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간 김정희의 세한도, 어떻게 돌아왔을까근대 서예가 소전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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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1.15 10:59 수정 2018.11.1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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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서예를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다. 그는 조선시대에서 내려온 전통 서예의 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여 한국 서예의 모습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루어낸 새로운 양식의 서체는 현대 한국 서예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또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서예(書藝)'라는 용어도 손재형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중국의 '서법(書法)'과 일본의 '서도(書道)'에 상응하는 의미로 '서예'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 손재형 ⓒ 황정수
어려서부터 서예를 익혔던 손재형은 일제강점기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에게 배워 필법의 틀을 완성한다. 당시에 손재형은 서촌 끝 북악산 자락 효자동에 살았는데, 서촌 입구 광화문 근처 당주동에 있던 김돈희의 서실에 나가 글씨를 배웠다.
김돈희는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황정견(黃庭堅)의 필체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 약간 길쭉하면서 비스듬한 모양의 황정견체는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글씨체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 글씨는 황정견체의 필법이 강하였다.
스승 김돈희가 1937년에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잃은 손재형은 바로 이웃에 사는 서화가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4)의 집에 드나들며 가까이 지낸다. 그때부터 글씨에 변화가 생겨 이한복이 즐겨 쓴 청나라 서화가 오창석(吳昌碩)의 필체를 닮은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이한복도 몇 년 안 있어 세상을 떠나자 손재형은 스스로 자신의 필체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 마침내 '소전체(素荃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만들어낸다. 이 필체는 고래로 내려오는 서체와 다른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새로운 양식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내었다.
손재형이 추종한 추사 김정희
▲ 손재형 ‘사무사(思無邪)’ ⓒ 황정수
손재형은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진실한 서예가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예 정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하여 늘 그처럼 되기를 원하였다. 집 이름을 '추사를 존중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존추사실(尊秋史室)'이라 쓰기도 하고, 때론 '완당을 숭상하는 집'이라 뜻의 '숭완소전실(崇阮紹田室)'이라 쓴 것도 김정희를 기리는 뜻에서 지어 부른 것이다.
그가 추사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서예계 선배인 이한복의 영향도 컸는데, 두 사람은 '추사광(秋史狂)'이라 불릴 정도로 예원에 소문난 김정희 애호가였다. 두 사람은 효자동과 궁정동 바로 몇 집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살아 자주 만나 추사의 글씨에 대해 논하곤 하였다.
손재형과 이한복 두 사람이 서예를 공부하며 김정희에게 깊이 빠진 것은 어찌 보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시간 인왕산 자락에 살며 서예를 수련하였는데, 그들이 좋아한 김정희 또한 멀지 않은 인근 통의동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의 끈 덕분이었는지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특유한 경지에 이른 필법을 완성한다.
이한복이 4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손재형은 그동안 이한복이 연구하고 수집해온 서예 연구 자료와 서화골동들을 상당 부분 인수한다. 이렇게 해서 이한복이 모아 온 김정희의 작품과 연구 자료가 흩어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손재형은 더욱 서예 연구에 몰두하였고, 고서화 수집에도 열을 올려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고미술 수장가가 된다.
추사 연구자 후지츠카 치카시와 '세한도'
▲ 후치츠카 치카시와 아들 아키나오 ⓒ 추사박물관
손재형은 조선시대의 좋은 서화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김정희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유명한 작품은 김정희 필생의 명작이라 불리는 '세한도(歲寒圖)'다.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세한도'를 입수하게 된 일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본래 '세한도'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璘, 1879-1948)의 소장품이었다. 후지츠카는 김정희의 학문과 작품에 매료되어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이다. 현재 세상의 김정희에 대한 높은 평가는 상당 부분 그의 연구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만하다.
후지츠카는 김정희와 관련된 것을 수집하기 위해 경성뿐만 아니라 중국의 북경까지 드나들며 많은 것을 사들여 그 종류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그의 집이 재산이 많은 편이었는데 자료를 사들이느라, 나중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세한도' 또한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세한도'는 당시 재력가인 민영휘의 소유였는데, 마침 경매에 내놓은 것을 후지츠카가 고가임에도 낙찰 받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간다.
