보는 순간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한다. 이미 내 마음은 아사히다케의 정상에 서 있다.

산의 중턱까지는 삼나무, 전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고, 위로는  군데군데 초록이끼로 뒤덮인 습지들도 내려다보인다. 푸른 초록이 투명한 파란 하늘과 참 잘 어울린다. 트레킹 시작지점인 수가타미 스테이션은 해발고도 1,600m. 주변은 온통 눈밭이다. 멋진 조망을 즐기면서도 아사히다케에서 이어지는 능선에는 눈이 얼마나 쌓여 있을지 살며시 걱정이 앞선다. 산에서 펑펑 치솟아 오르는 유황증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안에는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듯이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호쿠친다케, 구로다케, 하쿠운다케 등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산들이 이어져있는 오하치다이라.
호쿠친다케, 구로다케, 하쿠운다케 등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산들이 이어져있는 오하치다이라.

아사히다케 정상을 향하는 길. 왕성한 활화산일 때 치솟아 오른 돌덩이들로 길이 험하다. 돌길을 지나니 눈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가 푸른빛을 품고 있다, 호수 곁에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푸른 호수에 떨어진다. 산을 오르지 않아도 알록달록 작은 야생화들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호수 주변 트레킹 코스만 걸어도 아사히다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아사히다케 정상에 오르니 시야를 거슬리는 그 무엇도 없이 360도 조망이 열리면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초록과 하얀 눈, 울긋불긋 화산의 색이 마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듯하다. 때맞추어 바람까지 시원하게 불어와 오를 때 흘렸던 땀이 어느새 사라진다.

저 멀리 분화구인 오하치다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름 6km의 중앙 분화구를 중심으로 호쿠친다케, 구로다케, 하쿠운다케 등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산들이 이어져 있다. 어떤 행성의 모습이 저러할까? 화구 바닥과 산허리에서 가스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살아 있는 화산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화산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멋진 분화구를 배경화면으로 사진을 담는다. 심장보다 더 빨리 뛰고 있는 손의 맥박을 느낀다. 뉴질랜드, 남미, 아이슬란드 등 해외에서 산을 오르면서 참 많은 화산들을 보았다. 각 나라마다 모양도 색감도 어찌 그리 다른지. 어디서 만나도 화산은 너무나 경이롭다. 내 심장도 활화산처럼 요동치기 시작한다.

아사히다케에서 내려오니 예상한 대로 설원이 펼쳐졌다. 한국에선 폭염에 전 국토가 끓고 있는데 이곳은 하얀 눈의 세상이라니!!! 눈을 처음 만난 아이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눈길을 걷는 즐거움도 잠시.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습기를 안고 있는 눈은 상당히 미끄럽다. 아이젠이 필요한 순간이다.

다이세츠산의 7월은 물이 많아서 참 좋다. 식수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지천에 눈이 녹아서 흐르는 물을 정수하면 된다. 작년 8월에 처음 왔을 때는 물을 찾지 못해 엄청난 고생을 했었다. 작년과 비교하면 이번 산행은 시작부터 핑크빛이다. 눈앞에는 눈부신 새하얀 설산이, 그 옆으론 눈이 녹아내린 물이 흐르는 작은 시냇물이 있다. 손을 담그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다. 정수를 한 후에 들이키니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둘러앉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쌔게 우리의 식량을 채가려고 날아왔다. 다분히 공격적인 모습에 어찌나 놀랐던지. 정말로 눈 깜짝할 새다.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잠시 까마귀 때문에 소란스러웠지만 이내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온다.

