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중국 명산,명소,문화를 찾아서

쌍백 운동과 반우파 투쟁 그리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

화이트보스 2019. 10. 25. 14:29


쌍백 동과 반우파 투쟁 그리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

그러던 중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진행되어 영원할 것 같았던 스탈린에 대한 신격화가 한순간에 붕괴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체제 내에 일종의 ‘해빙기’가 찾아왔고, 중공업 우선과 고도의 중앙집권 관리체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같은 해 4월 마오쩌둥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중국 공산당원들이 외부인이 표명한 합리적인 견해를 재고하고 서구 사회에 대해 더 연구하며 외국어를 배울 것 등을 주장했다. 또 5월 2일에는 당 지도자들만 모인 회의에서 “백 가지 꽃을 일제히 피우고(百花齊放)”, “백 가지 학파의 의견이 일제히 분출되어 서로 다투도록 하자(百家爭鳴)”는 의견을 제시했고, 5월 26일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 육정일)가 이를 공식적으로 공표하였다. 같은 해 여름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62세의 몸으로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기 위해 양쯔 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6월에 폴란드에서 발생한 정치 폭동을 우려 섞인 눈길로 바라보았고, 가을로 접어들자 제1차 5개년 계획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하나씩 불거지면서 이들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6년 9월 15일부터 27일에 걸쳐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것은 신중국 수립 후 최초이자 1945년에 제7차 대회가 열린 지 11년 만에 열린 것으로 그동안 중국 공산당이 이룬 위대한 승리와 그 성과를 내외에 크게 과시하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류사오치가 정치 보고를 하고 덩샤오핑이 당 규약 개정 보고를 하는 등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마오쩌둥은 겨우 개회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새로운 당헌의 초안에서는 마오쩌둥 사상의 중요성에 대한 모든 언급이 사라졌고,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숭배적 색채가 사라졌다.

1956년 10월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했고, 비슷한 시기에 티베트에서도 중국군의 주둔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리한 상황에서 베이징에서의 마오쩌둥의 입지는 좁아졌고, 그만큼 마오의 조급증 역시 더해갔다. 마오쩌둥은 이제 본격적으로 추진될 경제 개발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사회주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식의 이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른바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쌍백 운동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최고 국무회의 제11차 확대회의 석상에서 〈인민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쌍백 운동’의 필요성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백화제방 · 백가쟁명 · 장기공존 · 상호감독’이라는 구호는 어떻게 제기된 것일까. 이것은 중국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하여 제기된 것이고, 사회주의 사회에는 여전히 각종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제기된 것이며, 경제와 문화를 급속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국가의 절실한 요구에서 제기된 것이다. 백화제방 · 백가쟁명의 방침은 예술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를 촉진하는 방침이며,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의 번영을 촉진하는 방침이다. 예술에서도 다른 형식과 풍격은 자유롭게 발전될 수 있으며, 과학에서도 서로 다른 학파는 자유롭게 논쟁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행정적인 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하나의 풍격이나 학파를 밀고 나가고, 다른 풍격이나 다른 학파를 금지하는 것은 예술과 과학의 발전에 해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술과 과학에서의 시비 문제는 마땅히 예술계와 과학계의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고, 예술과 과학의 실천을 통해서 해결해야지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 류사오치는 참석하지 않았으며 연설이 금방 출판되지도 않았다.1) 하지만 ‘쌍백 운동’을 제기하는 동시에 마오쩌둥은 하나의 단서를 달았다. 1957년 3월 12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전국선전공작회의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放)’이냐 ‘수(收)’이냐? 이것은 방침 문제이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기본적인 동시에 장기적인 성질의 문제이지, 잠정적인 성질의 방침은 아니다. 동지들은 토론 중에 ‘수’를 찬성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러한 견해가 매우 옳다고 본다. 당 중앙의 의견은 ‘수’일 수는 없고, ‘방’이어야 한다.