후지츠카가 '세한도'를 비롯한 모든 자료들을 가지고 도쿄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손재형은 크게 낙심하여 급히 도쿄로 건너간다. 물론 '세한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 때문이었다. 손재형은 후지츠카의 집을 찾아 '세한도'를 양도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그 또한 추사에 관해선 양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 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손재형은 계속해서 두 달 동안 매일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러자 마음이 열린 후지츠카는 아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하고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손재형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집을 찾아 부탁하였다. 석 달이 가까워지자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마음이 단순한 사심이 아님을 알고 양도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대의 나라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는 말과 함께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냥 넘겨주었다. 그렇게 전설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함께 '세한도'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세한도'의 제작에 얽힌 사연
▲ 김정희 ‘세한도’ ⓒ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것은 1844년, 제주도에 귀양 가 있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 유배된 지 4년쯤 되니 찾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고, 육지 소식마저 접하기 어려워 외로움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런데 마침 생각지 않은 반가운 선물이 찾아온다. 바로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중국에서 구입해 보내 온 책이 온 것이다. 추사는 매우 감동한다.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쫒는데, 제자가 이렇게 스승을 생각하니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호의에 대한 답으로 그림 한 폭을 그려 보낸다. 이 그림이 바로 '세한도'이다. '세한도'라는 제목은 '추운 겨울이 된 뒤에나,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이상적의 마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림 제목 옆에 '우선은 보게(藕船是賞)'라고 써 이상적에 대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우측 아래에는 '오랫동안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의미의 인장을 찍어 제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생각지 않은 그림을 받은 이상적도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다. 그는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 이 그림을 가지고 중국 연경에 들어가 친구들에게 제발을 받아오겠다는 뜻을 전한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이듬해 중국에 들어가 친분 있는 문인 16인의 제찬을 받아 '세한도' 뒤에 붙여 장황을 한 뒤 귀국한다.
이렇듯 사연 깊은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그의 아들 김준학, 그리고 민영휘를 거쳐 후지츠카의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손재형이 찾아왔으니 제주도에서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중국·일본을 다녀오는 등 파란만장한 여정을 보낸 후 고국으로 귀국한 것이다.
사연 많은 난초 그림 '불이선란'
▲ 김정희 ‘불이선란’ ⓒ 국립중앙박물관
손재형의 소장품 중 김정희의 작품으로 '세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 불리는 난초 그림이다. 이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 또한 전설적이다. '불이선란'은 작품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 과정에 대한 내력이 흥미로워 관심을 끈다. 또한 완성된 이후 소장자가 바뀌어 가는 과정의 굴곡이 심해 미술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던 김정희가 20년 만에 다시 난초를 그린다는 재미있는 화제가 붙어있다. 본래 이 작품은 '달준(達俊)'이라는 어린 시동에게 그려주려 했던 것인데, 마침 집을 방문한 전각가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좋다고 하며 잽싸게 빼앗아갔다는 뒷이야기까지 쓰여 있다. 이런 우스우면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작품 위에 적히며 이 작품은 명품으로서의 아우라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특별한 배경을 지녔던 탓인지 이 작품은 오규일의 손에 들어간 이후 파란만장한 여정을 시작한다. 먼저 오규일과 같은 추사 문하였던 김석준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장택상에게 넘겨진다. 장택상은 정치가로 미술품을 많이 수집하였던 사람인데, 이 작품을 오래 가지고 있지는 못하고 얼마 후 이한복에게 넘겨준다. 그런데 이한복이 또한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세상을 그와 가까웠던 손재형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니고 있을 것 같았던 손재형은 갑자기 정치 참여의 바람이 불어 대부분의 소장품을 처분할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당시 개성 부자로 명동의 유명한 사설금융업자인 이근태에게 잡혔다 되찾지 못한다. 그러나 이근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종 업종에 있던 같은 개성 사람 손세기에게 넘겨 지금까지 그의 집안 소장품으로 이어오고 있다.
다행히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 속에는 작품의 내력을 알려주듯 소장자의 인장이 많이 찍혀 있는데, 각 인장의 수준이 높아 한국 미술품 중에서 인장의 멋을 잘 살린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세한도'가 돌아온 후 60여년 후에 일어난 일
'세한도'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60여 년이 지난 2006년,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는 그동안 소장해온 부친의 자료를 과천시에 무상 기증한다. 오래 전 손재형이 무작정 찾았듯 과천시의 관계자들이 찾아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기로 약속한다.
그동안 아키나오는 부친이 모은 책과 추사 관련 자료를 조선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라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아키나오는 돈을 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추사 연구에 써달라고 연구비로 2천여만 원의 돈을 내놓기까지 하였다.
이런 아들의 행동을 보면 후지츠카 치카시가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무상으로 건넸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제격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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