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진도사람 박희수사장의 성공이야기섬에서

화이트보스 2019. 12. 29. 14:41


호남인 제주이주 50주년 특별기]<13>바닥에서부터 일어난 사람들-진도사람 박희수사장의 성공이야기섬에서 희망을 찾았다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승인 2014.10.14  11:40:52
트위터페이스북 네이버구글네이버밴드
  
성산포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성산일출봉에서 멀리 제주시 앞바다가 아스라히 보이고 있다. 박희수 사장이 이 성산포에서 이룬 성공은 많은 전남 사람들의 희망이자 모델이다.


몸만 가지고 들어간 섬
진실이 섬사람들의 마음 열게 해
성산포 이장당선된 박희수 사장
제주도 성공 큰 사례로 꼽혀



오늘날 제주도와 육지의 가장 큰 문화적 특징이 있다면 단연 마을 이장문화를 들수 있다. 강진에서도 이장선거가 치열한 곳이 적지 않지만 제주도는 완전히 판이 다르다.

이장선거가 군의원 선거 못지 않다. 바다를 끼고 살면서 일찍이 마을단위 공동체가 발달한 제주도의 마을들은 마을 공동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마을에는 마을공동 소유 땅이 많이 있고, 이것들이 개발되면 마을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형태다.

그러다 보니 이장선거가 아주 치열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산포에 살고 있는 진도출신의 박희수(70)사장의 인생역정은 아주 특별하다. 지난달 말 최근 필자는 성산포에서 박희수 사장을 세 번째 만났다. 한번은 1997년이였고 2008년이였다. 그렇다 보니 첫 만남때 53세였던 박사장은 이제 70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출봉 아래 주차장에서 그를 만났다. 주차장은 난리렸다. 중국 관광객들을 실은 대형버스들이 쉴새없이 들어오고 쉴새없이 나가고 있었다. 

  
박희수 사장이 지난달 성산포 자신의 집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희수 사장은 혈혈단신 제주에 건너와 2008년 이곳 성산포의 이장을 지냈다. 진도군 임회면 산항리 출신으로 19살에 제주도에 들어간 박씨가 32년만에 제주에서 가장 큰 마을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장이면 호구조사나하는 면사무소 잔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성산포 이장은 그게 아니다.

보기좋은 2층짜리 사무소건물들이 있고 직원이 6명에 98년 당시 이장 월급이 150만원이다. 하루 5천여 명의 관광객들이 돈을 뿌리고 있는 데다 주민수만 3천명이 넘는 마을의 실세 중 실세다. 무엇보다 성산포 이장 박씨는 국회의원선거 뺨치는 치열한 선거전을 통해 당선됐다. 박씨는 총 유권자 1천 760명이 참여한 선거에서 37표차로 제주본토박이 후보를 눌렀다. 제주도 전역에서 단연 화제거리가 된 일대 사건이었다.

호남출신 인사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은 있으나 그야말로 마을 주민 한명 한명과 돈독한 인간관계가 필요한 이장에 외지인이 당선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성산포리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는 바로 투박한 전라도사람 그 자체였다. 박사장은 다시 97년 일을 회고했다.

“어려운 선거였지요. 현직 도지사까지 개입해 본토박이를 당선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후보가 바로 저라고 판단해 주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듣는 사람이 마치 국회의원이나 시장 군수 선거의 무용담을 듣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성산포 이장선거는 치열했다. 입후보를 결정한 과정하며 선거 과정에서 전라도사람이라고 뒷말을 하고 다니던 사람들은 설득한 일. 고위직 공무원들까지 나서 자신을 낙선시키려는 것을 이겨낸 일 등은 마치 자신의 32년 제주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 했다는 게 박씨의 회고담이다.

선거결과는 말 그대로 ‘신승’. 박씨의 승리를 제주도의 모든 호남사람들이 기뻐해줬다. 어떤 사람은 “원이 풀렸다”며 좋아했다. 박씨의 이장당선은 호남사람도 마을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와 함께 제주사람들이 이제야 전라도사람들을 자신들의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산 증거였다.

박사장은 이장 초창기에 상대편 후보진영을 많이 배려해 주었다. 도청이나 군청에 가서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큰마을의 이장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이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당시 강태훈 남제주군수가 박사장을 많이 도와주었다. 마을의 사업도 많이 했다.

그 결과 임기 3년 동안 내무부장관상을 포함해 50여 개의 크고 작은 상장과 상패를 개인, 또는 마을 이름으로 받을 수 있었다. 임기가 끝나갈 무렵 한번 더 이장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박사장은 협심증 때문에 가슴을 여는 대수술을 받았다. 박사장은 요즘 성산일출봉과 가까운 곳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며 여생을 즐기고 있다.

