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정약용의 '부채와 붓과 붉은 부적'

화이트보스 2019. 4. 25. 14:43


정약용의 '부채와 붓과 붉은 부적'

조선일보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입력 2019.04.25 03:13

    정조 때 실학자·행정가·사회개혁가·도시 설계자·발명가로 이름을 알린 '전방위 지식인' 다산 정약용(1762~ 1836). 인생 전반기는 순탄했고, 후반기는 유배 생활로 버거웠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의학서인 '마과회통', 인문 지리서인 '아방강역고', 그간의 '논어' 해석을 총괄한 '논어고금주', 지방관을 통한 사회 혁신을 주창한 '목민심서' 등을 썼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 마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건,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지'라는 시구를 쓸 만큼 문재를 타고났다. 22세 때 초시(初試)에 들고, 28세 때 대과(大科)에 오르며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31세 때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수원성을 쌓는 용도로 거중기(擧重機) 등을 발명했다.

    [장석주의 사물극장] [95] 정약용의 '부채와 붓과 붉은 부적'
    정조는 다산에게 단옷날에 선방(扇房)에서 부채를 선물로 내리셨다. 옷칠이 된 부채의 손잡이는 윤이 났다. 또 다른 단옷날에는 바른말 하라고 붓과 붉은 부적을 주셨다. 조정에서 물러난 다산은 정조의 승하 소식에 슬퍼했다. 임금이 총애의 증표로 내린 애장품들이 그를 더욱 애닯게 했다. 정조 승하 이듬해 다산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다산의 집안은 천주교에 연루되어 풍비박산이 났다. 자형 이승훈과 형 정약종이 참수되었다.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을 담은 편지를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산은 포항 장기에서 강진으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40세에 시작한 유배 생활은 57세 때 끝났다.

    젊은 시절 다산의 말은 거침없고, 행동은 도드라졌다. 나이가 들어 비로소 신중해졌다. 불운과 역경이 뾰족한 재기를 눌러 주었을 테다. 유배지에서 가족을 그리워할 때는 그도 범부나 다를 바 없었다. '언제쯤 침방(寢房)에서 아름다운 만남 가질까. 그리워 않노라, 그리워 않노라, 슬픈 꿈속의 그 얼굴'이란, 아내를 그리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4/20190424041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