우리의 국가를 영도할 때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 혹은 두 가지 상이한 방침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방(放)’과 ‘수(收)’이다. ‘방’이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의견을 말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말하고, 감히 비평하고, 감히 쟁론하도록 내버려두되, 잘못된 의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해한 요소가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각종 의견 사이의 상호 논쟁과 상호 비평을 발전시키고, 기왕 비판의 자유를 허용한 바에야 비판자를 비판하는 자유를 허용하고, 그릇된 의견에 대해서는 위압적으로 복종케 하는 게 아니라 이치로 사람을 복종케 해 설복시키는 것이다. ‘수’라는 것은 사람들이 상이한 의견을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또 그릇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것을 발표하는 경우 ‘일격에 때려눕히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모순을 확대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방침 즉 ‘방’인가, 아니면 ‘수’인가, 어찌 되었든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방의 방침을 채택한 것은 이것이 우리 국가를 공고하게 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일련의 발언에 고무되어 4월부터 공산당원의 관료주의와 분파주의,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제2차 정풍 운동이 전개되었다. 5월 1일부터 6월 7일까지 약 5주간에 걸쳐 지식인들이 당 내의 오류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른바 쌍백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당 중앙은 ‘말하는 데 죄를 묻지 않는다(言者無罪)’는 구호 아래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비판의 범위가 확대되어 마오쩌둥의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베이징 대학의 중심부에 ‘민주의 벽’이 설치되어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가득 채워지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쌍백 운동’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6월 8일 《인민일보》에는 “공산당의 정풍을 돕는다는 구실 하에 소수의 우파분자가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의 지도권에 대해 도전하고 있으며, 공공연히 공산당에 대해 ‘물러가라’고까지 떠들어대고 있다”는 글이 실렸다. 그 다음날도 《인민일보》의 사설에서는 “적극적인 비판도 필요하지만 올바른 비판도 필요하다”고 하여 공산당을 부당하게 비판한 자들에 대한 재비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6월 19일에는 마오쩌둥 자신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자신의 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발표했다.

7월이 되자 중국 공산당은 이 운동을 ‘반사회주의적 독초’를 일소하기 위한 반우파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선언하고 당 비판자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30만여 명이 넘는 지식인들이 우파로 찍혀 노동수용소나 감옥에 들어갔고 농촌으로 쫓겨갔다.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방려지)와 작가 딩링(丁玲, 정령)을 비롯한 문인, 사회과학자, 자연과학자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것은 신중국 수립 이후 중국 혁명의 전 과정에서 그 어느 것보다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계기로 이제까지 중국 혁명에 함께 동참했던 민주적인 당파를 포함한 공산당 이외의 당파에 속한 지식인들을 배제했으니, 이것은 신중국 수립 이후에도 견지되었던 ‘민족통일전선’의 논리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가 강화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복수 정당의 존재라는 건국 초기의 원칙은 완전히 포기되었다.