초록과 흰색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분화구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걷는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벌거벗은 황량한 화산과는 다른 모습이다. 초록의 이끼바위엔 노란 꽃술에 하얀 꽃잎을 가진 작은 암매가 잔디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암매는 돌에서 피어나는 매화라는 뜻. 키는 1~2cm,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무로 알려진 멸종위기 야생식물이다. 설산 곁에 핀 암매가 지천인 이곳. 어떤 화가가 초록과 흰색의 단 두 가지 색깔만으로 이런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소풍처럼 즐거웠던 길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쪽은 낭떠러지. 우리 팀을 인솔하는 대장님께서 각자에게 만들어 주었던 줄을 꺼내라고 하신다. 줄을 풀어서 비너에 낀다음 빙설 구간에 설치되어 있는 로프에 걸었다. 미끄러지더라도 로프에 걸리도록. 줄을 걸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위험구간을 무사히 건넜다. 특히 해외 산행에선 완벽한 준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배운 시간이었다.

하쿠운다케 대피소와 하쿠운다케 분기점에 도착해서 배낭을 벗어두고 하쿠운다케를 다녀오기로 했다. 왕복 3km. 시작은 수월했는데 오를수록 바위투성이 힘든 길이다. 선두는 보이지 않고  길을 잘못 들었는지 정상은 보이지만 오르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가서 오르자니 시간이 부족하다. 순간적으로 바위를 직벽으로 올랐다. 바위가  거칠어서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위험한 판단이었다. 급한 마음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 다행히 안전하게 정상에 올랐고 일행들을 만났다.

하쿠운다케 대피소가 조그마한 땅콩집처럼 보인다. 이젠 다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약 1km는 가야 한다. 아주 좁은 계곡길이 계속된다. 눈이 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땅은 질퍽거리고 발등까지 물이 첨벙거린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구나!

미가와다이평원을 향하는 길엔 바람꽃이 지천이다.
미가와다이평원을 향하는 길엔 바람꽃이 지천이다.

2일차 17.3km

하쿠운다케 대피소(2,040m)-베츠다케(1,963m)-고시키다케(1,868m)-히사고누마 대피소(1,740m)

천상의 꽃길을 걷다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기상. 아무리 이른 시간이어도 아침식사는 거르지 않았다. 산에서는 먹은 만큼 걸을 수 있다. 잔뜩 흐린 날씨에 부슬부슬 비는 오지만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게 뺨을 스치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한쪽이 절벽인 길에는 설악에 많이 피는 바람꽃이 지천이다. 바람꽃 길을 지나가니 이젠 앵초가 우리를 맞아준다. 크고 작은 꽃잎과 나뭇잎마다 빗방울이 알알이 맺혀 있다.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석의 꽃밭이다.

쥬베츠다케 직전에 호숫가에서 이른 점심식사. 길게 뻗은 나무데크에 식탁을 차린다.  주변에 각종 야생화가 만발하고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서 먹는 식사는 미슐랭 가이드의 그 어떤 식당과도 견줄 수 없다!

점심식사 후 걷는 길엔 유난히 꽃이 많다. 꽃들의 행진이라고 해야 할까?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짙은 보랏빛의 희귀야생화인 가솔송은 쌀톨만큼 아주 작지만 짙은 보랏빛이 상당히 유혹적이다. 괴불주머니처럼 생긴 망아지풀, 만병에 좋다는 만병초, 암매까지…꽃길만 걷는다.

쥬베츠다케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카운다케(1,954m)를 오르지 않고 히사고누마대피소로 바로 내려가려던 계획이 어긋났다. 눈이 너무 쌓여서 히사고누마로 가는 우회등로를 찾지 못하고 결국은 카운다케를 올랐다.

카운다케에서 히사고누마대피소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많은 눈이 쌓여 있어서 등로를 찾을 수 없다. GPS를 보고서 대략 방향만 가늠하며 눈밭을 가로질러 갔다. 모두들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다행히 1시간 조금 지나서 정상등로로 들어섰다. 이럴 때는 여러 사람이 함께 걷는 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실감하게 된다.  아래쪽에는 엄청난 규모의 히사고호수가 있고 그 옆은 설산이 버티고 있다. 모르긴 해도 내일은 이 설산을 올라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계곡 옆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대피소이다. 안도감에 휴우, 숨을 깊게 내쉰다. 꿈속 같은 뿌연 시야 속에서 눈 위를 얼마나 걸어왔는지~~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피소에 들어서니 일본인들이 있다. 그런데 한 분이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오전 내내 헬리콥터가 맴돌았던 것이다. 착륙할 지점을 찾지 못해서 헬리콥터는 돌아갔고 응급처치를  위해서 구급대가 오고 있다고 한다. 밤 9시가 조금 안 되어서 응급처치를 위해 1차로 구급대가 도착했다. 다친 팔뿐 아니라 다른 곳은 아프지 않은지 아주 세심하게 환자를 보살펴주었다. 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2차 지원대가 도착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들것에 환자를 실어서 내려간다고 한다. 다친 한 사람을 위해서 10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감동적이다. 새삼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걸었음에 감사 또 감사하다.

