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중국의 불공정 무역을 바로잡겠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선공으로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잠시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정치·경제 상황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갈등이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평화’다. 두 나라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은 멀리 앞을 내다보면서 경제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조선비즈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한국과 아세안(ASEAN) 10개국 정부 간 경제 및 사회·문화 분야 협력증진을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한-아세안센터(ASEAN-Korea Centre)’와 함께 놓칠 수 없는 ‘기회의 땅’ 아세안 주요 회원국의 변화 현장을 둘러봤다. 미·중 갈등 장기화가 뉴노멀(New Normal)이 되어버린 시대에 온전히 두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서다. 첫 결과물인 베트남 편은 앞으로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싣는 순서:
① 하노이에서 한국인은 "다리 놓아주며 앞에 가는 사람"
② 현지 진출 韓기업 어느새 9000개...中 실패 거울 삼아야
③ '코로나 끄덕없다' 베트남 경제정상화 이끄는 민관 주축 3인방 현지 인터뷰
④ ‘韓 프리미엄‘ 떨어지기 전에 신사업 발굴해야… 美·中·日과 차별화 절실
'앞에 가는 사람이 다리를 놓으면, 뒤에 가는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넌다.'
베트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오랜 격언이다. 지난 6일 오전(현지 시각) 늦은 저녁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찾았다. 첫 관문인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나와 서호(西湖·호떠이) 인근 하노이 대우호텔로 가는 차에 오르니, 10여분도 채 지나지 않아 탕롱교(橋)가 눈에 들어왔다.
‘하노이(河內·강 안쪽)’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도시 외각에서 홍강이 굽어 흘러 들어와 하노이 시내 중심부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많다. 시내 중심가 한 복판에 자리 잡은 호안끼엠 호수나 앞서 말한 서호를 필두로 호쭉박, 호버이머우 호수처럼 하노이가 품고 있는 호수만도 300여 개가 넘는다. 괜히 다리와 관련한 격언이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다.
하노이에서 한국은 ‘다리를 놓아주며 앞에 가는 사람’으로 통한다. 공항 세관 문을 나서면 곧바로 한국이 베트남 제1투자국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입국장을 나오면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입간판과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 10 광고가 가장 먼저 반긴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살짝 젖어든 미묘한 동질감은 공항에서 하노이 시내까지 가는 차에서도 내내 느껴진다. 매끈한 고속도로를 따라 놓인 옥외 광고판에는 CJ CGV, 신한은행, 현대·기아차, 롯데마트 같은 익숙한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차는 곧 베트남판 ‘경인고속도로’를 지나 시내로 향했다. 베트남에서 처음 놓인 이 고속도로는 GS건설, 포스코건설, 두산이 베트남 현지 기업과 합작해 완공했다. 현지에서는 ‘하노이의 자랑’으로 통한다. 택시 기사들은 “공항 가는 외국인이 타면 국도가 가까이 있어도, 굳이 돌아가서 이 고속도로를 탄다”고 했다.