박사장은 필자를 차에 태워 성산포일대를 구경시켜 주었다. 자신이 이장을 했던 마을을 구경시켜주는 박사장의 모습은 당당하지만 늘 겸손했다. 박사장은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여기는 해남사람 누가 하는 횟집이다”, “여기는 진도사람 누가 하는 기념품 가게다”, “여기는 영암사람 누가 하는 토산품가게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박사장은 “이제 제주도에 사는 전라도사람들도 굶지 않고 살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타지에서 성공한 사람은 항상 역정이 있는 법이다. 19살 어린나이로 섬에 들어 온 박사장의 역정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모든 호남사람들의 이민사일 것이 분명했다. 박사장은 6·25때 아버지를 전장에서 여윈 후 다시 1년 후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극도로 어렵게 청소년기를 보낸 박사장은 고향에서 가장 먼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곳이 제주도였다. 지금은 비행기로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가 됐지만 당시만해도 제주도는 서울보다도 멀었다.

1966년 5월 4일. 열아홉살의 박사장은 목포에서 제주행 황룡호에 올랐다. 황룡호는 목포-제주를 왕복하는 목선으로 당시 제주도로 들어가는 전라도사람들이 대부분 이 배를 탔다. 240원을 주고 오른 목선은 14시간이 지나서야 다음날 제주항에 도착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박희수사장은 무엇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박사장은 제주시에서 진도사람을 만나 10여 일 리어커를 끌었다. 남쪽에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박사장은 105㎞ 발길을 걸어 서귀포까지 갔다. 서귀포에서도 일정한 자리를 찾지못한 박사장은 다시 성산포로 넘어가 둥지를 틀었다. 고향 진도처럼 바다가 보이고 성산일출봉이 있는 곳이었다.


박사장이 처음 시작한 일은 ‘머구리’. 사람들은 지금도 제주도의 물질은 해녀로 통하는 여자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많았다. 박사장은 제주도에서 머구리라고 불리는 배를 타고 잠수부 생활을 시작했다. 성산포 앞바다는 해산물의 보고여서 수입이 짭짤했다. 물에 들어갈 때마다 해삼과 멍게, 전복을 수북히 건져올릴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물속에서 한참동안 호흡을 중지해야 하는 잠수부 생활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온몸의 통증으로 하룻밤도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다. 머구리 생활을 4년 정도 하자 돈이 모아졌다. 박사장은 그 돈을 가지고 자개공장을 차렸다. 제주도는 전복·소라껍질이 풍부해 이를 모두 자개 재료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박사장의 사업은 5년동안 금세 번창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간 박사장은 26세가 되어 제주여자 고성애씨와 결혼을 했다. 천성이 부지런했던 박사장은 오히려 처가쪽에서 결혼을 서두를 정도로 주위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박사장은 딸을 여섯이나 낳은 후 마지막에 아들을 얻는 특이한 가족구성 경력도 가지고 있다. 박사장은 “타지에서 외롭게 지낸 터라 아들도 낳고 싶었지만 많은 식구를 가지는게 소원이었다”며 대가족 사연을 털어놨다. 박사장은 성산포의 붙박이로 살고 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순탄하게 자리를 잡은 편입니다. 호남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며 밤새 울었던 적도 많습니다.”

박사장은 지금도 제주도에서 각 행정기관의 실력자들과도 잘 통하는 사이다. 97년까지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지냈던 김승석씨와는 20대부터 사귀어온 지인이고 강태훈 전 남제주군수와 한공익 전 도의원등이 박사장을 발벗고 돕는 인사들 이다.

박사장이 이장에 당선된 지 1년만에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직행버스를 들어오게 하는 등 공약사업을 완료한데 이어 7억원이 들어가는 마을복지회관을 기획할수 있었던 것도 이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이 컸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들어와 돈도 벌었고 크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자리잡은 박사장에게도 걱정거리는 있을까. 얼핏 보아서는 고민거리 하나 없을 박사장일 것 같다.

“집에서 바라보면 성산일출봉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곳에 달만 뜨면 견딜수 없는 고향 생각에 시달려요. 그때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친구들에게 정신없이 전화를 걸어대지요.”

박사장은 지금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달만 뜨면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린다. 진도에서 관광객이라도 들어오면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기념품을 준비해 마중을 나갈 정도다. 육지 사람들은 60년대 황룡호에 올랐던 사람들과 그들의 한을 모두 잊어가고 있다. 지금 전라도에서 건너간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제주에 살고 있다. 2세, 3세까지 합하면 15만이 넘는다.

그 시절 육지사람들이 가난에 못이겨 가족 친지들을 섬으로 보내야 했다면 50년이 된 지금 이제 그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됐다. 제주의 호남인들이 갖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서울이나 부산 등지 호남인들의 그것과 또 다르다.

<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