다이세츠 국립공원 개념도.

3일차 10km

히사고누마대피소(1,740m)-기타누마(2,048m)-도무라우시산(2,164m)-미가와다이평원(1,799m)

산에서 만난 일본정원

어제의 생각대로 대피소 옆의 빙하구간을 올랐지만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히사고누마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제부터 가야 할 길은 완전 너덜길이지만 우리는 눈을 가로 질러 위쪽으로 올라가 정상적인 등로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돌길보다는 눈길이 체력소모가 적을 것이다. 안개가 짙게 깔린 히사고누마를 둘러싼 초록의 작은 나무들이 하얀 눈과 뒤섞이니 더욱 싱그럽다. 1시간 이상을 눈덮인 히사고고개를 오르면서 우리들은 모두 철부지 아이들이 된다. 이럴 때 눈썰매가 있다면 쭈~~욱 신나게 한판 미끄럼을 탈 텐데. 무척 아쉽다.

출발하고 1시간 반 정도 걸어서 일본정원Japanese Garden에 도착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인데 마치 누군가 가꾸어놓은 정원 같다. 반쯤 녹은 눈과 호수,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 그 옆으론 투명한 초록의 잎들 사이로 바람꽃이 만개해 있다. 초록으로 온몸을 샤워한 듯 마음도 몸도 가벼워진다. 두둥실 눈 위로 올라선다.

일본정원을 뒤로하고 바위정원Rock Garden에 도착하자 이름만큼 온 산이 검은 돌로 뒤덮여 있다. 정원이라 하기엔 너무 험난해서 항상 조심해야 할 바위구간이다.

기타누마에서 도무라우시산은 고도 150m를 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 게다가 험난한 돌길이다. 그리 심한 오르막도 아닌데 모두들 피로감을 느낀다. 거친 바람에 비까지 내려서 시야는 한층 어둡다. 다행히 모두들 안전하게 도무라우시산 정상에 섰다. 이젠 위험한 구간도 힘든 구간도 끝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도무라우시산 야영장 근처에서 물을 정수했다. 오늘의 야영지엔 물이 없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각자 먹을 식수와 저녁식사용까지 최대한 물을 많이 준비했다. 당연히 배낭이 무거워졌다. 정수를 핑계로 쉬고, 이슬비를 맞으니 이슬 머금은 풀꽃처럼 모두 생기가 넘친다. 그런데 야영지까지 길은 끝이 없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빗줄기도 굵어졌다. 등산화 안으로 물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발에 추를 달아놓은 듯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주변에 텐트 칠 만한 장소도 보이지 않고 날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드디어 선두팀을 만났다. 빗속에서 텐트를 치는 것도 힘들지만 이미 땅엔 물이 가득 차서 배수가 잘되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습지에 텐트를 쳤다. 물 위에 텐트를 치고 바닥에 공기매트를 까니 엄청나게 사치스런 물침대가 되었다. 저녁은 간단히 라면만 끓여서 먹고 각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세찬 비바람이 텐트를 날려버릴 듯이 흔들어대지만 매트에 몸을 누이는 순간 스르르 눈이 감긴다.

