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 정국 읽는 국회법 키워드
일명 ‘국회선진화법’이라고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던 2012년 5월 2일 본회의에서 김영선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이 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한국당이 본회의로 넘어온 199개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filibuster·무제한 토론)를 신청해서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해 12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려 개의를 선언하고 있다. 이날 본회의는 야당의 불참으로 인한 의결정족수 미달로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제동이 걸려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의 제안설명을 끝으로 산회됐다. [뉴스1]](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2/04/1400e18b-d716-41e2-8878-ec2e2f663adf.jpg)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해 12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려 개의를 선언하고 있다. 이날 본회의는 야당의 불참으로 인한 의결정족수 미달로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제동이 걸려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의 제안설명을 끝으로 산회됐다. [뉴스1]
이제 또 한 번의 ‘동물 국회’를 재연할 날짜를 정하는 일만 남았다. 고성과 몸싸움은 한국 국회가 보여주곤 했던 장면이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막아보겠다며 도입한 국회선진화법의 거의 모든 조항(무제한 토론과 안건의 신속처리(패스트트랙)는 2012년 5월 30일, 예산안 자동 부의는 2014년 5월 30일부터 시행)이 활용되는 무대라는 게 다른 점이다. 싸움의 규칙 몇 가지를 이해하면 이번 동물국회 관전 포인트가 선명해진다.
![2012년 5월 2일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원내대표와 김진표 당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원내대표(왼쪽부터)가 국회 귀빈식당에서 국회선진화법 등 법안 처리와 관련한 논의를 위해 회동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2/04/028fc2d9-0ca9-4566-b521-13382764ed95.jpg)
2012년 5월 2일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원내대표와 김진표 당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원내대표(왼쪽부터)가 국회 귀빈식당에서 국회선진화법 등 법안 처리와 관련한 논의를 위해 회동했다. [중앙포토]
국회에 전운(戰雲)이 감도는 것은 선진화법에 있는 자동 부의와 자동 상정 조항 때문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지난달 27일, 내년도 예산안은 지난 1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및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 4건은 지난 3일 모두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다. 부의는 해당 상임위 심사를 마친 법안을 본회의 안건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고, 본회의에서의 상정은 해당 안건을 토론 의제로 올린다는 의미다. 부의와 상정은 원래 국회의장의 능동적 권한 행사다. 부의하고 나면 의장은 언제든 상정할 수 있다. 그러면 상임위는 그 안건에 더는 손을 댈 수 없다.
선진화법으로 국회의장의 행위가 필요 없는 자동 부의와 자동 상정 제도가 도입됐다.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된 법안들의 자동 부의와 자동 상정은 국회법 85조의2가, 예산안과 그에 딸린 부수법안의 자동 부의는 국회법 85조의3이 법적 근거다.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된 법안은 지정일부터 18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법제사법위로 넘어가고, 이후 90일이 지나면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날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으면, 이후 열리는 첫 본회의에 자동 상정된다.
지난해 10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27일 패스트트랙 법안이 된 뒤, 상임위·법사위에서 한 번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채 지난달 22일로 본회의 상정 요건인 330일을 채웠다. 다음 본회의가 열리면 자동 상정된다. 지난 4월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공수처법·수사권조정법 등은 자동 부의까지만 돼 문희상 의장이 상정을 위한 ‘디데이(D-Day)’를 정해야 한다.
문 의장은 지난달 12일 “국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따라서 부의(12월 3일)한 이후에는 빠른 시일 내 국회법에 따라 상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예고한 3일은 이미 지났다. 지난 2일로 헌법 54조2항이 정한 처리 시한(다음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을 넘긴 예산안도 국회법 85조의3 1·2항에 따라 지난 1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된 상태다.