1957년 11월 마오쩌둥은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에 앞서 7월에 소련은 대륙간탄도탄(ICBM)의 실험에 성공했고, 6주 후에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했다. 마오가 소련을 방문하기 직전인 10월 15일에는 ‘중 · 소 신군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의하면 소련 정부는 원자탄의 견본과 그 제작에 관한 기술적 자료를 중국에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잇따른 과학적 성취에 고무되어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소련의 도움으로 머지 않아 중국도 핵무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궁극적으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한 외국 정치가(인도의 총리 자와할랄 네루)와 논쟁을 하였다. 그는 만약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전 인류는 멸망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나는 극단적인 경우 최악의 사태에 이르게 되면 인류의 반이 죽고 나머지 반만이 남게 될 것이며, 제국주의는 소멸하고 전 세계는 사회주의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S. 슈람,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277쪽.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고, 원자탄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이것의 사용에 신중을 기했던 소련의 지도자 흐루시초프의 우려를 낳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과연 마오쩌둥의 일련의 제안들은 대미 평화 공존을 지향하는 흐루시초프에 의해 냉대를 받았다. 마오쩌둥 역시 소련 측의 태도에 적잖이 실망한 채 귀국했다. 이때의 일은 이후 전개될 중 · 소 분쟁의 빌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도 마오쩌둥의 대외 노선은 1958년 여름의 중동 위기나 타이완 해협 위기 등의 긴장 국면과 1959년 가을의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에서 잘 나타나듯이 제국주의 세력과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강경 외교로 치닫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고민은 이러한 대외적인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국내의 상황 역시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점진적으로 진행하고자 했던 경제 발전 계획은 장기적인 국면에 접어들면서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폐해가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참가한 이래 인간의 의지와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에 대한 뿌리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소련에서 돌아온 뒤 마오는 그 해 12월에서 다음해인 1958년 4월까지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직접 민중과 접촉해 민중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그 결과 마오는 대약진 운동과 영구혁명이라는 두 가지 슬로건으로 정리되는 새로운 급진 정책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대약진 운동이 공표된 것은 1958년 5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8전대회 제2차 회의에서였지만 실제로는 그 전해인 1957년 가을에 시작된 ‘수리(水利) 건설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노동력의 대량 투입에 의한 인해전술식 사회주의 건설 방식으로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도에서 추진된 사업으로 연 인원 1억여 명이 참여해 780만 헥타아르의 토지가 개간되었다.

국내 여행에서 돌아온 마오쩌둥은 같은 해 5월 5일부터 23일까지 앞서 말한 8전 대회 제2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류사오치는 ‘활동 보고’를 통해 마오쩌둥의 말을 직접 인용해가며 대약진 운동의 취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실상 마오쩌둥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류사오치가 이렇게 한 것은 ‘반 우파 투쟁’에서 나타난 민중들의 호응이 마오쩌둥에게로 향한 것을 확인했고 동시에 마오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위상이 확고해져가고 있는 와중에 그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대약진 운동’과 ‘영구혁명2) ’의 필요성을 천명했다. 우선 영구혁명에 대해 마오쩌둥은 1958년 1월에 초안된 「공작 방법 60조(工作方法六十條)」라는 고참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내부 문건의 제21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영구혁명, 우리의 혁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1949년 전국적인 범위에서 정권 탈취를 개시한 이래 반봉건적인 토지 개혁이 이어졌고, 토지 개혁이 완성되자 농업합작사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사영 공상업과 수공업의 사회주의로의 개조가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삼대 개조, 곧 생산수단의 소유제 방면의 사회주의 혁명은 1956년에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작년에 진행된 정치 전선과 사상 전선상의 사회주의 혁명3) 이 그 뒤를 이었다. 이 혁명은 금년 7월 1일 이전에 기본적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완결되지 않았다.······우리의 혁명은 싸움과 마찬가지로 한 차례의 승리를 얻어낸 뒤에는 곧바로 새로운 임무가 제출되어야 한다.······금년부터 정치 전선과 사상 전선상의 사회주의 혁명을 계속 완수함과 동시에 당 사업의 중점을 기술 혁명에 놓아야 한다.

이러한 영구혁명에 대한 자신감은 마오가 갖고 있는 중국 인민의 개조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과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있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마오는 중국이 공업과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대국들을 따라잡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마오가 같은 해에 발표했던 「전국 농업발전 요강」이라는 문건에 집약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과 ‘대약진’이 결합되고 뒤에 ‘인민공사’와 결합된 삼면홍기(三面紅旗)라는 슬로건이 나오게 되었다.