비에이다케에서 도카치다케로 가는 길엔 바람꽃과 가솔송의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비에이다케에서 도카치다케로 가는 길엔 바람꽃과 가솔송의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4일차 15km

미가와다이평원(1,800m)-오푸다테시케산(2,013m)-비에이후지 대피소(1,668m)

젖은 마음을 햇볕에 말리다

츠리가네야마를 지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쨍하게 갰다. 어제 침수된 등산화를 신은 채 걷다 보니 양말도 젖었고 발은 이미 팅팅 불었다. 내 발에도 햇빛이 필요한 시간이다. 게다가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고 있으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젖은 장비를 널기 좋은 터를 골랐다. 텐트를 꺼내니 물이 줄줄 흘렀다. 나뭇가지에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널고, 등산화와 양말도 햇볕에 내어 놓았다. 따사로운 햇살에 말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볕이 좋은 날엔 언제나 장독 뚜껑을 열어 놓으시고, 눅눅해진 이불이며 옷가지를 줄에 널어놓으시며 얼굴엔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셨는데…일생의 고단한 마음을 그렇게 햇볕에 말리셨던 건 아니었을지.

행복 끝, 고생 시작. 작년에 왔을 때도 엄청 힘들었던 대죽 구간.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아서 온 몸으로 대죽을 헤쳐 나가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구간이다. 다행히 한 달 먼저 와서인지 대죽의 키는 훨씬 작았다. 대신 대죽밭 아래의 등로는 물이 가득하고 미끄럽다. 대죽을 몸으로 밀어내면서 걸어야 했지만 작년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어서 체력소모도 적다. 1시간 반 정도를 물과 대죽 사이를 걸었다. 대죽밭은 끝났지만 작은 산사태로 등로가 사라졌다. 선두팀이 잡목을 러셀해 가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다행히 등로로 들어섰지만 이미 예정된 시간보다 너무 지체되었다.

오푸다테시케 산을 오르는 길은 작년에 내리막으로 걸었었다. 그때도 무척이나 힘들었던 구간이다. 작년과 같은 일이 없길 바라며 오푸다테시케산을 향해 험난한 길을 들어섰다. 직벽은 아니지만 경사도 심하고 험악한 바위가 가득한 위험한 길. 저기가 끝이려니 싶었는데 오르면 그 뒤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는 또 다른 산봉우리. 제자리를 걷는 느낌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일행 중 한 명이 저체온 증세가 오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산행이 어려운 상황. 최선책으로 그의 배낭에서 물건들을 꺼내어 나누었다. 각자의 배낭도 무거운데 기꺼이 받아들였다. 팀워크가 무엇인지, 배려가 무엇인지 글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공부이다.

모두들 힘들게 오푸다테시케산에 도착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카메라 속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하다. 정상석 앞에서 즐기지 못한 순간은 이때뿐인 것 같다. 이제부터 2개의 산을 더 넘어야 하니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베베츠다케를  넘고 이시가키야마를 향하는 능선길. 해가 기울며 주홍빛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어두워지면 안 되는데’라는 걱정도 잠시. 베베츠다케의 멋진 일몰을 바라보는 황홀감에 빠진다. 해가 사라지며 마지막 주홍색이 세상을 눈부시게 밝히는 순간, 하늘은 더욱 맑고 맑은 쪽빛이 되었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찬란한 그 빛에서 헤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거의 뛰다시피 했지만 이미 어둠이 모든 것의 형체를 삼켰다. 그나마 대피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안도감을 느꼈다. 헤드랜턴에 의지해 바위로 뒤덮인 길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내려간다. 모두들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안전하게 대피소에 도착했다.

고난의 그 길을 다시  걸으면서 상황에 대처하는 나의 마음이 작년보다는 조금 더 유연해졌음을 느꼈다.

5일차 9.5km

비에이후지 대피소(1,688m)-비에이다케(2,052m)-도카치다케(2,077m)-가미호로카메토쿠대피소(1,918m)

환경을 보호하는 휴대용 화장실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시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벌써 산으로 올라갔다. 다른 대피소에는 화장실이 있었지만 비에이후지 대피소에는 화장실용 텐트만이 있다. 볼일을 보고 싶으면 대피소 안에 비치되어 있는 1회용 화장실을 가지고 와서 화장실용 텐트 안에서 이용해야 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설지만 설명서를 따라하면 큰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볼일을 본 후에 하산할 때까지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보호를 위해선 기꺼이!

