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공비 '방첩대원' 척하다 총기 난사 ..52주년 맞은 '1·21 사건'
문대현 기자 입력 2020.01.27. 13:00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교전 中 즉사..이후 병 복무 기간 증가
(서울=뉴스1) 문대현 기자 = 설 연휴를 맞아 '민족 대이동'을 통해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거나 관광지를 찾는 등 국민들이 단란한 추억을 만드는 시간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안보 사건이 있다.
'1·21 사태', 이른바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김신조 사건)이다. 김신조 사건이 지난 21일로 52년째를 맞았다. 현 세대들에게는 이 사건이 다소 생소할지 몰라도 그 시절을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한 '1·21 사태'를 되돌아 본다.
◇무장공비들 청와대로…"방첩대원들이다" 버티다 총기 난사
1968년 1월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남쪽으로 향했다.
이 무장공비들은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했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했다.
이들은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해 하룻밤 숙영했고 19일 밤 8시30분께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의 삼봉산에서 2일째 숙영을 했다.
20일에는 앵무봉을 통과해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이들이 별다른 검문을 받지 않고 서울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방첩대'(뒤에 보안사로 개편) 마크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당시엔 군복의 방첩대 마크를 내보이면 어디 구역이든 무사통과 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방첩대의 힘이 셌는데 북측에서 이를 이용한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다.
또한 공비들이 그동안 비축해 둔 체력을 바탕으로 파주에서 서울까지 급속 산악 행군을 한 것도 남측 군 당국의 초기 저지망을 피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힌다.
자하문 초소에서 우리측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공비들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했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이윽고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공비들이 경찰의 신문에 돌연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졌고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이뿐 아니라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해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뒤에 생포된 김신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는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됐다.
◇김신조 생포하고 28명 사살했지만 2명 北으로 도주
이후 공작원들은 흩어져 인왕산과 비봉산, 의정부 등지로 도주했다. 이들은 북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우리 군과 교전이 시작되니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군경은 군경합동수색진은 비상 경계태세에 들어가 공작원 소탕 작전에 나섰고 22일 세검정 계곡의 독립가옥에서 은신 중이던 김신조를 발견해 생포했다.
이후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됐다. 도주한 이 중 한명은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간인 7명이 죽었고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등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52명이 다쳤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공비들은 비봉에 숨어 있는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朴대통령, '국가안보 우선주의' 선언…향토 예비군 창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됐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상태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4월1일 향토예비군이, 10월15일에는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됐다. 또한 현역 복무 중이던 병들의 복무기간이 대폭 연장됐다.
정부는 육군과 해병대의 복무기간을 6개월 늘려 36개월로 조정했으며 해·공군의 경우 3개월이 연장돼 39개월이 됐다. 이 복무기간은 1977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 사건으로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의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됐다. 이 길은 41년 후인 2010년에야 민간에 개방된 상태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북악산 성곽로에서 북악스카이웨이 북측면을 추가로 개방하고 2022년 완전 개방할 계획을 갖고 있다.
한편 김신조는 이후 생포 이후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오다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10일 풀려났다.
정부는 그에게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만들어줬지만 2,3개월 다니다 그만뒀고 건설회사를 다니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아 안보강연과 신앙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eggod6112@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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