바로 이 ‘삼면홍기’가 흔히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는 것의 실체인 셈이다. “대담하게 마음먹고, 항상 높은 목표를 지향하며, 좀더 많이, 좀더 빨리, 좀더 좋게, 좀더 절약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로 내세워졌고,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되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근대공업과 전통공업 등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두 발로 걷는다(讓兩條腿走路)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1958년 여름 인민공사가 실험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을 때 마오는 직접 농촌을 방문하고 돌아와 농업집단화를 통한 생산력 증강이 사회주의화를 가속시킨다고 주장했다. 1958년 8월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의 휴양지에서 열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인민공사의 경영 하에 농업 생산이 많게는 수십 배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나와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그때까지 이 정책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던 중앙위원회는 이러한 일련의 성과들을 추인하면서 8월 29일에 〈농촌에 인민공사를 설립하는 것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인민공사가 ‘대약진’ 정책의 실행 단위로 조직되기 시작해 그 해 말에는 중국 전역에 740만 개의 합작사가 2만 6,000개의 공사로 통합되어 전체 농민 인구의 99퍼센트가 이에 속했다. 이와 동시에 “두 발로 걷는다”는 방침에 따라 대도시 중심의 대형 근대공업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작고 재래의 기술을 이용한 지방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이것은 또 대중 운동으로도 전개되었으니, 용적이 불과 30~50입방미터에 불과한 소형 용광로인 이른바 토법고로(土法高爐)4) 가 전국의 농촌 지역에 200만 기나 건설되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에 발맞추어 식량 생산과 선철 등의 생산 계획 또한 배증되거나 조기 달성 등의 압력이 각 부분과 각 지역 정부에 가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약진 운동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중국 공산당은 운이 없었던 것일까? 대약진 운동의 과도한 목표 설정으로 인해 공업 제품과 식량에 이르는 기본 건설 투자가 적정선을 넘어 경제가 과열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철강 생산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니 대형 제철소는 물론이고 ‘토법고로’에도 전국적으로 5,0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어 밤낮으로 제철과 제강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력뿐 아니라 석탄 생산과 그 수송, 전력의 공급이 한쪽으로만 편중되는 등 국민 경제의 각 방면에서 일종의 병목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대했던 철강 생산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농민들이 단지 철강 증산을 위해 자신들의 농기구를 손으로 만든 허접한 용광로에 던져넣어 증산에는 성공했으나, 그렇게 생산된 선철 가운데 30퍼센트 가량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수치상의 목표 달성이었기에 상부에서 내려온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거짓 보고들이 계속 올라갔고, 이에 고무되어 중앙에서는 당초의 계획을 상향 조정해 내려보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대약진 운동’으로 국민 경제가 크게 ‘약진’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농업 분야에서의 파탄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중국의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의 특성을 무시한 공동 식당과 공동 보육, 절대 평등주의를 통한 대규모 집단화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감소시켰다. 여기에 더해 농민들은 자신의 본업인 농업 이외에도 ‘토법고로’ 등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혹사당했다. 결정적으로 1959년부터 3년 간 이어진 심각한 자연재해로 전국의 농촌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각지에서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 동북의 공업도시에서는 옥수수나 수수의 배급조차 감소해 사람들은 휴일에는 들에 나가 수확 후의 낱알들을 줍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나마도 없어 사람들이 굶어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외적으로도 1958년 여름의 타이완해협 위기 당시 소련은 중국의 모험주의적인 단기 결전 정책에 의문을 표명했으며, 중국이 진먼다오(金門島, 금문도)를 포격했을 때도 지원을 거부했다. 급기야 1959년 6월에는 57년에 맺은 ‘중 · 소 신군사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에 대한 원폭 미사일의 견본과 기술 자료의 제공을 거부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핵무기를 포함한 소련의 원조가 절실했지만, 흐루시초프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발등에 붙은 불이 더 급했던 것이다.

같은 해 세계 각국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이어졌지만, 중국은 어느 것 하나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3월에 티베트에서 무장 반란이 일어나자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티베트인들이 살상되었고 수많은 사원들이 파괴되었다. 이때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으며, 인도는 중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중국은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이른바 죽의 장막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듯 대약진 정책의 좌절, 이후 3년 간 이어지는 자연재해, 중소 대립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한 중국 공산당은 어쩔 수 없이 대약진 운동을 재고해야만 했다.

티베트의 간덴사원 전경
티베트의 간덴사원 전경

당시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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