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5.01 03: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7] 1938~1939년, 임시정부 출범 20년
![이승만♥프란체스카](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4/30/2019043003633_0.jpg)
혁명가도 사랑에 빠진다. 이승만과 김구는 1932~1933년 비슷한 시기에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 오스트리아 여성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평생을 함께했다. 김구는 윤봉길 의거 후 피신하던 중 '여자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를 만나 5년간 '부부처럼' 살았다.
이승만은 쉰여덟 살 때인 1933년 2월 21일 제네바 레만 호숫가에 있는 호텔 드 뤼시의 식당에서 서른세 살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붐비는 식당에서 지배인이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석에 합석을 권했다. 프란체스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코리아입니다." 프란체스카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이승만은 깜짝 놀랐다.
프란체스카는 이튿날 신문 '라 트리뷴 도리앙'에서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잘라 봉투에 넣어 이승만에게 전해주라며 호텔 안내에 맡겼다. 이튿날에도 기사를 또 보냈다. 이승만이 답례로 차를 대접하겠다고 해 둘은 다시 만났다. 이승만이 국제연맹 외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프란체스카는 1년 후 미국 이민을 신청해 재회했다. 1934년 10월 8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체스카는 이후 이승만의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돕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1965년 7월 19일까지 32년간 함께했다.
이승만은 쉰여덟 살 때인 1933년 2월 21일 제네바 레만 호숫가에 있는 호텔 드 뤼시의 식당에서 서른세 살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붐비는 식당에서 지배인이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석에 합석을 권했다. 프란체스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코리아입니다." 프란체스카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이승만은 깜짝 놀랐다.
프란체스카는 이튿날 신문 '라 트리뷴 도리앙'에서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잘라 봉투에 넣어 이승만에게 전해주라며 호텔 안내에 맡겼다. 이튿날에도 기사를 또 보냈다. 이승만이 답례로 차를 대접하겠다고 해 둘은 다시 만났다. 이승만이 국제연맹 외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프란체스카는 1년 후 미국 이민을 신청해 재회했다. 1934년 10월 8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체스카는 이후 이승만의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돕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1965년 7월 19일까지 32년간 함께했다.
![김구♥주아이바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4/30/2019043003633_1.jpg)
김구는 쉰여섯 살 때인 1932년 5월 자싱으로 피신하면서 '광둥 사람'으로 행세했다. 뱃사공 주아이바오가 피신 생활을 도왔다. 김구에게 거처를 제공한 주푸청(저보성)의 집안에서 '홀아비' 김구에게 결혼을 권했다. 중학교 교사로 30대 독신 여성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김구는 정중히 거절했다. "중학교 선생이면 나의 비밀이 즉각 탄로 날 것이니 아니 되오. 차라리 여사공을 가까이하여 의탁하면 좋겠소."
김구는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주아이바오를 불러 함께 살았다. 경찰이 호구 조사를 나오면 주아이바오가 나서 설명했다. 1937년 11월 일본의 공격을 피해 난징을 떠나면서 김구는 주아이바오를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그 일이 훗날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에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5년 동안 부부처럼…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백범일지')
김구는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주아이바오를 불러 함께 살았다. 경찰이 호구 조사를 나오면 주아이바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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