사람이 빠진 채 자동으로 되는 건 여기까지다. 법안은 자동 상정 후 표결을 강제하는 내용이 없고, 예산안은 부의까지만 자동일 뿐 상정에는 국회의장이 나서야 한다. 필리버스터는 이 지점을 파고드는 전략인 셈이다. 국회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표결을 강제하는 내용이 없어, 야당이 무더기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데 성공하면 법안 처리를 무산시킬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단 예산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12월 1일 자정까지만 가능하다(국회법 106조의2 10항).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 원안이 자동 부의되면서 예결위원들의 손을 떠나 여야 합의 처리가 어려워진 상황이다. 지난 2일 “한국당과 협의가 여의치 않으면 예산안도 한국당을 뺀 ‘4+1’(민주당·바른미래당(‘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제외)·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에서 할 수도 있다”는 전해철 민주당 예결위 간사의 발언도 이 같은 상황 인식에서 나온 압박카드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에 자유한국당이 비상의원총회에 사용할 '필리버스터 보장' 등의 문구가 적힌 손팻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2/04/4e9f79c9-07e0-4596-9907-8474e71f327a.jpg)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에 자유한국당이 비상의원총회에 사용할 '필리버스터 보장' 등의 문구가 적힌 손팻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우리는 아직 필리버스터 대상을 당내에서 논의하지 않았다”며 “우리가 주장하는 5대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만 보장해달라”고 말했다. 번역하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199건 중 실제로는 5개 법안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국당이 이러한 ‘연막작전’을 펼 수 있는 것도 국회법 106조의2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필리버스터 요구서가 국회의장에게 전달되면, 국회의장은 무조건 무제한 토론을 실시해야 한다. 토론자 1명이 해당 법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이 없다. 한 안건당 의원 1명이 한 차례만 말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제한이다. 무제한 토론은 더는 발언할 의원이 없을 때 종료되고, 바로 표결에 들어가야 한다. 199개 중 어떤 안건을 필리버스터 대상으로 삼을지는 한국당이 본회의 현장에서 결정해도 그만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1시 57분, 두 상자 분량의 필리버스터 요구서가 국회 의사과에 접수되는 동안에도 민주당은 당일 본회의에 자동 상정되는 유치원 3법에 대한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대비책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필리버스터의 무더기 접수 사실을 알게 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그날 오후 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필리버스터를 그 지경으로 할 거면, 정치 도의상 미리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한다.
국회는 각 당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전이 치열한 곳이다. 100명 가까운 의원(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필리버스터 신청의 보안 유지는 어렵다. 한국당의 ‘기습 작전’이 가능했던 건 ‘당론 발의’ 형식이어서다. 당론 발의는 개별 의원의 서명을 당 대표 직인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다. 한국당 안에서도 어떤 형태의 필리버스터가 언제 접수될지 몰랐던 의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 홀에서 '민생파괴! 국회파괴! 자유한국당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2/04/a61ed9a3-d157-4b9f-ae5c-229a74ad9f02.jpg)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 홀에서 '민생파괴! 국회파괴! 자유한국당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임시국회 쪼개기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 ‘정공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종결 동의를 통과시키려면 177명(현 의석수 기준 재적의원의 5분의 3)이 필요한 것도 문제지만, 종결 동의가 제출된 뒤 24시간 뒤에야 종결 동의 표결이 가능하다고 규정한 국회법 106조의2 6항 때문이다.
다음 전략이 임시국회를 쪼개는 것이다. 임시국회는 헌법 47조 1항에 따라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정기국회 종료 후 하루 이상의 단위로 계속해서 열 수 있다. 임시회 회기(기간)는 소집 후 처음으로 열리는 본회의 의결로 결정한다.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 동의만 있으면 돼서, 한국당을 제외한 의결이 가능하다. 한 회기가 끝날 때마다 한 건의 필리버스터를 종결하고 다음 회기에 지체 없이 표결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여야 ‘4+1’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이와 관련,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4일 오전 기자간담회에서 “원내대표급의 ‘4+1’ 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안한다. 바른미래당, 대안신당 추진그룹, 정의당, 민주평화당 등 정당과 정치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저와 민주당의 제안에 대답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완벽한 대응은 될 수 없다. 한 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회기가 끝나면 종료되지만, 나머지 안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그대로 살아남아 있어서다. 일괄 상정을 통한 표결도 신청된 필리버스터를 전부 하겠다고 나서면 불가능하다는 게 국회법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여당이 바라는 대로 의사일정을 ‘예산안→선거법→공수처법 등→유치원 3법 등 기타 법안’ 순으로 짤 수 있느냐도 문제다. 여야 원내대표 간 타협이 없는 이상 오롯이 국회의장의 몫인데, 국회의장이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안고 갈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필리버스터 법안, 누가 발의했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번 필리버스터 신청 안건 중에는 한국당 의원들이 대표발의한 법안이 26건이나 된다. 국군 파병 연장동의안과 대체복무제 도입, 청년기본법, 포항지진특별법 등 비쟁점 법안도 많다. 한국당이 “필리버스터 대상은 5건”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다만,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은 “선거법만 뚫리면 한국당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버스터 방어선’이 하나씩 뚫릴 때마다 한국당이 점점 필리버스터의 동력을 잃어갈 것이란 전망이다.
임장혁·하준호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