제법 무성한 하노이 스카이라인에서 나오는 불빛이 차창에 비쳤다. 하노이 최고층 마천루 랜드마크72는 롯데월드타워를 제외하면 서울의 그 어떤 건물보다도 높다. 2007년 착공 당시 총 사업비 10억 5000만달러를 쏟아부으며 베트남 단일 투자 최대규모 자리를 꿰찬 이 빌딩은 국내 중견 건설사 경남기업의 작품이다. 하노이와 하늘을 가장 가까이 잇는 다리를 국내 건설사 손으로 만든 셈이다. 한창 공사 중인 베트남 최고 높이로 들어설 ‘비에틴은행타워’에도 대우건설이 독자 개발한 고층 빌딩 설계 기술이 들어간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은 마천루가 내뿜는 조명, 높은 건물들이 이룬 무성한 빌딩 숲은 개발도상국이 그리는 ‘잘 사는 나라’의 상징이다. 하노이 고층빌딩들은 도시 표정을 바꿨다. 괄목상대(刮目相對) 할 만큼 빠르게 바뀌는 도시 한켠에서도 이전처럼 소일거리와 잡담을 나누는 하노이 시민들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경제성장이 계속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지 기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최근 20년간 매년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나라다. 최근 3년 동안은 성장률이 6%를 넘었다. 전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특히 ‘실소득’으로 여겨지는 가처분소득도 경제성장률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만큼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 임금위원회는 자국 1인당 가처분소득이 2030년까지 매년 5.9%씩 성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매년 마이너스(-)를 기록 중인 한국과 정반대 흐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밤늦게 찾은 서호 옆 롯데마트는 베트남 설 ‘뗏’을 맞아 명절 상차림에 나선 소비자로 가득 찼다. 가처분소득은 소비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전문가들이 베트남을 거대 소비시장 잠재성이 높은 국가로 분류하는 이유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베트남 민간소비가 2019년 6.5%, 2020년 6.8%로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은 더이상 고가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길 주저하지 않는다. LG생활건강은 지난해부터 베트남에 ‘후’, ‘숨’처럼 국내와 동일한 고급 브랜드를 선보이며 프리미엄 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베트남 통계청이 추산한 하노이 평균 국민총생산(GDP)는 이제 평균 6000달러(약 700만원)선을 넘어섰다. 소비 트렌드를 전문으로 다루는 리서치 기업 닐슨은 GDP 6000달러선을 ‘가성비 중심의 소비에서 가치 소비로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으로 꼽는다.
무수히 많은 한국 기업들이 이 기회의 창이 열린 틈을 타 새로운 다리가 되기 위해 베트남으로 달려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8년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하노이로 옮겼고, 스마트폰 물량의 40%를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다. 1차 협력사와 2차 협력사가 뒤이어 짐을 쌌고, 이들은 오래전부터 하노이 인근에 자리잡았던 베트남 진출 1세대 섬유기업과 다른 경공업 기업들 옆에 거대한 한국 기업 단지를 꾸렸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2019년 기준으로 9000여개 한국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했거나 투자했는데, 올해 중 1만개 돌파가 확실시된다”고 말했다.
매년 ‘베트남은 이제 더이상 이전같은 기회의 땅이 아니며, 진작부터 과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경고가 쏟아지는 데도 이처럼 많은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서 짐을 꾸려 베트남으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의 실마리는 마트와 거리 등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인구가 950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데다, 성장세도 안정적이다. 가시적인 경제 수준은 아직 1980년대 한국을 연상케 하는 수준인데도, 정부는 선진 인구정책을 펼친다. 한국은 가족계획을 성급하게 밀어붙였다가 한 세대 만에 저출산 국가로 전락한 반면, 베트남은 출생아 규모 130만~150만명을 20년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젊은 인구만 많다고 경제가 저절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건강하고 똑똑한 젊은 인구가 많아야 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에 배당으로 돌아온다. 베트남도 교육열만큼은 한국 못지않다. 도착 다음날 찾은 차기 외교관 양성소 베트남 외교 아카데미(DAV)에서 만난 응유엔 티앙 장은 “베트남어에는 성조가 6개나 있어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도록 습득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국어나 영어 구사 여부에 따라 임금 수준이 3배 이상 차이 나기 때문에 한국어와 영어 사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베트남 대학 진학률은 23%에 불과하지만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대졸자 수요가 커지면서 대학 진학률도 같이 뛰고 있다. 10년 후에는 25~49세 교육 수준(교육 기간)이 9년에서 12년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이런 발전 속도를 보이는 나라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 중 베트남이 유일하다.
인구학의 권위자인 조영태 서울대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을 단지 생산 기지로 보지 말고 함께 성장할 소비 시장으로 바라보고 투자해야 한다”며 “베트남에 진출하길 바라는 기업들은 대개 '출구 전략'에 대해 궁금해하는데, 발전 속도와 가능성을 고려하면 성급하게 수익을 빼기 보다, 현지에서 더 큰 이익을 창출하는데 재투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번 놓은 다리를 스스로 무너뜨리지 말고, 계속해서 자본과 관계가 오가는 통로로 삼으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