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 터 깊고 길쭉한 구덩이 3개
흙 퍼낼수록 악취, 알고 보니 …
오물은 흐르는 물 따라 성 밖으로
발굴 때 검은 흙속엔 기생충 알
산자락의 낮은 구릉에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성토해 궁장(왕궁 담장) 밖보다 3~4m 높게 만들었다. 위엄과 권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을 터다. 규모 역시 부여의 왕궁 터인 관북리 유적과 비슷한 크기에다 구조도 같다.
동서로 490m, 남북으로 240m 가량의 장방형 구조로 담을 쌓고 그 안에 남쪽으로 정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지었으며, 북쪽에는 후원과 수공업 공방을 두었다. 후원은 백제 정원으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인데,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물을 가두는 형태가 아니라 물길을 만들어 흐르게 하고 주변을 기암괴석과 자갈로 꾸몄다. 기암괴석 중에는 중국산 수석도 있다. 구릉 아래 쪽으로 폭이 3~7m, 길이가 485m에 이르는 대형 수로가 동쪽과 북쪽, 서쪽을 감싸며 흐르도록 설계했다. 이를 위해 수량 조절용 지하 배수시설이 설치된 저수조와 U자형 환수구, 곡수로 등을 만들었다.
공방터에서는 금·은·유리 제품과 이들을 만들기 위한 도가니, 송풍관 같은 제조시설이 발견됐다. 아마도 왕실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공방이었을 것이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공방 터 남쪽에서 발견된 화장실이다. 동서 방향으로 깊고 길쭉한 구덩이를 판 화장실 3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0.8m, 폭이 1.8m, 깊이가 3.4m나 된다. 왕성 내에 거주했던 궁인과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일 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출간한 『백제의 왕궁을 찾는 20여 년의 여정』(2011)이 왕궁리 화장실 발굴 당시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처음 발굴 당시 조사원들은 이곳을 곡식이나 과일 등 식료품을 저장하던 창고로 생각했다고 한다. 구덩이 바닥에 수분과 유기물을 함유한 검은 흙이 쌓여있었고, 흙 속에서 짚신과 식물 씨앗, 나무 막대기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사원들은 비좁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 온몸에 흙이 묻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조사에 몰두했다. 발견된 나무 막대기는 창고에서 물건을 재는 데 쓰였을 법한 자(尺)로 생각하고 깨끗이 씻어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흙을 퍼낼수록 악취가 심해졌다. ‘아무리 곡식이 썩었다고 쳐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라는 의심이 커져갈 무렵,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방문한 고려대 이홍종 교수가 “화장실 같다”는 의견을 냈다. 일본 유학시절 봤던 고대 화장실 유적과 흡사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구덩이의 흙을 고대 의대로 보내 생물학 조사를 했다.
어쨌거나 기생충 조사 결과는 백제인들의 식습관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도 제공했다. 발견된 기생충은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감염되는 회충과 편충에 집중됐고, 육식을 통해 감염되는 조충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함께 민물고기를 먹어서 감염되는 간흡충도 발견됐다. 백제인들이 주로 채식을 했으며, 육류보다는 주변 하천에서 잡을 수 있는 민물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의 화장실은 당시로 볼 때 최신식의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시체말로 ‘푸세식’이다. 구덩이에 걸쳐 놓은 두 개의 나무 판자에 발을 딛고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보는 방식이다. 구덩이에 떨어진 오물은 흐르는 물에 의해 하수도로 모이고 이어 성 밖으로 배출되는 위생적인 시스템이었다.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는 것이 불결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물 항아리에 담아두고 헹궈서 닦았으니 당시로서는 깨끗하다 할 수 있었고, 구덩이에 빠뜨리지만 않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테니 나름 친환경적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