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10] 1945년 8월, 광복을 맞다
광복군은 미 전략정보국(OSS·CIA 전신)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는 '독수리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중국 파견 미 육군정보국 디키 대령에게 미군과 광복군의 합작을 제안했다.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연합군과 함께 국내 침투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김구는 환영회에서 감격에 겨워 말했다. "그동안 일제의 폭정 밑에서 온 국민이 모두 일본인이 된 줄 알고 염려했는데, 그것이 한낱 나의 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왜놈들에게 항거하여 이렇게 용감하게 탈출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청년들 대표로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다. "저희들은 왜놈들의 통치 아래서 태어났고 또 그 밑에서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이 임시정부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우리가 안으로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감격, 그 태극기에 아무리 경례를 하여도 손이 내려지지를 않고, 또 하고, 영원히 계속하고 싶었습니다."('돌베개') 답사를 듣던 김구가 "흑!" 하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장내는 이내 울음바다가 됐다.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도 걱정이 앞섰다. 이승만은 8월 15일 임병직·장기영·한표욱 등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이승만과 한미외교')고 말했다.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앞으로 벌어질 '내전'을 우려했다.
이승만은 미·소·중·영 정상에게 승전 축하 전보를 보냈다. 감사 인사와 함께 각 나라에 맞는 요청 사항을 적었다. 트루먼에게는 "우리에게 매여 있던 쇠줄을 벗게 된 데 대하여 미국에 영구한 감사를 지닌다"고 말하고 "우리의 민국 정부는 미국 제도를 모방하였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에게는 "3000만 한국인이 건설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국가 한국이 소비에트공화국과 극동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장제스에게는 "중국과 한국은 동일한 전후 문제가 있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국 총리 애틀리에게는 "명목상의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을 노리개로 이용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독립된 통일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와주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독립된 통일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은 8월 21일 트루먼과 장제스에게 다시 전보를 쳤다. 장제스는 한국 독립에 지지를 나타냈지만, 트루먼은 답신하지 않았다. 트루먼에게 보낸 이승만의 전보는 "한국 국민은 미군만을 한국의 점령군으로 환영하고 있다. 한국 국민은 단일 민족인 자국민을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초래할 공동 신탁통치나 공동 위원단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의 우려는 훗날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비행편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해방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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