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황윤길, 김성일 통신사 일행이 전쟁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일본을 찾은 1590년. 일본의 침략이 걱정된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명(明)의 또 다른 책봉국인 류큐의 상녕왕(尙寧王)에게도 명을 정복할 것이니 군사와 식량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류큐는 히데요시의 강요에 못 이겨 1589년 사절을 보낸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속(臣屬) 취급을 당하던 터였다.
놀란 류큐 왕부(王府)는 이듬해 3월 조공사 편에 히데요시의 망동(妄動)을 상국(上國)에 고한다. 류큐의 보고에는 히데요시가 200만의 군사를 일으켜 명을 칠 것임을 호언하고 있다는 사정과 함께 엉뚱하게도 조선이 일본의 길 안내를 맡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은 뜻밖의 소식에 반신반의한다.
히데요시의 거병(擧兵) 소문은 이미 규슈 일대에 퍼져 있었다. 같은 해 9월 규슈에 표착했다가 귀환한 중국인 어부도 현지 소문을 명 관헌에게 전한다. 명 조정의 근심이 깊어진다.
사쓰마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히데요시에게 1만 군사 동원령을 하달받은 유력 다이묘였다. 요시히사는 푸젠(福建) 출신의 허의후(許儀後)를 시의(侍醫) 겸 참모로 곁에 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정명(征明) 계획을 접한 허의후는 1592년 1월 동료를 통해 변고(變故)의 조짐이 있음을 명 조정에 급보한다. 허의 보고에도 조선이 일본과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명 조정은 유력 장수의 측근이 된 자국민에게서
입력 2019.03.22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