어제의 피곤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발걸음이 가볍다. 비에이다케까지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기는 하지만 오르면서 비에이 전체를 조망하고 걷는 즐거움을 준다. 오르는 길에선 보이지 않았는데 비에이다케 정상에 오르니 숨어 있던 화산의 분화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사히다케에서 보았던 분화구와는 또 다른 색감이다. 거친 화산재의 황토색과 초록색 이끼가 멋지게 어우러진다.

도카치다케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니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흰구름이 비에이를 덮고 있다. 햇살이 조금 뜨거웠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곳에서 배낭을 풀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비에이는 한폭의 유화 같다. 그러나 도카치다케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다. 크고 높은 산이라 바람도 빠르게 흐르고 날씨도 수시로 변한다. 비에이다케처럼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태양은 숨바꼭질을 몇 차례 반복할 뿐, 하늘은 맑아지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가미호로카메토쿠대피소로 향했다.

모처럼 저녁 식사가 푸짐하다. 이제 내일 아침만 산에서 먹으면 하산이다. 점심은 산장에서 먹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햄과 베이컨, 소시지까지… 식사를 하면서 5일 동안 걸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표정에선 자신감과  행복감이 철철 흐른다. 추억으로 남겨진 모든 순간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비에이다케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의 모습.
비에이다케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의 모습.

6일차 10km

가미호로카메토쿠대피소(1,918m)-가미후라노다케(1,893m)-미우네산(1,866m)-후라노다케(1,912m)-도카치온센산장(1,335m)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기쁨

드디어 마지막날. 후라노다케를 향하는 길의 청아한 초록은 싱그럽기만 하다. 고산에 오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색깔을 가진 산들이 많지만 초록의 향연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곳은 2,000m 고지대여서 그런지 야생화가 지천이고 초록의 잎이 넘실거린다. 초록의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은 발걸음도 경쾌하다. 후라노다케 분기점을 지나니 다른 곳과는 다르게 계단으로 잘 정비해 놓았다. 아마도 화산이 활동하는 지역이라 지반보호를 위해서인 것 같다. 후라노다케 정상에 도착해서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하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라노다케에서 도카치온센산장까지는 신작로라는 말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화산이 활동할 때 토해 놓은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고 중간 중간 진흙길은 너무나 미끄럽다. 거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는 눈까지 있었다. 역시나 산에서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구나!

드디어 산장 도착. 신발 벗고 산장 안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화장실. 수도에서 콸콸 나오는 물로 손을 씻었다. 쏟아지는 수도물처럼 내 행복도 콸콸 흘러 차고 넘쳤 다. 덮밥과 생맥주를 맞이한 우리들은 승전 용사들처럼 완주를 자축했다.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6일 동안 걸어온 길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나온다. 모든 수고가 달콤한 추억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충만하다. 끝났다는 아쉬움과 무사히 완주했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다이세츠산국립공원 대종주를 완성했다. 작년에는 시로가네 야영장을 시작으로 비에이후지, 오푸다테시케산, 마카와다이, 도무라우시로 이번 일정에 비하면 많이 짧았고 방향도 반대였다. 이번엔 일정과 거리가 길어져서 배낭의 무게도 늘어났지만 80km에 가까운 일정을 무탈하게 마쳤다. 준비도 더 철저했고 멋진 팀워크에 리딩까지 훌륭했다. 백패킹 종주 중에 만난 일본인들조차 놀랐던 길고 험한 구간이었다.

100년 만의 더위라는 올 여름. 매캐한 유황냄새와 증기기둥이 치솟는 살아 있는 분화구, 한여름에 만난 한겨울의 설산, 고산초원마다 펼쳐진 천상의 화원. 그 꿈같았던 6일의 다이세츠산국립공원 대종주를 다시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