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서옹스님휘호

"있는 곳이 어디든 주인이 되라"
禪ㆍ敎겸비한 우리시대 최고 禪僧
대한불교 조계종 제5대 종정 역임
12월 13일 입적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당 상순대종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선승(禪僧)’이자, ‘현대 한국불교를 지탱해온 큰 기둥’이었다. 이사(理事)에 두루 원융하고 선교(禪敎)를 겸비한 서옹스님은 1912년 10월10일 충남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495번지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상순(尙純), 속성은 이(李)씨.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총명했던 스님은 7세 때인 1918년 갑자기 부친을 여의자 혼자 생각에 잠기기를 즐겨했다.
논산의 연산보통학교를 다니다 서울 죽첨보통학교(현 금화학교)로 전학한 서옹스님은 1928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그해 조부와 모친마저 세연(世緣)을 마감하자, 청년 상순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에 대해 더욱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는 일제(日帝)치하. 청년 상순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문제까지 고뇌했다. 그러던 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불교서적을 탐독하다 점차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각황사(조계사 전신)를 찾게 됐고, 그곳에서 중앙포교사로 있던 김대은 스님을 만나 인생과 우주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러다 김대은 스님의 소개로 1932년 평생의 은사 송만암스님을 친견하고, 만암스님의 덕화(德化)에 감복한다.
결국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32년, 어릴 적부터 고민했던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 상순은 속연(俗緣)을 마감하고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했다. 득도와 함께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해 불교에 대한 공부를 심화시켰다.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과 함께 백양사 영어 외전 강사로 있다, 1937년부터 2년간 오대산 한암선사 회상(會上)에서 참선 정진에 몰두하기도 했다.
오대산에서 나름의 견처(見處)를 얻은 스님은 1939년 도일(渡日), 일본 경도에 있는 임제대학에 입학해 선학연구에 정진했다. 임제대학에서 스님은 선 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히사마쯔 신이치(久松眞一)박사와 평생 지속될 돈독한 교분을 맺는다. 실참(實參)을 겸한 스님의 선학 연구는 졸업 논문에서 특히 빛을 보는데, ‘진실자기(眞實自己)’라는 논문을 통해 스님은 당시 일본 불교학계를 주름잡던 니시타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 등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 일본 불교학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진실자기’란 논문을 일본 각 대학이 교재로 채택, 일본 불교학계에 널리 읽혀졌다.
스님은 일본에서 선학연구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임제종 총본산 묘심사 선원에서 3년간 안거하며 “제불(諸佛)의 본원(本源)과 일체보살들이 수증(修證)한 본각진성(本覺眞性)을 깨닫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다. 귀국 후, 해방공간과 정화운동의 시기를 수행으로 극복한 스님은 1962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 겸 조실로 추대되며, 대중교화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1964년 무문관(無門關) 초대 조실을 거쳐, 동화사⋅백양사⋅봉암사⋅대흥사 등 제방선원에서 조실로 있으며, 눈 푸른 선객들을 제접⋅지도하며 선장(禪匠)들을 양성했다. 납자들을 가르치면서도 스님은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백장청규를 철저하게 지켰고, 대중과 더불어 공양하고, 대중과 함께 운력하는 등 자오자증(自悟自證)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을 손수하고, 찾아오는 참문객(參問客)들을 일일이 자비롭게 맞아주었다. 찾아온 사람은 승속을 불문하고 만나, 가르침을 주었다.
이사에 원융하고, 선교를 겸비한 스님을 종도(宗徒)들은 가만 두지 않았다. 한국불교와 교단 발전을 진두지휘하도록 1974년 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한 것이다. “조선시대 500년과 일제를 거치며 피폐해진 승풍(僧風)을 진작(振作)하고, 화합으로 교단을 이끌 분은 서옹스님 뿐”이라는 종도들의 요구를 스님은 외면하지 못하고 종정직을 수락했다. 평소 “닭 벼슬보다 못한 것이 승직(僧職)”이라며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종도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을 스님은 거절할 수 없었다.
종정에 취임한 그 해, 서옹스님은 선풍을 진작하고 흐트러진 선문(禪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867)가 남긴 <임제록(臨濟錄)>을 연의(演義)한 <임제록연의>를 세상에 내놓았다. 무위진인(無位眞人. 걸림 없는 참 사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면 서는 곳마다 참되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임제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지 못한 상태. 서옹스님이 <임제록>을 처음으로 쉽게 풀어 선문(禪門)에 보급한 것이다.
종정에 취임한 다음해인 1976년 5월8일 서옹스님은 스리랑카를 방문,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진 불치사(佛齒寺)를 참배하고, 스리랑카 대통령⋅수상⋅종정과 만나, 양국간 우의를 증진키로 약속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우리나라와 스리랑카가 외교관계를 맺게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방문 당시 서옹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세계불교승가회에 가입시켰으며, 스리랑카 국립 푸리베니아 대학에서 주는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종단 직책에서 물러나 철저한 구도자의 길을 걷던 서옹스님은 은사인 만암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1996년 백양사를 총림으로 승격시키고, 방장에 취임했다. 방장에 추대된 스님은 1998년 8월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백양사에서 무차선회를 80여년 만에 복원⋅개최, 물질문명에 사로잡힌 인류에 새로운 구원의 사상적 씨앗을 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00년에도 백양사에서 무차선회를 열어 문명과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법어(法語)를 통해 내리기도 했다. 평생 동안 선풍진작과 후학양성, 인류구원의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선사상을 제창해온 서옹스님이 2003년 12월13일 세수 92세, 법랍 7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저서로 <선과 현대문명><절대 현재의 참 사람> 등이 있다.
[출처] 수처작주/서옹스님휘호|작성자 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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