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적자가 불량 식품이라면 발권력 동원은 마약
조선일보
- 박종세 부국장 겸 경제산업에디터
입력 2020.06.08 03:16
박종세 부국장 겸 경제산업에디터
코로나 바이러스 쇼크는 이전엔 불가능해보였거나 금기시됐던 것을 성큼 방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 한국은행이다. 한은은 금리를 사실상 하한선인 0.5%까지 내렸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들이는 양적완화를 선언한 것도 과거 한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늘 인플레와 싸워왔던 중앙은행이 디플레 파이터로 나서고, 반박자씩 늦어 정책 효과를 반감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모습에도 변화가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은의 행보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한은은 사실상의 제로 금리를 결정하면서 정부가 찍어내는 적자 국채도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무서울 정도로 빚을 내고 있는데, 1·2차 추경에 이어 3차 추경에만 사상 최대 규모인 35조3000억원을 편성했다. 이 안이 국회 심사대에 채 오르기도 전에 벌써 4차 추경 얘기가 흘러나온다. 올해 사업 부진과 소득 감소로 세수는 최대 18조원까지 펑크가 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번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쓰는 구조이고, 이 차액만큼 빚을 낼 수밖에 없다. 현 정부는 올해에만 100조원이 넘는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대거 국채를 발행하면 시중에 채권 발행 물량이 넘쳐 금리가 불안해지는데 이를 막기 위해 한은이 적극적으로 국채를 사주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한은의 협조가 없으면 정부가 맘대로 적자 국채를 찍어내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코로나 쇼크 이전엔 기재부 장관과 한은 총재가 만나기만 해도 정부가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총선 이후, 당·정·청은 거칠 것 없이 적자 국채를 찍겠다고 밀어붙이고, 한은은 발권력으로 이를 뒷받침하겠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견제와 경고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불과 4년 전 당시 박근혜 정부와 현 야당이 조선업 구조 조정을 위해 펀드를 조성하고, 여기에 한은이 돈을 태우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들고 나왔을 때 한국은행 노조와 현 여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 한은 노조는 "한은 발권력을 구조 조정에 쓴다는 발상"이라며 "재정 적자가 불량 식품이라면, 발권력 동원은 마약"이라고 비판했다. 1차 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와 대원군의 당백전을 묘사한 카드 뉴스를 만들며 "발권력은 동의받지 않은 세금"이라고도 했다.
위험해 보일 수 있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별다른 제지 없이 통과된 데는 세계 각국이 이미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게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 쇼크는 밀레니얼 소셜리스트의 망상처럼 보였던 MMT(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를 현실로 끌어들였다. 정부가 아무리 재정 적자를 내더라도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공급하면 되기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나지 않는 한 자국 통화 표시 부채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게 MMT의 골자다. 그러나 이것은 기축 통화국만 누리는 호사일 뿐이다. 신흥국이 MMT 흉내를 내는 순간 환율 급등, 외화 자금 이탈, 신용 등급 강등이라는 벽에 부딪혀 재앙을 맞을 수 있다. 국제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으면 한국 경제는 언제든 IMF 쇼크 같은 위기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2016년 한은 노조는 "금융시장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정책 금융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1989년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경계의 메시지는 2020년에도 똑같이 울려 퍼져야 한다. 포퓰리즘 정부의 빚 중독에 독립성을 잃은 한은의 발권력이 결합하면 국가엔 재앙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7/20200607022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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